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색이 없어서 문제였다"
나는 오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개성이라고 하는 가상의 것에 몰두하고 있어서 깨달음이 어려워졌다고 오해했다.
그게 아니다.
개성이 없어서 어려웠던 것이다.
자기의 색(色)이 없어서 공(空)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만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자신을 오해한다. 자기가 개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한다.
오늘날은 다 똑같은 특성을 자기의 개성이라고 주장한다. 대량생산의 공산품을 소유하면서 자기만 그걸 가진 줄 아는 현대사회의 폐해다. 마찬가지로 다 동일한 정보를 소비하면서 자기만 특별한 마법적 앎을 가진 것처럼 행세한다.
공장에서 나온 것처럼 다 똑같다. 진짜 개성이 없다.
다만 모든 것을 두루두루 잘 알려 하고, 그만큼 모든 것을 두루두루 잘 알아주려 하는 일들만을 한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분야에 대한 일정수준 이상의 권위를 가진 양 굴며 평론가 놀이를 하는 것은 덤이다.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색이 없다. 흐리멍텅하고 졸립다.
색이 없는 것은, 모두에게 사랑받기만을 꿈꾸는 착한 아이들. 똑똑하고 정의로우며 상냥한 학급반장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아이들.
남들이 좋아할 것 같은 색들로만 칠해져있거나, 아예 무색이다. 그래서 자기의 색이 없다.
세상 모두가 다 그것을 부정한다 해도 목숨걸고 지키고자 하는 그런 자기의 색이 없다.
그러니 제일 깨달은 척은 할 수 있어도, 제일 깨닫기는 어려운 이들이다.
이들은 선택하고 결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보이는 것들을 다 취합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얕고, 색이 흐리다.
결단하며 사는 이는 도무지 취합할 수가 없다. 깊이 들어갈수록, 다 두루두루 좋아보이기만 하던 것들이 서로 커다란 모순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좋아보이는 것들을 정직하게 더는 동시에 주장할 수가 없다. 그렇게 자신이 결국에는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포기를 통해 그는 남은 것에만 집중한다.
이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는 결단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그의 특성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소위, 호불호가 분명해진다.
그는 지금 개성을 얻은 것이다. 깊이가 생겨난 것이다. 색이 진해진 것이다.
그러면 그 색이 분명한 그림이 지워질 때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을 것이다. 일종의 자기부정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파도가 밀려와 그 그림이 지워지기를 꿈꾸게도 될 것이다. 그렇게 어떤 거대한 자유에 대한 감각을 분명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깨달음의 경계에 서있는 상태다.
모래사장에 앉아 목숨을 걸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인생을 다 바쳐 그린 그림과 우주의 섭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깨달음이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경계를 보통 자아라고 부른다.
이러한 차원에서 잭 엥글러의 "무아(nobody)가 되려면 먼저 자아(somebody)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오늘날 유행하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거나, 페르소나 또는 본캐와 부캐 등으로 부르는 문예창작적 우회의 소재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날의 자아는 서사정체성의 소설쓰기를 통해 자기의 추상적 분신 같은 것을 만들어낸 뒤 자기는 그 뒤로 숨어버린다. 오히려 자기는 자기가 소설로 만들어낸 그러한 '자아들'을 알아주는 진정한 무엇인 척하는 일에 바쁘다.
이것이 정직하지 않고 기만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자아는 반드시 목숨을 걸고 추구하며 사수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자아의 색이 진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여여한 척하는 자아는 어떤 것에도 목숨걸지 않고 자기는 신선처럼 이 모든 것을 유희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게임의 감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게임을 못하는 이의 감각이다. 게임을 잘하는 이는 게임에도 목숨을 건다. 실은 모든 것에 다 어중간하기에 게임에 대해서도 흐릿한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다 어중간해지는 것은 어떤 것에도 미움받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색이 흐릿해진다. 어떤 것에도 목숨을 걸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목숨이 이미 걸려 있어서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그 평가의 시선에.
몰개성은 사람들로부터의 호의적인 시선과 인기를 잃는 일이 죽을 만큼 두렵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가장 에너지를 써서 방비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세상 모두가 자신의 어떤 것을 부정하면 자기도 그것을 부정한다. 그렇게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사람들의 우호도를 지속하고자 한다.
