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백수의 심리학 #4

"다독다독, 소복소복"

by 깨닫는마음씨




마음이라는 것과 아직 충분히 친하지 않을 때는 '마음엄마놀이'를 하게 된다.


이 놀이는 주요하게는 두 이야기에 기반해 펼쳐진다.


첫 번째의 이야기는 영웅신화다. 이것은 "내 감정은 소중해."와 같이, 어떤 가상적 집단의 강요에 대해 작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지켜내겠다고 하는 영웅이 되려는 소재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다 쓰는 일이다.


두 번째의 이야기는 모성신화다. 이것은 영웅신화에서 발전한 형태다. 자기의 마음을 소중한 아이처럼 지키려고 투쟁하던 영웅이, 실은 모든 마음이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자기를 억압하던 그 악마조차도 그렇게 가엾은 아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커다란 모성으로 감싸안을 아주 자비로운 여신 같은 것이 되기 위해 마음이라는 소재를 가져다 쓰는 일이다.


이 대표적인 두 신화에서 마음은 공통적으로 아이와 유사한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자기가 현재 아이이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도 아이 같은 것으로 보이고, 세상 전부도 다 아이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마음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 도처에 작고 약하며 안쓰러운 아이들이 그리도 많이 보인다면, 자기가 지금 누구보다 가장 그러한 아이다.


그래서 마음이 곧 나인 것이다.


나는 마음을 지켜보고, 알아주며, 돌봐주는 그 자리에 있는, 마음이 아닌 그 무슨 주시하는 자비의 시선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마음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과 아직 친하지 않을 때 계속 이 주시자로 있으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마치 '마음의 엄마' 같은 것이 되어 마음에 대한 모성을 펼치려고 한다.


그런 것을 참나라는 이름 등을 가진 신적인 그 무엇인 것처럼도 말하게 된다. 모성을 영성과 동일시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엄마를 가장 갈구하던 아이가 스스로에게 엄마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엄마가 되려 할 때 그 모습은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 모성'을 실현하려는 행보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자기가 꿈에 그리던 그 모습을 자기가 한번 해보고 싶다는데, 꼭 해봤으면 좋겠다.


문제는 이 의식(ritual)이 타자를 향해 집전될 때 일어난다.


아이 같은 자기가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이상적 모성을, 남들에게도 보편적 가치로 주장하며, 또 그러한 모성이 인류가 따라야 할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에 전도하려고 할 때 생겨나는 것은 바로 '따듯한 폭력'이다.


보통 심리적으로 미발달한 아이 같은 이가 어떤 종교체험이나 신비체험 등을 한 다음에 이러한 상태에 자주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소위 그런 류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꿈꾸던 것을 만나게 되는 경험의 내용을 갖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엄마를 꿈꾸던 이는 신적인 모성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그것이 된다. 이상적인 엄마를 필요로 하던 아이가, 자신을 이상적인 엄마로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그 이상적인 엄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상적일 수 있다. 그렇게 꿈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말해 "니네 엄마가 우리 엄마는 아니다."


그리고 더 핵심적으로, 내가 꾼 꿈이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내가 나만을 위해 꾼 꿈이다.


그런 엄마가 필요한 것은 나일 뿐 인류가 아니다. 내가 엄마에 목말랐을 뿐 그것은 인류의 목마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목이 마르지도 않은 이에게, 심지어 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에게도, 물을 끝없이 전하려는 '친절'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 자기 엄마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일일 뿐이다.


자기 엄마가 얼마나 자비로운 여신 같은 존재인지를 자랑하고 싶어 사람들을 도구로 남용하려는 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것은 '따듯한 폭력'이다.


표현이 그렇기에 쉬이 폭력이라고 생각되기에 어렵게 만드는 '은폐된 폭력'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느끼고 직관한다. 다만 그 언어적 형태와 실천적 태도가 너무나 따듯한 헌신과 배려로 가득한 모습으로 드러나있기에, 그것이 차마 폭력이라고 분명하게 언술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친절한 독재자'라는 표현도 써볼 수 있다.


가장 지배적인 독재자는 무식하게 탱크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독재의 초보자다.


자신이 가장 통제의 권위를 발휘하려고 하는 독재자는 햇살정책을 쓴다. 따듯한 온기로 그 대상자가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든다.


