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 삶
이 영화의 주인공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마릴린 맨슨을 닮아 있다. 성자와 악마를 한 얼굴에 동시에 담아내고 있는 면모다.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가움과 살떨림을 동시에 느껴지게 하는 그 얼굴이라고.
결국 이 영화는, 마릴린 맨슨이 한창 전성기 때에 노래했던 그 모든 주제와 같이, 바로 살에 대한 이야기다.
살이라는 개념은, 마르셀이라든가 메를로퐁티와 같은 신체현상학자들을 통해 잘 정의된 개념이다. 물론 니체는 우리가 이 살의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안내한 선구자다. 마릴린 맨슨이 니체의 사상에 근거하여 앨범을 기획하고 노랫말을 지은 것은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는, 살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핵심은, 인간이 바로 이 살로 된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투명하게 부유하는 정신도 아니고, 그 정신을 한계지어 가두고 있는 단단한 껍데기도 아니다. 인간이 살의 존재라는 것은 곧 인간이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살로 사는 존재일 뿐이다. 이 말은, 살의 핵심적인 특성에 따라, 우리는 다만 느끼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 느낌이 전부다. 살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자 동시에 세계다. 이처럼 살은, 그동안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모든 것이 실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 자신은 살로 말미암아, 세계와 상호적으로 개방된 관계성 속에 놓인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 자신의 고통은 단지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고통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고통은 우리 자신과 관계없는 외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고통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더 정확하게는, 고통은 어떻게 고통으로 계속 유지되는가?
살이 소외되는 곳에 고통이 있다. 대단히 직관적인 이야기다. 우리가 부드러운 살을 무시하고 딱딱한 바늘로 계속 찔러대면, 고통의 발생 및 지속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살이 소외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우리가 분리된다는 것이다. 살의 상호관계성을 소외함으로써, 우리 자신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된다. 자기만의 다락방에 갇힌다. 소외된다. 분리는 소외다. 곧, 살이 소외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소외된다.
이 영화는 소년원에서 출소한 주인공이 한 마을에서 신부 행세를 하며 체험하게 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은 바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실제로,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의 가해자로 상정된 이는, 외출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집 안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한다. 피해자들의 공분에 의해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피해자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 그들 또한 감정이 경직된 채 마치 딱딱한 갑각류의 껍질 안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즉, 그들 또한 다락방에 갇혀 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곧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아프다. 소외야말로 정말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바로 그 이유인 까닭이다.
때문에 주인공이 신부로서 이 갑각류의 마을에서 하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 모두가 살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것, 그렇게 우리 모두가 다 연약한 존재며, 그러한 까닭에 우리 모두가 똑같이 다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것.
영화에서는 이러한 함의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 핵심적으로 묘사된다.
"우리가 실은 여기에 없어도 되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한번 물어봐라."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바로, 가장 중요한 걸 기억하기 위해서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우리 모두가 신의 대행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연약한 살을 가진 존재를 돌보는 이를 대행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의 은유에서,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되었다. 곧, 살이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알 수 있는 존재가, 친히 언젠가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그 살이 되어, 그처럼 인간에게 묶이고자 했다.
이것은 살에 대한 가장 큰 찬미이자, 동시에 살에 대한 가장 깊은 상냥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살의 삶이다.
신의 대행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살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연약해서 상처받기 쉬운 살에 대해, 한없이 친절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해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다른 이의 욕구에 한없이 친절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일 수만도 없고, 또한 다른 이의 것일 수만도 없는, 곧 우리 모두의 아픔에 한없이 친절하라는 것이다.
살은 우리에게 반드시 전한다. 아무리 우리가 그것을 억압하려 해도, 우리는 살이 있기에 전해지는 느낌을 결코 억압할 수 없다. 느낌만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억압되거나, 은폐되거나, 기만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살은 이렇게 전한다.
"당신처럼 저도 그것이 아팠습니다."
살은, 우리 모두가 이미 느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상호성에 대한 개념이다. 그래서 한쪽이 정직하게 개방되면, 다른쪽 역시도 자연스럽게 개방된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여기에는 죄인도 신부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구원하는 자도 구원받는 자도, 결코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 모든 임의적인 분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에는 다만 아파하는 살이 있었다. 아파하는 인간이 있었다. 아파서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그 아픔을 봉인해보려 했지만, 애초 부드러운 살의 존재인 까닭에 결코 그 봉인에 성공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아픔을, 언제나 정직하게 느끼고 있던 인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원적인 분리와 그것이 낳은 소외로 인해, 그동안 그 인간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자신이 고결한 성자와 같은 피해자고, 상대는 사악한 악마와 같은 가해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악마를 추방하여 다락방 안에 억지로 유폐시킴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 역시도 다락방에 함께 유폐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은폐되었다.
