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마음 #38

"세상이 끝난 자리에서 정말로 보는 희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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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면 아프고, 힘들고, 세상을 떠나고, 마치 세상의 끝과도 같은 분위기다.


내 주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경기라는 편한 설명으로는 전혀 납득되지 않는 어떤 위축되고 침체된 공기 속에 우리는 있다.


아마 우리는 우울한 중이겠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고, 즐거운 일들을 찾아 신나는 척을 해봐도, 실은 아무 의욕이 없다. 근본적으로 앞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뭔가 시원하게 열리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화만 참고 있다. 화를 내는 것도 그 화를 들어주는 것도 끝이 없는 반복으로 지치기에 서로가 울적하게 거리를 둔다. 개입되고 싶지 않다. 아무리 힘을 써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은 뻔하다.


왜 이렇게 간절히 전하는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소외하는지, 이제는 거의 울분이다.


그러나 여기에 들어야 할 말이란 있는가?


정답처럼 하는 말은 정작 스스로의 인생도 돕지 못하는 공허한 말.


실은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따돌림당한 자의 시위다.


전원이 전원을 따돌리고, 전원이 전원에 대해 시위한다.


바로 너 때문에 나는 구석에 몰려 모든 것을 잃고 죽는다고.


네가 죽인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겨울은 단지 겨울이라 시린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자신의 편이 없어 추운 것이다.


그 심정을 망각하려는 이들은, 이제 자신이 다른 이들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나선다. 불쌍하고 약하며 그럼에도 착해보이는 아이들을 찾아 과잉되게 자원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삭막한 세상에 조금은 괜찮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라고 위안하며, 그 가슴에 가득한 냉기를 잊어보고자 한다.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똘똘한 아이들은 일찌감치, 불쌍하고 약하며 그럼에도 착해보이게끔 자신을 연출함으로써 성공적인 생존술을 발달시켰다. 자원의 분배는 한층 더 불공정해지며, 울분은 이제 시퍼런 불꽃이다. 겨울이 한층 시렵다.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리고 자신도 죽을 것이다.


세상의 끝에 남은 우리의 소망이다.


여기에는 아주 거대한 사기에 대한 어떤 구토감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반드시 '적'이 있어야 한다던 아주 오랜 최면.


악마가 없으면 못사는 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을 학대한다던 나쁜 부모, 나쁜 교사, 나쁜 상담자, 나쁜 카페주인 등을 악마처럼 만들어, 그에 저항하는 자유의 반항아처럼 자기를 규정하거나, 또는 악마에 반대되는 좋은 보호자처럼 자기를 규정해서 사는 것 외에는 사는 방법을 모르던 이들이었다.


적이 없으면 살지 못하던 이들.


반대되는 대극을 만들어 그 대극에 의존해 자기를 구성한 뒤 황금처럼 잘난 척하던 연금술의 시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또 그 후로, 반대되는 대극이라는 그 프레임 자체에 의존해 자기를 프레임 밖에 있는 객관적 통찰의 시선으로 구성한 뒤 자기가 제일 높은 권위자인 척하던 존재사기의 시대도 그렇게 이어졌다.


다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어서 그 사악한 적에 의존함으로써만 자기의 삶을 조직하고 영위할 수 있던 방식이었다.


이 거대한 사기의 방식 속에서는 자기 삶의 증진이라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악마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악마화는 필연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악마로 가득차야 할 운명에 떨어졌고,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악마가 될 치명적인 위기에 떨게 되었다. 자신만은 악마가 아니라며 자기를 좋은 존재로 증명하기 위해 더욱 필사적이었다. 그러니 약점을 보여선 안된다.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을 가진 반듯한 존재처럼 자신을 빈틈없이 전시해야 한다.


그래서 차라리 사람들은 서로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깊게 소통하지 않으면 방어할 에너지를 크게 가용하지 않아도 된다. 말이 길어져 약점이라도 잡혔다간 언제 악마사냥꾼들이 습격해올지 모른다. 최대한 서로간에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 사이에는 즐겁고 온전한 일만 있는 것처럼 상냥한 미소의 가면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가이 고의 『데빌맨』에서 묘사되는 종말론적 세계의 모습이다.


이것이 정말로 세상의 끝이었던 것이다.


모두는 이미 그 사실을 직감하기에, 더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닫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금의 상태로 연명하기만 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비루한 바람이 되어버렸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죽는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 도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인류는 더는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갈 수 없다. 적이 너무 많아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적이 없으면 어떻게 가야 할지, 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국이다.


내 자신만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 되는가? 그러면 그러한 내가 적이 되지 않을 것인가?