따듯하게 보이는 많은 종교인들 또 영성가들이 자신이 이러한 독재자인 줄 정말 모르고 독재자가 되어 있곤 한다.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이것이 독재라는 것을 쉬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언어의 착시효과 때문이다.


"아이들을 지켜라."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은 가장 고귀한 의도로 바뀌어 미화된다.


심지어 누군가 이것을 독재라고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은 '좋은 독재'로서 정당화된다.


아무튼 아이들을 지키기만 하면 진리와 합치된 그 어떤 행위인 것만 같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다.


더 정확한 형태로 독재의 언술을 다시 표현해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라."


이것은 분명히 조건적이다. 지켜져야 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만이다. 당연하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만을 위해 꿈꾸어 만들어낸 엄마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라면 바로 자기 아이만을 지키려 하는 일이 지당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엄마의 품에 '우리 아이들'로서 하얀천사처럼 순종적으로 복속되어 그 품에 안기지 않는 이들은 무엇이 되겠는가?


까마귀다.


자기 아이들을 잠정적으로 위협할 숲의 늑대이며, 사악한 세력이자, 자비로운 여신의 질서를 깨트리는 못된 괴물이다.


대개 백수들이 이러한 악마화 작업의 희생양이 되곤 한다.


실증적으로 엄마들이 쟤랑 놀지 말라고 말하던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뭔가 숲에 사는 허클베리 핀처럼 백수같은 애들이다.


엄마들의 백수에 대한 혐오는 기나긴 문화적 세습의 결과다.


조선이 얼마나 카스트제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하지 않는 백수를 싫어했는가. 백수는 사회적으로 공공연하게 규정된 인간말종이다.


그러니 자기 자식이 이러한 백수만은 되지 않게 하려고 떡을 써는 칼질로 협박해서라도 글공부를 시키던 그 마음은 오늘날의 뜨거운 교육열로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또한 우리 아이를 지키려는 '친절한 독재' 행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독재행위가 의미하는 바도 이제 아주 분명해진다.


백수를 희생시켜 우리 아이들을 번창하게 하자는 것이다.


고대의 인신공양이 이제는 다 문명화되어 사라졌다고 누가 그러던가? 르네 지라르는 아주 다른 말을 할 것이다.


문명은 희생양을 만들어서만 전진해나간다. 모든 신화는 다 타자를 희생시켜 자기가 영웅이 되고 또 신이 되는 얘기들이다.


백수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 신전이다.


모성의 신전은 한층 높은 곳에, 저 위대한 올림푸스 산의 꼭대기에 세워져 있다.


대체 얼마나 많은 희생양의 주검이 그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일까.


또 그 계곡 아래로는 얼마나 많은 백수들의 눈물이 흩뿌려졌던 것일까.


그래도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들이 행복할 수 있었다면, 그러면 저 서러운 강물에 띄울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신전의 광경에 한번 주목해보자.


여신은 이를 악물고 참아내고 있다.


어떻게든 화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게워올린 미소를 그 얼굴에 반죽하고는,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아이를 다독다독하고 있다.


늘 지치고 닳은 표정으로 다독다독만 하고 있다.


자기는 이상적 모성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하게 다 알아주고, 받아주며, 품어주어야 한다. 이상적 모성은 쉽게 화내지 않는다. 화가 나도 바로 알아차리며 자비심으로 전환한다. 응응, 그래, 니가 이렇게 약하고 슬퍼서 그랬구나. 다독다독, 또 다독다독.


이를 악물고는 다독다독.


다 함께 다독다독.


세상 끝까지 외쳐봐, 다독다독.


다독다독(多毒多毒), 독이 참으로 많이도 쌓여간다.


마음이 그 독으로 병들어간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엄마의 마음도, 아이의 마음도, 다독다독.


아이 같은 여자친구도 이상적 엄마처럼 참아내며 다독다독, 아이 같은 남편도 이상적 엄마처럼 참아내며 다독다독, 아이 같은 직장동료들도 이상적 엄마처럼 참아내며 다독다독, 아이 같은 고객들도 이상적 엄마처럼 참아내며 다독다독, 아이 같은 내담자들도 이상적 엄마처럼 참아내며 다독다독.