이들에게도 이처럼 자기부정이라는 것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자기부정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한 것.
즉, 몰개성의 이들은 관계를 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무한한 것을 향해 일어나야 할 자기부정이 또 다른 유한한 것을 향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유한한 자신'과 '무한한 관계'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리고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향해 자기 자신을 비우며, 이제는 자기가 더욱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 이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의 내용이 된다.
이것을 바로 우상숭배라고 부른다.
우상을 숭배하는 동안에는 색이 있을 수 없다. 자기를 비워 우상을 모신다며, 공한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한 척하고 있는 동안에는 색이 있는 척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껍데기만 있고 그 안이 텅텅 빈 사물과 같다.
우상의 숭배자도 우상과 동일한 속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관계라는 것이 실은 텅 비어 있는 공허한 것인 만큼, 관계를 무한한 것으로 보며 숭배하는 이도 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허무주의와 불감증이다. 색이 없을 때 생겨나는 대표적인 증세다.
자기가 관계를 위해 스스로를 비우고 있는 이 우상숭배의 일을 마치 자기가 깨달은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자신 안에 커다란 공간이 있어 외부의 관계적 대상물을 그 안에 받아들여 품어준다는 식이다.
켄 윌버는 이러한 모습을 '전초오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실은 미발달되어 백지인 상태를, 자신이 초월되어 백지인 상태라고 착각하는 오류다.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잃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에게 맞추어주고 있으면서, 자기가 사람들을 수용하는 품새를 취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자기에게 호의적인 유사 부모의 대상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가장 아동인 상태면서, 자기가 그 모든 것을 오히려 품어주고 있는 가장 높은 권위자의 상태라고 착각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몰개성의 이들은 이처럼 개념의 오류에 빠져 있는 까닭에 매우 자주 개념이 없어진다. 진짜 권위자들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도 동격인 척하거나, 자기는 한층 더 높은 자리에서 평론하는 권위자 위의 권위자인 척한다.
억지로 끼워맞추자면 이런 것들이 아마도 몰개성의 색이라면 색일 것이다.
조금도 조화롭지 않은 각종의 그로테스크한 문양으로 뒤덮인 딱정벌레 같은 것이다.
똑같은 문양을 가진 개체들이 현재 지구상에 한 79억 마리 정도 있는 것 같다.
한 종에 속하는 개체들 속에 몰개성적인 동일성이 지배적으로 드러나면, 그 종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인간종이 현재 그러하다.
깨달음은 인간종의 지속가능성에 정말로 일조하는데, 그것은 개체들의 색을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색이 분명할 때만 깨달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기에 이는 자연스럽게 몰개성의 동일성을 깨는 일이 된다.
더 쉽게 말해보자.
깨달음은 장미꽃이 장미꽃 그 자신으로 피고, 안개꽃이 안개꽃 그 자신으로 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물의 경우에는 깨달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섭리를 따라 일어난 이미 자연스럽고 온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존재의 섭리에 저항하여 자기의 색이라는 것을 목숨을 걸고 고집하다가, 그 끝에서야 자기가 고집하던 것을 놓고는 섭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색으로 물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비로운 점은, 인간이 고집하던 그 색과 존재로 물든 색은 같은 질감의 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미꽃이 자기는 장미꽃어야 한다면서, 다른 꽃들과 싸우고, 바람과 싸우며, 자신이 장미꽃임을 증명하려 하는 현실 끝에, 더는 저항의 힘을 낼 수 없는 그 지점에 이르러, 존재가 걸어온 말을 듣게 되는 현실과도 같다.
네가 장미꽃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너는 원래 장미꽃이라고.
그렇게 장미꽃이 장미꽃임을 깨달은 것 같기에, 인간의 경우에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자아는 어떻든 간에 눈치는 채고 있는 것 같다.
자기에게 내재된 존재의 형상을.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될 수 있을지만 모를 뿐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 방법을 알아서 부단히 실천해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기까지 하다.
나는 이것이 자아의 사랑에서 비롯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자아는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경계에서 태어난 것.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다.
너무 사랑해서, 어떻게든 빨리 다가가 자기의 것으로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자아는 거대한 사랑을 직감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방법은 언제나 기다림이다. 자아가 알아야 할 것도 기다림뿐이다.