악마의 유폐는 곧 인간의 은폐였던 셈이다.
그래서 마릴린 맨슨은 악마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노래해왔다. 그리고 이 영화는 주인공이 어떠한 때 악마의 얼굴로 드러나는지를 묘사함으로써 그 노래의 화음에 가세한다.
악마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살이 모질게 대해질 때, 그때 악마는 만들어진다. 살에 대해 냉혹한 불친절함으로 말미암아 살떨림이 일어날 때, 그때 악마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모질게 대해진다는 것은, 아주 쉽게는 구타당한다는 것이다. 곧, 처벌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처벌하는 수단, 그것은 바로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여린 살을 끝없이 채찍으로 때리는 것과 같다. 살은 곧 유한성의 비유다. 때문에, 죄책감은 자신이 유한한 인간임을 처벌하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신적인 능력이 있지 않았던 것을, 그럼으로써 신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을 심판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한 이를 잃었다는 인간적인 아픔이, 자신이 사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신적인 죄책감으로 전환될 때, 지옥은 시작된다. 지옥은 소외된 곳이다. 그곳에는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신의 심판을 내리듯이, 자기처벌을 거듭한다 해도 그 살떨리는 지옥에서 구원되는 이는 없다.
그리고 이 지옥의 고통이 너무나 힘겨운 나머지, 우리는 최소한 이 죄책감의 지옥을 만든 지옥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만은 어떻게든 잊어보고자 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체험한 비극의 가해자처럼 보이는 다른 누군가를 지옥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말하게 된다.
"다 너 때문이야."
이러한 죄책감의 전가를 통해, 가해자처럼 보이는 그 누군가는 지옥의 주인 자리에 강제적으로 옹립된다. 곧, 지옥의 주인인 악마는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악마로 추대된 그 누군가 역시도, 자신이 사랑한 이를 잃은 아픔과, 그 상실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에 대해 한없이 냉혹해진다. 우리 자신이 느끼고 있는 아픔이 동시에 그의 아픔이기도 하다는 살의 느낌을 최대한 무시하려면, 우리는 살을 차갑게 동결시켜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렇게 냉동된 갑각류의 껍질 안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여전히 살떨림을 체험한다. 갑각류의 껍질은 인간인 우리 자신의 피부가 아닌 까닭이다. 그 껍질에서는 어느 살가운 체온도 전해질 수 없는 까닭이다.
추워서 살이 떨린다. 다락방의 추위는 떨림을 지속시킨다. 방 자체가 떨린다. 우리도 떨린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진동이 횡경막을 자극한다. 오고가는 호흡이 그 진동에 의해 음색을 갖출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악마도, 악마를 규탄하는 이도, 똑같이 울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악마는 그저 아파하는 인간의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아픔에 대해 누구보다 살가움이 필요했으나, 누구보다 살떨림의 현실을 얻게 된 이의 이름,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 여린 살이 가장 모질게 구타당한 이의 이름, 그것이 바로 악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고 알몸을 드러낸다. 자신이 신부만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렇게 죄인의 증거로서 그의 온몸에 새겨진 문신을 드러낸다.
여리고 부드러운 살을, 차갑고 딱딱한 바늘이 수없이 꿰뚫고 남긴 그 아픔의 상흔을 드러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억하게 된다.
악마의 증거라고 생각했던 그 문신이 실은 아픔의 증거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이 아무 잘못 없는 살이 이토록 아프게 가학적으로 처벌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중요한 바로 이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에 있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오직 부드러운 살로 산다. 부드러운 까닭에, 성자도 악마도 모두 다 될 수 있는 얼굴로 살아간다. 살가움도 살떨림도, 우리가 그 모든 얼굴로 살아가는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전한다.
거울을 보면, 이제 우리 앞에 그 인간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
그 얼굴이 아프지 않도록, 그 얼굴에 한없이 친절해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기억할 모든 것이다. 살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