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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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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에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에는 너무 드높단다."


그녀들의 어머니가 그녀들 중의 한 자매에게 전하는 말이지만, 실은 그녀들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곧 인간에게 전하는 말이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일까?


혹자는, 그 자신으로 사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 그것은 바로 그 자신으로 사는 것을 억누르는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우리의 삶이 이토록 힘든 것이다. 늘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는 마치 아이가 커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 자신을 통제하려는, 우리 자신과의 투쟁이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싸우고 있기에 결코 승패가 날 수 없는, 그래서 계속될 수밖에 없는 소모전이다.


애초에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나날이 지쳐간다. 그리고 지쳐서 힘이 다 빠진 까닭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력한 아이처럼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아이로만 머물게 하려는 기획은 끝내 성공을 거두는 듯도 싶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의 입장에서, 밖에 나가는 일은 두렵고, 안에 머무는 일은 답답하다. 함께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필연적으로 외로움이 엄습한다. 이해받고 싶어진다. 그렇게 자신 안에 더욱더 이해받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눈빛만 마주쳐도 이해받는 것만 같던 유년이 어느덧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아이로만 머물게 하려는 기획은 끝내 좌절된다.


이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더 자라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러한 자신을 더 자라나게 한 자신 밖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담아내던 이야기가 우리를 키워냈고, 동시에 이야기를 담아내던 우리가 이야기를 키워냈다.


인간이 그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이 안팎의 이야기가 모두 나라는 사실로 산다는 것이다. 그 어떤 큰 댓가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각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바로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유한 나의 이야기에 대한, 유일한 판권의 보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선언이다.


어른의 핵심적인 특성으로 곧잘 묘사되는 것은 바로 책임이다. 그런데 이 책임이라는 것은 사회적 규칙이 요구하는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책임의 의미는 그저 단순하게, 바로 그것이 나의 이야기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책임은 다만 긍정, 또 긍정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바로 나다. 그래서 책임은 실제로는 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다.


때문에 어른의 핵심적인 특성은 다시 한 번 묘사될 필요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러한 자신임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 안에서 끝없이 펼쳐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더 많은 이해를 요청하는 그 무수한 이야기들을, 전부 다 자신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른은 무한하게 확장되는 자신의 면모를 만나가는 존재다. 끊임없이 새롭게 드러나는 자신을 알아가는 존재다. 이와 같이, 자신을 만나고, 또 자신을 아는 일을, 그 무엇보다 가장 실감나는 삶으로서 즐겁게 느끼는 존재다.


어디에서 그렇게 하는가?


그가 속한 지금의 바로 그 이야기에서 그렇게 한다. 그 이야기를 떠나 더 좋아 보이는 남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좋은 것으로 개방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금 살아 있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어른의 가슴에는, 지금은 없는 떠나간 것에 대한 소중함이 가득하다. 그렇게 가슴 안에 간직되는 소중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 또한 동일한 소중함으로 역설된다.


이처럼, 어른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이다. 산다는 것은 이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나눌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노래해야 한다. 결코 억누를 수 없이 차오르는 고결한 것이 있다. 결코 굽힐 수 없이 솟구치는 드높은 것이 있다. 그것은 노래다. 노래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다.


이야기를 약동하는 리듬으로 표현하는 것이 노래다. 곧, 이야기를 약동하는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노래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몸으로 노래된 이야기를, 우리는 바로 삶이라고 부른다. 곧, 삶은 노래다. 산다는 것은 노래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살아 있는 그 자신의 삶이 가장 좋은 것임을 알고, 그 가장 좋은 것을 노래하는 이, 그것이 다시 한 번 어른이다.


그렇다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살지 않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했던 우리는 언제나 노래하고 있지 않았던가?


인간이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어른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았던가?


바로 그렇게,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은 이미 아씨들(women)이지 않았던가?


어른이 되려면 마치 아이라는 작은 것을 잃고, 포기하며, 떠나와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이가 커지지 않도록 억지로 누르는 일을 다시 억지로 떼어내며, 가장 어렵게 돌고 돌아서, 우리는 끝내 이와 같이 우리가 이미 어른이었다는 사실에 도착한다. 그렇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그때 우리는 어른이 된다.


그래서 어른이 된 우리는, 어른이 아이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것이, 곧 아이가 사라진 이유는 어른 안에 담겼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다만 어른에 담기는 것이다.


아이라고 하는 그 작은 이야기는 어른 안에 담겼다.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다만 노래가 된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노래가 된다. 인간을 그 자신일 수 있게 하는 더 큰 노래가, 어른을 어른일 수 있게 하는 더 큰 노래가 된다. 아이로 말미암아 어른이, 어른으로 말미암아 아이가 이루어진다. 이야기가 나를, 내가 이야기를 낳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이는 어른의 이야기다."


그리고,


"어른은 아이의 이야기다."


때문에,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다."


어른이 되는 때는, 이처럼 나에게 담겨진 그 모든 이야기와, 그 모든 이야기가 담겨진 나를, 내가 사랑할 때다.


그러한 까닭에, 아씨들은 분리될 수 없다. 작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이야기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아씨들은 언제나 작은 아씨들이다. 이것은 고결하고 드높은 인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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