표면적으로 말만 안할 뿐, 자기 자신을 부드럽고 상냥한 호인처럼 연출하는 모두가 실은 그 마음에 적을 갖고 있다. 정치적 현실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린다. 신념 또는 이념이라는 것은 적을 상정해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이 없이 사는 현실이란 우리에게 정녕 불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우리가 유능한 것이 되고자 하는 동안에는 그럴 것이다.


유능함을 꿈꾸기에 적은 만들어진다. 적과 싸우는 동안 유능한 행위들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또 유능하지 않은 소재는 우리 대신 적에게 다 뒤집어 씌울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가장 큰 악으로 보는 것은 바로 무능력이다. 무능력한 것이 우리에게서 가장 적대되는 악마다. 아빠는 무능력해서 그렇게 가족에게 욕을 먹었고, 정치인도 무능력해서 심판된다. 무능력은 이 시대에 어쩌면 살인보다도 더 중한 죄다.


이 무능력의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다른 불쌍한 이를 돌보거나,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꾸미는 방식으로 방어해왔다. 그러다가 죽음이나 상실과 같이 우리가 불가피하게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 대신 다른 이를 무력한 자로 만들어 심판해오기도 했다.


우리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적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무력함의 희생양을 만드는 방식으로만 전진해온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닫힌 것이다.


정확하게는 마음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정말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의 생사와 흥망에 조금의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 위에서 보는 것이다. 실은 자신이 무엇도 책임질 수 없는 입장이라는 사실 아래서 보는 것이다. 즉, 근본적으로 우리가 삶의 문제를 통제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해 무력하다는 명징한 이해 속에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는 대부분의 봄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본다. 유능성을 통해 보고, 통제욕을 통해 보며, 책임감을 통해 본다.


이러할 때 우리는 자꾸만 스토리를 보려 한다. 스토리 속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고, 바로 그 단서들을 더 많이 수집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행위로서 스토리만을 중요하게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복잡한 스토리 속에 숨겨진 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는, 더욱 유능하게 통제하며 책임지는 이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따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꼬이고 엉킨 텍스트들 속의 어떤 것처럼 변질되어 버렸다. 그 복잡한 스토리의 텍스트들을 풀어내는 일이 마음을 볼 줄 아는 자신의 유능성을 증거하는 일인 것처럼, 또 그렇게 문제해결을 위해 보는 것이 진정하게 마음을 보는 일인 것처럼 지배적인 인식을 형성했다.


하지만 죽음은 어떤 경우에도 텍스트가 아니며, 스토리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은 죽음 속에서만 보일 수 있다. 죽은 자의 눈에만 제대로 보이는 것이 마음이다.


죽은 자라는 것은 행위하지 않는 자, 곧 무력한 자를 의미한다.


무력한 자는 애초 통제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다.


무력하니까 그는 다만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다는 유능성의 착각에서 벗어나, 다만 본다.


그러니 진심으로 본다.


붓다가 이렇게 보리수 아래에 앉아 마음을 보았다.


행위하지 않으니 모든 존재의 힘은 자연스레 봄에 집중되었고, 그 힘으로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붓다는 볼 수 있었다.


정말로 마음을 본다는 것은 가장 깊게 마음을 보는 것.


거기에는 반드시 마음의 의도, 바로 마음의 뜻이 있다.


'의미'라고 부른다.


이것을 볼 때 정말로 마음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마음이 열렸다고도 말할 것이다.


그 모든 마음의 뜻은 전부 다 나를 위한 뜻이며, 나를 향한 뜻이다.


그렇게 나라는 것도 그때야 발견된다.


나는 유능함으로 쌓아올린 탑이 아니다. 우리가 더욱더 무력할 때 비로소 나는 발견되는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는 세상의 끝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나의 눈을 통해 정말로 보는 일만이 삶에 대한 답을 준다.


실은 아무 것도 몰랐던 삶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죽은 자만이 삶을 관통하며, 무력한 자만이 미래를 연다.


무력한 자에게는 적이 없다. 악마도 그를 괴롭힐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미 최악으로 판정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력함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보면서 살아가는 삶은, 지금껏 인류에게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열어젖힐 가능성이다.


이미 끝나버린 세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 희망이다.


이것은 최후의 말인가?


우리는 꼭 다시 만나자.


그럼으로써 이것이 가장 최초의 시작의 말이었음을 그때 가서 다시 기억하자.


내가 무력한 것은 말을 듣고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보기 위함이다.


보고 있는 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가장 마지막에서도 지금 정말로 보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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