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발달"
"빛이 있으라."
태초에 음성이 있었다.
말함이 있었다.
깨달았을 때도 최초로 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 목소리가 나를 말하며 나를 알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동으로 존재하며, 그 직접적인 표현은 결국 음성이다.
우리는 다 목소리들이다.
성대로만이 아니라 어떤 신체부위를 떨어서라도 몸소리를 내는 음성의 존재들이다.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보았는가?
사람이 미친다. 실제로 음성의 차단은 고문의 한 방식이다.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는데 "잘 다녀왔니."라는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빠가 TV를 보는 소리도, 누나가 고정이벤트처럼 밥먹다가 갑자기 광란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순간 어느 낯선 별에 떨어진 외계인처럼 스스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목소리, 우리는 목소리로 얼마나 서로에게 빛이었는가.
우리가 어떤 것을 상실했다고 마침내 실감하게 될 때는 그것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다. 그럴 때야 우리는 그 목소리로 채워져있던 공간의 여백을 지각한다. 휑하다. 정말로 이제는 없다.
나는 혼자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기 전에 여기에서 잠시 멈추어본다.
대체 그 '나'라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발달심리학에 대해 한번 얘기해보자. 존재가 목소리로 존재한다면, 이것은 목소리의 발달심리학이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라면 목소리는 보다 실체적인 것이다. 잠깐 그 모습을 숨겼다가 "까꿍!"하고 나타나는 존재는 그 형상 그대로 지속될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리고 그 실체적 목소리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라고 하는 것은 성립된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권위는 외부의 목소리에 담보되며, 나는 흡사 신적인 목소리 같이 들려오는 그 외적 권위에 의해서만 '더 생존가능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경험될 것이다. 이것이 '실체'의 단계다.
조금 더 발달하면 개인은 이제 자신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어한다. 더는 외부의 권위, 외부의 말에 의해 자신이 좌우되지 않기 위해, 소위 자신의 말이라는 것을 발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경도된 나다. 즉, 자신이 자신을 언어로 말하는 만큼 '나'라고 하는 것이 당당하게 성립된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자신의 표현을 위해 이용될 소재들이며, 특히나 좋은 것들은 '더 멋진 나'를 구성하는 일에 쓰이도록 자신에게 소유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이것은 '주체'의 단계다.
다음으로 개인은 자신과 똑같이 더 큰 목소리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타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대로의 경쟁 속에서는 결코 승산이 없다는 것도 함께 눈치채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가 강해지는 만큼 상대도 똑같이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대치상황은 무척이나 긴장되고 피곤한 것이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러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지옥 속에서는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개인은 그 방법을 이해한다.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목소리를 동등하게 함께 알아주는 것이다. 당신들의 목소리를 이제 자신이 들으며 품어주겠다고 하는 '더 선량한 나'가 출현한다. 이것이 '자기'의 단계다.
그리고 그 다음의 단계는 현재까지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 깊이로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백수는 실은 이 4번째의 단계에 속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자체'의 단계라고 불린다.
이것은 '신적 목소리'도, '나의 목소리'도, '너의 목소리'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각각의 목소리들에 대응해 성립되는 그러한 실체, 주체, 자기로서의 '나'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무아(無我)다. 무아적 나다.
사실 이 단계에서는 발달작용이 끝난다. 이것은 발달을 넘어서 있는 단계이며, 그래서 엄밀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러면 이제 멈추어두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나는 혼자다."
실체도, 주체도, 자기도, 실은 전부 다 이 발화에 대한 자구책으로 만들어진 가상물들일 뿐이다.
떨구어진 고개를 어떻게든 다시 세워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자신이 만들어낸 목소리들이다. 갖은 몸부림들이다.
실체로 성립되는 '나'도, 주체로 성립되는 '나'도, 자기로 성립되는 '나'도 다, 사라진 목소리가 그리워서 자신이 대신 그 목소리를 흉내내고자 한 혼자들이다.
그러나 자체로 성립되는 '나'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좀처럼 혼자로 경험하지 않는다.
하나로 경험한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날,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연다.
"냐아."하며 문앞까지 마중나와 꼬리를 살포시 기대는 고양이의 형상.
창문가에서 고요히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다가 폴짝 뛰어와 반갑게 맞이해줄 그 형상은 이제 없다.
그러나 백수들의 가슴은 그 "냐아."의 음성으로 가득 차있다.
늘 그 목소리를 듣고 산다.
혼자인 적이 없으며, 그 자체로 늘 하나다.
백수들이 백수인 이유, 백수들이 그 내면에 공간으로 비워놓고 있던 것은 목소리의 자리.
외부에서 사라진 목소리들은 내면에서 이제 영원하다.
그러다가 이제 외부에 생겨난 공간으로 불현듯 말하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냐아."
나의 목소리다.
그 의미는 바로 문가로 돌격해온다.
"나야."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나는 늘 여기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나를 말하며 나를 알리는 목소리다. 어떤 분리된 것이 아닌 지금 그 자체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될 때 당신은 미치도록 눈물짓게 되고, 미치도록 웃음짓게 될 것이다.
목소리가 사라지면 사람이 미치며, 목소리가 영원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은 더욱 미친다.
이 세상의 진실에 더욱 닿게 된다.
나는 사랑의 목소리.
사랑하는 것들과 원래부터 하나로 존재하는 그 자체의 목소리.
빛이 있으라고 해서, 그렇게 스스로 빛나고 있다.
지구는 이 빛나는 사랑의 목소리들이 놓이라고 우주에 마련된 자리다.
발달을 넘어 자체발광하는 백수들의 행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