먼 곳에서 온 마음 #35

"이상적 모성의 폭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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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보이가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로 행세하기 위해 엄마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보호받으며 대장놀이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애를 지킨답시고 폭주하며 더 개념없는 애를 만들어낸다. 개념없는 마마보이들이 너무 많아 세상은 망한다.


에반게리온의 내용의 전부다.


이것은 다만 이상적 모성을 희구하는 마마보이의 얘기일 뿐이다.


극장판의 내용까지 합치면, 마마보이는 결국 엄마에 대한 일그러진 애착이 모든 일을 파괴적으로 이끌었음을 이해하는 척하며 엄마의 자궁에서 벗어나겠다는 시도를 한다.


그 노력의 결과 끝내는 어둡고 끈적한 애착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자신에게 상처주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은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서, 마마보이는 엄마에게서 독립해 성숙한 연인을 만나 결혼하는 것으로 자신의 서사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까지가 이상적 모성을 희구하는 마마보이의 얘기다.


마마보이는 모성에서 독립해 성숙한 여성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엄마로 갈아탄 것뿐이다.


(심지어 그 새로운 엄마는 실제 엄마의 친구이기까지 하다. 동시에 자기가 증오하는 자기의 아빠를 그녀가 짝사랑했다는 사실은 덤이다. 뭔가 일그러진 성적판타지를 극도로 충족시켜주는 이모와의 결혼인 셈이다.)


결국 온갖 심오한 폼은 다 잡으면서 에반게리온이 말하고자 한 바는, 개인이 불안정한 애착에서 벗어나 건강한 애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1980년대 애착이론의 지루한 반복이다. 나쁜 엄마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좋은 엄마를 얻는 것이 개인의 구원이라는 졸린 결론이다.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의 인생과도 같다. 에반게리온의 한계는 안노 히데아키의 한계다.


자신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잠도 재워주며,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만족을 얻게 해주는 모든 자상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며 "우리 마누라 짱짱!"을 외치는 그 모습은 이제야 이상적 모성을 자기의 것으로 얻게 되었다는 마마보이의 행복한 미소와도 같다.


이처럼 마마보이의 궁극적 판타지가 무엇인지를 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의 가치는 평가될 수 있다.


이것은 마마보이에 대한 심리보고서와도 같다. 특히 망상을 또 다른 망상으로 덮어씌우며 평생을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마마보이의 심리적 생태를 잘 보여주는 보고서다.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징징대는 마마보이들을 향해, "쯧쯧. 언제까지 엄마나 붙잡고 살거니. 이제는 성숙해져야지. 어서 너희들도 친절하고 상냥한 서비스를 제공해줄 성숙한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도록 하렴."이라며 여전히 죽을 때까지 가장 마마보이인 이가 자기는 이제 성숙한 척하며 점잖게 선비처럼 타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코미디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입체적 보고서다.


에반게리온을 묵시록적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히브리의 신화를 차용해 뭔가 있어보이는 척하는 종말론적 분위기를 내려는 그 포장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에반게리온의 예언적 필치는 오늘날 마마보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보이는 생태를 거의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의 정신적 후속작은 강풀의 무빙이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폭주하는 초능력 부모들의 행보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즉 폭주의 주체를 정확하게 부모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또 그런 부모들의 모습을 이상적인 부모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에반게리온이 은근하게 말하고 싶던 바를 그냥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게 이상적 모성의 폭주는 더욱 노골적으로 숭상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짐승같은 모습으로 화를 내는 것만이 폭주가 아니다. 광화문 하늘을 신처럼 날아다니는 것도 폭주다. 차원을 넘나들며 이카리 신지를 찾으러다니는 신지의 마누라 마키나미 마리의 모습도 동일하다.


마키나미 마리는 신부로 삼고 싶은 히로인 1위에 등극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 인기가 성대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부가 아니며, 연인이 아니다. 은하철도 999의 메텔이 더욱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한 그 역할, 즉 행동하는 모성이다. 그 행동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지극히 전투적이고, 또한 맹목적이다. 이는 일종의 광기다. 광기라서 광신을 부른다.


이상적 모성은 정말로 어떤 광기에 휩싸여있는데, 그것은 '너를 구원하는 나의 모습'에 미쳐있고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모습에 대한 광신이 생겨난다.


이는 다시 말해 통제에 대한 광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를 구원하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너를 통제하는 나의 모습'이다. 유한자에 의한 유한자의 구원이란 통제로밖에는 달성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상적 모성은 전적인 통제의 기제다.


자상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알아주며, 상냥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가르치며, 경우에 따라 엄격하게 혼내기도 하고, 매섭게 꾸짖어 인간됨의 도리를 알게 하는 그런 총체가 바로 통제의 실제다.