아이 같은 마음을 가장 이상적 엄마처럼 다독다독.


그러다가 독기가 가득차 쓰러질 것 같으면 자신보다 조금 더 신력이 높다고 하는 선배엄마를 찾아가 거기에서 또 다독다독.


마음을 아이로 보며 다독다독하는 이는 또 누군가의 아이가 되어 다독다독을 받고, 끝없는 내리다독의 역사만이 이어져간다. 세상 끝까지 유독한 대기로 가득찰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유독한 것, 그것은 부정직함이다.


왜 자신이 가장 아이인 이가 가장 엄마인 것처럼 굴고 있을까?


왜 아이로부터, 현재 자신의 실제적인 그 마음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려 하고 있을까?


왜 아이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일까?


실은 아이를 싫어하는 이가 아이를 지키려는 입장에 자주 서게 된다. 그러면 자신은 가장 아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자신의 마음을 싫어하는 이가 그 마음 밖에서 마음을 보며 수용하려고 한다.


'마음엄마놀이'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싫어하는 마음를 견디고, 버텨내며, 인내해서 놀아주는 놀이다.


좋아했다면 굳이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기쁘게 그것으로 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현재의 그 마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만 마음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처럼 단지 그가 얼마나 마음이라는 것과 친하지 않은가만을 알릴 뿐이다.


틸리히는 수용에 대해 아주 정확한 말을 했다.


수용은 싫어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그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수용이다.


수용은 언제나 자유의 실천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틸리히가 수용이라는 표현을 제안한 것은 사랑의 현대적인 대체어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자유가 있어야 사랑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엄마가 아이를 싫어할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다.


이상적 엄마는 자신이 아이를 싫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늘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거기에서는 사랑이 실종되고야 만다.


사랑이 없어서 그 대신 지배하려는 '친절한 독재'가 생겨나고 '따듯한 폭력'이 생겨난다.


그러다가 자신이 왠지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직감이 생겨나면, 백수 저 새끼가 다 까맣고 나쁜 놈이라고 마녀사냥을 시작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이상적 모성을 억지로 지켜내고자 하는 그 일만을 지속한다.


아이를 지킨다고?


허울좋은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아이 같은 이가 자신이 꿈꾸어낸 이상적 모성의 형상을 악착같이 지켜내고자만 하는 그 모든 일이었을 뿐이다.


엄마에게 지켜졌으면 좋았을 아이가, 자신이 만든 엄마인형을 지키려 하는 그 모습이다.


그게 여신이라고, 그게 제일 예쁜 자기 엄마라고.


눈으로 만든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따듯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다.


마음이 정말 많이 쓰이게 하는 다독다독유발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체로 백수들은 다독다독하지 않는다.


녹으면 안되니까.


눈으로 곱게 만든 것이.


그래서 이렇게만 말하곤 한다.


"참 곱다. 그 마음이 정말 곱구나."


마음은 그 자신을 비추는 거울.


마음이 아이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운 아이였을 뿐이다.


그 고운 아이를 알아본 지금 진정한 자신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100%의 자신일 뿐이다.


엄마 없이도 존재하고 있던 것.


존재할 수 있던 것.


바로 그런 것이 있었다.


순수한 것이 있었다.


까맣다고 말하고 싶다면 순수한 까만색으로 백수가 있었다.


모든 아이의 영혼 속에는 백수가 있으며, 아이가 그 씨앗을 움틔워 곱게 백수로 피어나는 일을 성숙이라고 부른다.


아이의 생물학적 성장을 돕는 것은 엄마지만, 아이의 존재론적 성숙을 돕는 것은 분명 백수다.


마음은 모성으로 자라지 않는다.


마음은 백수의 정직성으로만 성숙해진다.


마음과 친해야만 마음이 깊어지며, 마음은 오직 정직성으로만 친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백수는 마음과 제일 친한 이의 이름.


엄마의 눈길로 바라보며 다독다독(多毒多毒)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저 하얀 눈길을 소복소복(小福小福) 함께 걸어갈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마음의 행복을 쌓아간다.


이 길의 가장 끝까지도.


언제까지라도 함께.


그 동행이 늘 정겨울 것이다.


영원한 마음의 연인, 백수는 바로 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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