기다리면 색이 진해진다. 장미꽃은 기다림으로 장미꽃이 되고, 애벌레도 기다림으로 나비가 된다.
이 기다림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있던 것과 같다.
어떤 자아는 빨리 소유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쫓겨 관계로 다가간다. 자기가 기다려온 것이 관계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사회적으로 힘의 소재인 것 같기에 동시에 그것이 무한한 것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아는 관계를 사랑하려고만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계가 자신을 살게 해줄 것이라고도 열렬히 신앙한다.
어떤 자아는 반대로 관계에 매몰되는 대신에 자신의 자리를 선택과 집중으로 좁혀 기다린다. 번데기가 되어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애벌레의 모습과도 같다.
하나의 자아는 관계를 통해 살려고 하며, 다른 하나의 자아는 관계에서 죽으려 한다.
전자를 몰개성이라고 하고, 후자를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틀림'의 문제다.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엄한 것을 사랑한다고 하는 일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다.
누군가가 몰개성도 개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개같은 성질을 뜻한다고 바로 알아 듣는다. 주인도 못알아보는 개같은 성질이다. 정확히는 주인만 못알아보며,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배를 까뒤집으며 아양을 떤다.
사랑을 잃은 이가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려는 이 일을 한다.
다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이가 무엇에게나 사랑받으려는 일을 한다.
사랑의 부재가, 또는 사랑의 망각이 몰개성을 낳는 것이다.
사랑의 상실과 함께 자아는 태어난다, 나는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사랑의 품에서 떠난 순간에야 개인은 자기를 일종의 분리체로서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태도가 출현할 수 있다.
하나는 부모가 더는 자기를 예뻐해주고 안아주지 않는 것이, 즉 어떠한 관계로부터 분리된 것이 사랑의 상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다. 이 경우 관계와 사랑은 동일시된다.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랑을 얻는 방법이라고 착각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이 태도 속에서는 관계라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며, 관계를 더욱 많이 맺으면 사랑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관계는 유지되더라도 거기에서 분명 사랑이 상실된 것으로 실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직하다. 이러한 이는 정직성으로 말미암아 애초에 관계와 사랑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관계에 연연하지 않으며, 다만 순수하게 사랑을 기다리는 태도를 발달시킨다.
전자는 몰개성으로 흐려지는 태도이며, 후자는 개성이 진해지는 태도다.
색이 분명하고 진한 경계로 있어야, 색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색으로 있게 된다.
색에 대한 경계를 잃으니, 색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서 끌어모은 각종 기괴한 색들의 파티 속에, 자연스러운 자기의 색을 잃게 된다.
자기의 색을 잃은 자아는 형형색색의 관계에 자기의 목숨이 달려 있다. 그러니 실은 그러한 자아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드는 것은 관계다.
자기의 색을 가진 자아는 결단을 통해 선택되고 집중된 하나의 것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인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자아가 그러한 소재를 통해 어떤 것을 보고 있으며 또 지키려 하는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존재다.
정직한 자아는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있던 것이다.
존재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런 것을 '실존적 자아'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영웅적 자아'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아다.
자아가 자기 자신을 아무 대가없이 버린다고 하는, 자아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그 현실을 열어젖히려는 자아다.
곧, 자아를 초월하려는 자아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그 색이 진한 자아다.
그리고 하늘은 이처럼 하늘을 지키겠다며 목숨을 걸고 있는 개미를 대견히 여긴다.
그래서 그 개미를 반드시 쓰러지게 한다.
이제 땅에 누워 편히 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말한다.
네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지키고 있으니 아무 걱정말라고.
이 존재의 말을 듣는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다.
오직 순수하게 사랑만을 소망하던 이가 사랑을 만나게 된 순간이다.
모래사장의 그림은 허물어진다.
기쁨으로.
자아가 허물어지는 것은 자아의 가장 큰 기쁨이다.
사랑과 분리되어 태어난 자아는 이제 사랑 속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보다 더 행복한 자아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는 완벽하게 다 이루었고, 가장 원하던 것을 얻었다.
사랑의 상실과 함께 자아가 태어났듯이, 자아의 상실과 함께 사랑이 태어났으며, 그가 지금 그것이다.
사랑만을 기다리던 자아의 색이 진했듯이, 그 사랑도 한결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