심리상담의 이론들에서 애착의 개념에 경도된 정신역동적 관점들이 대개 이 통제의 기제를 활용하곤 한다. 특히 융은 이상적 모성에 대한 절대적인 동경을 갖고 있다. 그러니 상담자의 역할도 그러하다. 상담자가 이상적 모성의 담지자가 되어 내담자를 재양육하거나 건강하게 훈육하여 안정애착을 형성하게 하는 일을 주목표로 한다. 프로이트는 물론 자신의 이론이 이러한 신적 엄마놀이를 위한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에 매우 속상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욱 이상적 모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제 최면을 하게 된다. 최면은 완전통제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가장 좋은 치유자로서 최고의 훈육과 도덕적 가르침을 최대치로 제공해 대상자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발달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이들은 상담이나 최면 같은 활동을 통해 자기가 대상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인자한 현자나 대마법사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를 간주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하라며, 자기가 어떤 육성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이 자식이 주인공이 되는 일을 정성껏 지원하는 플레이어의 역할을 맡으려 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즉, 일종의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것이다.


왕 뒤에서 왕을 만드는 진정한 왕, 바로 수렴청정의 현실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게 원래 조선의 모성의 이상적 꿈이었다. 이상적 모성은 자연스레 그 꿈을 목적한다.


"소중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이제 당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문구는 이들이 한다고 하는 상담이나 최면활동을 홍보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이런 것은 최면일 수는 있을지언정 상담은 아니다.


상담은 상담자가 자상한 엄마가 되어 이야기를 잘 들어줌으로써, 또 이야기의 편집을 친절하게 도와줌으로써 내담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활동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이상적 모성에 대한 희구를 끊는 활동이 상담이다. 프로이트의 시절부터 그러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상담을 찾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것은 상담자에게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이상적 모성을 얻기 위해 상담에 온다는 말과 같으며, 곧 상담자에게 전적으로 통제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여기에 동의해서 활동하는 상담자가 있다면, 그는 선량한 얼굴로 내담자를 착취하고 있는 이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릴 수밖에는 없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든 간에 상담자의 역할은 분명하다.


상담자는 최초로 거절하는 자여야 한다. 또는 최후로 거절하는 자여야 한다. 그 둘은 같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엄마가 아니고, 친구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은밀한 모성 또한 아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만나는 최초의 타자여야 하며, 또는 마침내는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최후의 타자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담자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없는 자여야 한다.


그렇게 상담자는 내담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자가 아니라, 내담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앞에서 증거하는 자다.


그렇다고 상담자가 주인공인 것은 더욱 아니다.


상담에서는 상담자도 내담자도 주인공이 아니다.


상담은 세상의 축소판이며, 그렇게 세상에서는 너도 나도 주인공이 아니다. 정확하게 활동하는 상담자를 통해 내담자는 그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은 존재다.


존재만이 주관한다.


내 자신은 존재의 아이이지, 엄마의 아이가 아니다. 엄마도 실은 존재의 아이다. 우리의 관계는 차라리 남매나 자매에 가깝다.


엄마와의 불건강한 애착에서 벗어나 이제 성숙한 연인과 건강한 사랑[애착]을 한다는 망상은, 여전히 자신이 엄마의 아이라는 착각 속에서 생겨난 가난한 자구책이다. 그 착각 속에서 자신이 이상적 모성의 도움으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착각 또한 파생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나쁜 엄마를, 자기를 지지해줄 좋은 엄마로 갈아치우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조잡한 발상이 생겨난다.


이 조잡한 발상을 정답처럼 지속하고 있는 상태를 마마보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마마보이는 일종의 정신병적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존재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어야 한다고 망상적으로 고집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이와 같은 집단정신병 또는 집단광기의 사태다. 대안적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바로 그 모습까지 포함해서 망상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상적 모성에 대한 추구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모성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이제는 모성에서 벗어나 건강한 다른 것을 하는 것처럼 믿도록 자발적인 최면에 빠지게 함으로써, 평생 이상적 모성의 지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모습이야말로 이상적 모성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세상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이상적 모성의 궁극적 폭주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며, 세상에는 이렇게 아무 이유없이 너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는 거라며, 우리가 다 이처럼 한 마음으로 너를 지키고 있으니 좌절금지라며, 오늘도 어벤져스들 날아다니는 소리에 밤하늘이 소란하다.


땅에는 배달오토바이들, 하늘에는 초능력부모들, 심신양면으로 마마보이들을 만족시켜주려는 폭주로 인해 연말이 아주 영광되다. 영롱한 광기로 빛난다. 이런 것이 인류보완계획이었나보다.


존재는 이야기로 보완하고, 인류는 이상적 모성으로 보완한다.


존재를 자기 없으면 안되는 바보로 만들며 사기치는 그 모든 소리에 밤은 더는 고요하지 않고, 우리는 쉴 곳이 없다.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시오."라는 좀머씨의 말이 더욱 절실한 음색으로 귓가에 맴도는 오늘날이다.


그것은 주인공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는 신성한 존재의 목소리.


주인공이 사라지면 킹메이커인 이상적 모성도 사라진다.


자기는 모성이 아니라 성숙한 연인인 척 위장하고 있는 엄마친구도 사라진다.


그 모든 모성재들이 사라지니 마마보이도 사라진다.


지구는 더는 습격받지 않으며, 에바 따위에는 탈 일조차 없다. 폭주도 없고, 광란도 없다.


지구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이것이야말로 신세기.


인류는 새로운 계명을 얻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다며, 이상적 모성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


인류는 기나긴 고통 끝에 마침내 배운 것이다.


지구평화를 이룰 참된 그 방법을.


모성이 제공하는 특별성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떠나 평범하게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는 그 오랜 진실을.


나는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예언적 진술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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