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지 않은 사랑"
한 손에는 "나는 병신이다."라는 꿈을 들고 있다.
다른 손에는 "나는 진정한 자신이다."라는 꿈을 들고 있다.
한 손이 늘 다른 손과 싸운다.
그 중에서 진정한 자신의 꿈을 들고 있는 손을 이기게 만들어주려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또 성장이나 진화라고도 부른다.
그렇게 시작부터 짜고 치는 승패가 조금 더 가시화되어 드러나면 이제는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다. 그러고 평생 산다.
나는 우리가 왜 언제나 양손이 자유롭지 않은지에 대해 쓰고 있다.
빈 손의 백수가 되는 일의 어려움이란 유일하게 이런 것이리라.
백수가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병신이 되고, 이내 진정한 자신이 되려 한다.
정확히는 꿈의 순서가 거꾸로다.
진정한 자신이 되는 꿈을 먼저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병신이 되는 꿈을 꾼다.
말하자면 꿈속의 꿈이다.
자신이 너무나 못났고, 보잘 것 없으며, 태어나선 안되었던 구제불능의 병신이라는 꿈은 언제나 먼저 꿈꾸어진 진정한 자신에 대한 꿈속에서만 생겨난다.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을 꿈꾸는 이에게만 자신이 병신이 되는 일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정말로 민폐인 이유다. 아니 다자이 오사무 자신부터가 그러했다.
이것은 자기가 가장 놀랍고 멋진 주인공이라는 나르시시즘의 꿈을 아주 은밀하게 그 배경에 깔아두고서는, 그 위에서 "내가 병신이오."라는 만성적 좌절이 어린 울상의 표정으로 주변을 다 힘들게 만들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러한 이는 구원을 호소하는 듯한 연기로 주변을 끌어들인 뒤, 자기를 도와주려던 주변을 전부 무력하게 만들고자 한다. 자신은 결코 구원받아서는 안되는 병신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토리텔링을 했다.
그래야만 종국에 가서 기적적으로 진정한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경험이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엔딩을 정해놓았다.
이처럼 이들은 자기의 회심(conversion) 스토리를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제한다.
사람들을 도구로 남용해서 누구도 구제할 길 없는 병신의 꿈을 이룬 뒤,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커다란 무력감 속에서 포기하게 만든 뒤, 이제 자기가 직접 스스로 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자신의 현실을 살게 된 것처럼 연출하곤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자원과 에너지는 지극히 심대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자기의 연극을 위해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는 다시 이 연극을 시작한다. 평생 이 연극만 되풀이하며 산다. 자기는 또 어느새 사람들의 눈에 병신으로 비치게 되었으며, 이제는 다시 그 병신에서 깨어나 온전한 현실을 되찾게 되었다는 지루한 레퍼토리다.
자각이 없다는 것은 꿈속에 있다는 뜻이다.
이들이 병신의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참된 현실을 찾았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 꿈속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꿈이다. 그 꿈속에서 병신의 꿈을 꾸었다가 깨서 다시 그 꿈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는 왼손의 '나쁜 꿈'에서 깨어났다고 말하며, 오른손의 '좋은 꿈'으로 옮겨간 것이다.
꿈의 환승인 셈이다.
깨달음은 꿈에서 깨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배경이 되어 있는 최초의 꿈에서 깨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꿈에서 동시에 깸으로써, 꿈이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꿈이 없으면 병신의 꿈도 없다.
누구도 병신이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있는 것은 그냥 나다.
그 손에 아무 것도 붙잡고 있지 않아, 평범하게 자유로운 나다.
자신에게서 펼쳐진 손만큼, 그와 똑같이 자신을 향해 거대하게 펼쳐진 손 위에서, 바로 그 사랑 속에서 다만 자유로운 나다.
인간의 평범한 현실이란 이런 것이다.
이미 사랑 속에 있는 것이 평범하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 자신이 사랑의 활짝 펼쳐진 손 위에 놓이게 된다.
사랑은 이처럼 사랑하는 것의 자유를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그와 우리를 동시에 자유롭게 만든다. 사랑은 바로 이 일을 한다.
사랑에게 함께 사랑받음으로써 함께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내가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얼마나 신비한가.
진정한 사랑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 꿈속에서 사랑으로부터 좌절된 꿈을 꾸며, 그 꿈의 감옥 속에 사람들도 같이 가두려 하는 일은, 곧 내가 사랑의 주체가 되려 하는 일은 또 어찌나 피곤한가.
백수는 그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피곤한 것은 다 없애면 된다.
꿈이 다 없게 된 그 자리에는 이제 대신 내가 다 있게 된다.
나를 다 있게 한 그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온전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백수의 생활실천론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떤 신화적 스토리텔링 같은 것을 만들어 또 그걸 연극으로 상연해 열심히 자신도 연기하고 사람들도 연기하게 강요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던 그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피곤한 것들을 다 안해버리면, 자신이 가장 바라던 것은 바로 얻어진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고,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는다.
이게 평범한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기적은 이미 처음부터 당연한 그 평범함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그러한 현실을 누려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신이 사랑받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당신의 부모가 그 당연한 것을 안주었다고 뭐라 하지 말고,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애인이, 당신의 배우자가 당연한 그것을 당신에게 해주지 않았다고 또 피곤해지지 말라.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사랑받아야 한다는 꿈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뿐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신이 사랑받는 일'을 그만 꿈꾸고, '당신이 사랑받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진짜 이해는 답지를 이제 그렇게 써보는 용기에서 온다.
당신이 사랑의 주체가 되어 당신이 사랑받아야 하는 일을 당신의 권리처럼 요구하지 말고, 그 꿈의 권리장전을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아보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당신이 꾸며낸 당신의 꿈속 등장인물로 보고 있던 그 눈의 긴장을 놓아 보라.
순식간이다.
당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었는지는 훅 밀려들어온다.
당연한 것이었다.
당신이 태어난 그대로, 있는 그대로 빈 손의 백수일 때, 당신은 가장 갖고 싶은 것을 이미 당연하게 다 갖고 있다.
당신이 더 많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곧 백수로 볼수록, 그것은 더욱 당신의 것으로 실감된다.
이 세상은 원래 다 백수들로만 가득 차있어서, 처음부터 사랑으로 가득 차있었다.
당신이 꿈꾸어낸 어떤 모습이 아닌 당신의 본래 그 모습으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정말로 맞다는 것을 이해할 때, 당신은 이제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당신이 사랑받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사는 백수가 된 것이다.
엄마한테도 말해보라.
"엄만 이런 날 사랑하면서."
혼나도 계속 말해보면 엄마 웃는다.
사실이라서다.
웃음은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이제 사실 위에 있다는 명백한 증거.
사랑이 훅 밀려들어와 저도 모르게 뿜어진 기쁨의 날숨이다.
백수가 웃으니, 사랑도 웃는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꿈이지 않은 사랑이다.
꿈은 왜 꾸는가?
꾸미기[꿈이기] 위해서다. 꾸미면[꿈이면] 사랑받을 줄 알고.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다.
그렇게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꾸밀[꿈일] 수 없고, 그런 당신이 사랑받는 일은 정말로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