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마음 #36

"깨달음의 길은 다양한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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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은 다양한가? 소위 '나만의 길'로 가서 깨달을 수 있는가? 나만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고 깨달음은 하나의 길이다.


못깨닫는 길이 다양할 뿐이다.


이 산으로 올라가든, 저 산으로 올라가든, 혹은 같은 산이지만 다른 등반로로 올라가든, 또는 50층 빌딩에 올라가든, 시소 위에 올라가든, 자기 집의 밥상 위에 올라가든, 그렇게 올라갈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올라간 곳이 어디이든 간에 그 정상에서 뛰어내리게 되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자기가 지금껏 무엇을 쌓았든, 그것이 지식이든, 자본이든, 경험이든, 또 정체성이든 간에, 쌓은 그걸 다 버리게 된다. 다 포기하게 된다. 그 하나의 길이다.


깨달음의 소재는 분명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버릴 것들이 다양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버리는 것 하나뿐이다.


자신은 다 버렸는데 왜 못깨닫냐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깨닫기 위해 버리는 자라는 그 자기인식을 버려야 한다.


버리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위해 버린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직하지 않아서다.


더는 갈 수 없고, 이미 한계이고, 이제는 더 이렇게 살 수도 없기에 그만 살려고 버리게 되는 것이지,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깨닫기 위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아직도 더 갈 수 있다고 내심은 생각하지만, 깨달음을 위해 버려야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그렇게 버리는 척을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없다.


그냥 더 올라가는 것이 좋다. 아직은 거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거니까.


아직도 자기가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쌓고 있다고, 또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거지 같은 것이고, 철저히 무의미하며, 그런 것을 쌓으려고 살아온 자신의 과거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정상의 풍경이다.


정말로 자신이 쌓은 탑의 정상에 오르면 죽고 싶어진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대단하고 특별한 것으로 만들겠다고 쌓아올린 그 모든 바벨탑의 끝은 무(無)다. 자신이 얻으리라 기대했던 것은 그곳에 전혀 없다. 시간만 버렸다. 애먼 힘이나 낭비했다.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치고 자기를 속인 거라 누구를 원망도 못하겠다. 이 인생은 통째로 잘못된 것이었다.


정상에서 최후의 정직함을 가질 수 있었던 이는 그러한 사실을 본다.


그리고 이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상에서 몸을 던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몸을 던지는 그 순간에 아마도 최후의 정직한 그 눈에는 나비가 보일 것이다.


아무 높이를 쌓지 않아도 높이 날고 있는 그 경이로운 존재가.


어떤 높이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높이 날고 있는 그 말도 안되는 존재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는 이러한 순간들이 잘 묘사된다. 이 책은 뭐 이보다 더 직접적일 수 없는 담대한 종교적 우화다.


그렇게 자신이 쌓은 그 모든 것을 가장 정직하게 스스로 부정할 수 있게 된 이에게는 기회가 주어진다.


인생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가.


이 리셋의 경험을 보통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깨달음이 감동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가장 최후의 순간에, 정말 마지막임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한 그 순간에, 그렇게 교수대에 막 목이 걸리기 전에 내밀어진 회생의 티켓이다.


한 번 더 해보라며.


하나의 상징적 그림처럼 인생의 요약판인 주마등도 보게 된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테마가 무엇이었는지도 분명하게 알게 된다. 보이고 들리니 모를 수가 없다.


그것은 망상을 쫓아온 아주 긴 궤적.


그리고 그 궤적을 쫓아 늘 바로 눈앞에만 있어온 진짜와의 만남.


그 모든 망상 속에서도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이 순간 내가 다시 찾은 것은 존재며, 나는 존재한다.


다시 한 번 존재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 어떻게 언어적 이야기에 매몰되어 그 공허한 언어들만을 쌓다가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되었는지, 그렇게 존재를 잃게 된 뒤 이야기로 대신 존재하는 척만 해왔는지를.


나는 진짜로 이렇게 존재하고 있었는데.


중력의 법칙보다도 더 분명한 사실적 법칙으로서.


이제 다시는 잊지 않으리라. 진짜로 존재하는 그 삶만을 살리라. 이 서원은 세포에 새겨진다. 깨달음의 상태체험이 사라진다 해도 이것은 존재의 구조로 자리잡는다. 무엇을 봐도 존재의 법칙 속에서 보이게 된다. 존재를 그만큼 신뢰하며 근본적으로 존재에 다 맡기는 삶이 펼쳐진다.


과거는 미화되지 않는다. 똑같은 바보짓은 다시는 하지 않게 된다.


가장 하지 않게 되는 일은, 자신이 해왔던 바보짓을 통해 자신은 깨달았다며, 이것이 길이라며, 그 바보짓을 남들에게 시키는 일이다.


아니다. 그것은 깨닫는 나만의 길이 아니라, 나만이 못깨닫는 이유였을 뿐이다.


바로 그 일을 포기한 것이 단지 길이었다.


자기가 존재를 대신해 무엇인가를 쌓고 있던 그 모든 것이 놓아진 그 자리에서, 존재는 당연하다는듯이 활짝 드러난다.


깨달음은 이 단 하나의 길, 바로 존재의 길이다.


정직한 눈으로 존재를 눈치채게 된 이가 존재로부터 다시 받은 기회다.


우리가 존재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우리가 존재를 지속하고,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것인가?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인지가 분명해진다.


존재가 우리를 지속한다.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이끌어간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 존재가 나를 하는 것이다. 존재가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게 되는 일도 단 하나뿐이다.


이 존재함을 사랑하는 일.


그걸 하려고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걸 할 때 우리가 진짜로 존재하는 삶이다.


그렇게 존재의 깨달음이 고유한 나를 만들어주는 것이지, 내가 깨닫는 다양한 나만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살고 있는 이들이 깨달음도 그러한 비교우위의 소재로 간주하기에, 마치 슈퍼마켓 상품을 고르듯이 다양한 깨달음의 길을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또 그 선택들의 취합을 통해 자신은 깨달음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애벌레는 어떤 나비가 될지 선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안에 이미 존재한다.


또한 나비는 애벌레였던 삶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앞에 이제 존재한다.


깨달음은 남과 다를 수 있어 다양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다를 수 있어 다행인 것이다.


기적적으로 한 번 더 받은 기회를 이번에는 살릴 수 있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다.


정말로 다르게 사는 길, 그 하나의 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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