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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하는 그대에게

"소크라테스와 돼지의 소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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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귀를 접고 그대의 정의만 외치고 있느라, 그 어떤 말도 실은 들리지 않을 그대이겠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들릴 것이다.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이 말만은 그대의 핵심인 까닭에 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여, 그대는 지금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난 것이다. 그대뿐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을 때, 가장 격하게 화를 낸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 말은, 그대의 화는 결코 정의의 법칙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대가 만약 그대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자꾸만 정의의 법칙에서 찾는다면, 그대는 끝없는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끝이 없다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답이 없게 되는 이유는, 바로 앞에 있는 답을 두고 자꾸만 다른 곳을 찾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처럼, 마치 그대 자신이 살면 안되는 잘못된 존재인 것처럼, 바로 그렇게 생존을 위협받는다고 느끼기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를테면, 하나의 사회에서 특정한 구조의 불평등성이 문제가 될 때, 그러한 구조가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이었음을 옹호하게 될 세력은, 아마도 그 구조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그 구조에 봉사해온 사람들이 될 것이다. 특히나 그러한 구조를 통해 성공적인 생존의 현실을 확보한 이들일수록, 그 구조가 실은 현실적인 정의였음을 역설하는 목소리는 보다 뜨거울 것이다.


그대여,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존의 담론이 정의의 담론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정의를 부르짖는 그 목소리가 강렬하면 할수록,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다. 그대는 두려워서 화가 난 것이다. 아주 많이 두려워서, 아주 많이 화가 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화를 그대의 안에서 소화하기에는 그대 자신도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에, 그대는 화의 배출이 필요했다. 때문에 정의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정의는 그대가 좀 더 안전하게 화를 배출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주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정의의 분노라고 하면, 조금은 그 분노의 주체에게 너그러워지며, 심지어는 지지를 보내기까지 한다. 다들 이 화의 문제가 힘겹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대가 화를 내는 만큼, 실제로 그대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자꾸만 뒤로 숨겨진다. 그대는 그 강렬한 화의 기운에 취해 "난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어. 어디 한번 다 덤벼봐!"라고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대 자신이 그대의 두려움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그 두려움은 누구도 돌볼 수 없는 차가운 유배지로 추방당해 소외된다. 영영 그대의 두려움은 따듯한 손길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대여?


그대는 점점 더 두려워진다. 그대의 두려움을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대 자신도 돌보려 하지 않기에, 실제로는 다만 두려워하고 있을 뿐인 그대는 그대 주변에 상냥한 그대의 편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대 혼자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렇게 혼자가 된 그대는 결국 악바리처럼 더욱 화만 내게 될 뿐이다.


그대여, 그대의 두려움을 한번 이해해보자.


그대는 두 가지의 차원에서 그대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첫 번째는, 그대의 생물학적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그대가 지금껏 생계를 유지해 온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받으면, 그대는 필연적으로 그대가 그 구조를 통해 성취해온 것들을 잃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는, 그대의 존재론적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그대가 지금껏 열심히 그대 자신을 투신해 온 그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받으면, 그대는 마치 그대가 잘못된 인생을 살아온 잘못된 존재라고 하는 말을 듣듯이, 그대의 삶이 전적으로 부정당하는 것만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 두 차원의 위협은 아주 미묘하게 결합됨으로써, 그대의 두려움을 더욱 증진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이러하다.


이를테면, 그대가 단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해서만 사는 일을 비루하게 느끼는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해보자. 그러한 그대는, 그대가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하고 있는 그 일을 더욱더 존재론적 차원에서 평가하고 싶어할 것이다.


곧, 그대는, 구조 속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든가, 구조 자체는 이렇게 활용하더라도 이 구조적 성공을 통해서 결국에는 불평등한 세상을 바꿀 사람이 될 것이라든가, 자신뿐이 아니라 더 많은 이가 이러한 구조의 편의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든가 등의 대의를 통해, 그 생존의 구조에 투신해 온 그대의 삶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처럼 이해되기를 꿈꿀 것이다.


그렇게 생물학적 생존을 다소간에 경시하고, 존재론적 생존에 무게를 기울이고 있는 그대일수록, 이 두려움은 더욱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곧 그대는 더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소외된 것은 언제나 그대의 뒤편에서 그 소외를 드러내기 위해 더 활발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대여, 모든 생존의 감수성은 생물학적 생존이 우선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자연의 법칙이다.


그대는 결국 밥그릇이 없어질 것이 두려운 것이며, 그처럼 실은 그대가 생물학적 생존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 앞에 그대는 화가 나는 것이다. 곧, 그대가 정말로 화나 있는 대상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노력과 그대 자신의 배경의 도움으로,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는 일찌감치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그 모든 고상한 가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대가 단지 생물학적 생존에 이토록 위협받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그대는 너무나도 화가 나는 것이다. 즉, 그만큼 그대는 그 모든 고상한 가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여전히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다.


결국 그대의 두려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그대가 현실에서 느끼는 실제적인 그대 자신의 몸과, 그대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대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간극은 곧 생물학적 생존과 존재론적 생존 사이의 그 간극이기도 하다.


그대여, 그 간극을 메우고 그대 자신을 일치시키는 길은, 정의와 생존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드시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는 생존에의 두려움을, 다만 존재론적 생존의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 정의의 이름으로 "나는 결코 잘못 살지 않았다."라며 그대의 존재론적 가치만을 항변하는 그대는, 문제의 답을 은폐함으로써 스스로 헤매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정의와 생존의 문제를, 소크라테스와 돼지의 문제로 극화시켜 치환해보자면, 실제로 그대는 배고픈 돼지로서의 두려움을 같이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 자신은 결코 돼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이기만 하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어떠한 인간도 돼지이기만 하지 않고, 또한 어떠한 인간도 소크라테스이기만 하지 않다. 그대만큼 다른 이도 소크라테스고, 그대만큼 다른 이도 돼지다.


생물학적 생존과 존재론적 생존의 간극이 낳는 것은 바로 자기분열이다. 그대는 분열되어 그대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소크라테스임을 주장하는 만큼, 다른 이는 그대의 눈에 돼지로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돼지의 말은 근본적으로 정의로울 수 없기 때문에 들을 필요가 없다고 그대는 귀를 접어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폭력이다.


그러나 그대여, 혹시 알고 있는가?


누구도 그대의 말에서 사실은 정의를 듣고 있지 않다. 표면적인 언어의 교류와 아무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대에게서 돼지의 목소리를 너무나 잘 듣는다. 사람들 자신과 똑같은 그 두려움의 목소리를 너무나 잘 듣는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서 그대만큼이나 아파본 사람들에게는 그대가 다만 아파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잘 들린다.


죽고 싶지 않아요,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그 목소리가.


그대여, 그러한 그대는 감히 누군가를 살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대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살고 싶어하는 돼지다. 그리고 그 사실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소크라테스도, 돼지도, 그 소망은 사실 같다.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들이 각자 존재론적 차원에서 살고 싶어했든, 생물학적 차원에서 살고 싶어했든, 살고 싶다는 그 소망만큼은 공통적이다.


그리고 사람은 분명하게 이 두 차원에서 동시에 살고 싶어하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돼지가 함께 사는 바로 그 터전이다.


그대도 사람이다. 그대도 이와 같다.


그대는 살아야 한다. 그대는 그 무엇으로도 살아야 한다.


그대가 살아야 한다는 이 사실에만 정직해보라.


그대 자신이 무엇보다 살고 싶어서, 정의의 이름까지 빌어와 이처럼 분노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만 정직해보라.


그 사실은, 그대의 목소리에 담긴 이러한 말들을 그대의 귀에 비로소 들리게 해준다.


"저를 욕하시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제가 잘못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듭니다. 저는 먹고 살지 못하는 일이 가장 겁납니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잃을까봐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 저를 이해해주세요. 저를 너무 두렵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대여, 두려움을 고백하며 살고 싶어하는 그대를 누구도 두렵게 하지 않는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 자신의 두려움의 편이 아닐 뿐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두려움의 편이 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서 두려움을 보며, 그렇게 두려워하는 다른 이들의 편이 되고자 해왔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의 두려움을 소외시켜 온 대표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대여, 아무리 두려워하는 다른 이들의 편이 된다고 해도,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변하여 분노하는 형상을 취한다 해도, 그대 자신의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가 소외시켜 놓은 그곳에 방치된 채 그대로 놓여 있다.


두려움은 언제나 소망의 다른 이름이다. 때문에 그것이 소망으로 고백될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고백은 먼저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대의 화는 바로 그대의 것이다. 정의의 것이 아니다.


그대의 두려움은 바로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정의로 구원해야 할 다른 이의 것이 아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하는 그대여, 그렇게 다만 두려워하는 그대여, 심히 두려워서 심하게 화가 난 그대여.


그 두려움은 정말로 누구의 것인가?


간절하게 살고 싶어하는 이는 정말로 누구인가?


소크라테스여도 돼지여도 좋으니, 다만 살고 싶어하는 이는 정말로 누구인가?


그렇게 그 무엇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살아도 되는 이는 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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