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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2019)

가치가 아닌, 의미의 순례자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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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에도 인간은 가치에 의해 모두가 다 죽을 때까지 몰아붙여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에 의해 그 가치의 전장을 돌파하여 삶을 이어왔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가치와 의미는 비슷한 듯 하면서 아주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점은, 가치는 추구되는 것이며,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었고, 그를 얼마만큼 내가 사랑했는지 채 고백도 하기 전에 그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한 그는 나에게 있어 의미다. 이처럼, 의미라는 것은 내가 맺는 고유한 관계성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소설 『어린 왕자』에서 서로 길들여지는 일에 대해 여우와 어린 왕자가 나누는 문답은 이 의미의 문제를 정확하게 함축한다. 그래서 의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가치는 이와 다르다. 가치는 사랑했던 이가 나를 떠나갔을 때, 그의 모습을 마치 모든 이의 진정한 연인인 것처럼 정립시킴으로써, 모두가 함께 그를 애도하고, 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그의 위대한 모습을 따라 살게끔, 일종의 윤리적 명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는 늘 자신이 보편적임을 주장한다. 곧, 자신의 진리성을 주장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연인을 모두가 만인의 연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당위가 생겨나는 까닭이다.


이를 아주 쉽게 묘사하자면, 의미란 "짜장면을 먹어서 행복하다."라고 하는 것이고, 가치란 "모두 다 함께 짜장면을 먹는 일을 위대한 역사적 사명으로 추구하자."라고 하는 것이다.


의미의 문제는 분명하게 현대에 들어와 더욱더 긴밀하게 요청되었는데, 전 시대의 말미에, 자신이 진리임을 주장하는 보편주의 및 집단주의적 가치의 폭거를, 인간은 차마 꿈에서도 잊지 못할 만큼 뼈아프게 체험했던 까닭이다. 그에 따라, 이제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의미에 대한 발견을 요청함으로써 현대의 문은 개방되었다.


어떠한 개념이 가치로 추구될 때,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니체는 잘 알고 있었다. 가치에는 늘 가치의 제정자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니체는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그 모든 가치가, 실은 그 가치를 제정한 세력의 대단히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꿰뚫어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술한 예에서도 암시되듯이, 가치란 결국 의미가 발견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그 의미의 대리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가치는 실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주관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한 채 가치는 보편성으로 위장되며, 뒤이어 이 보편성은 절대성의 영역으로 이행된다. 곧, 주관의 절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관의 절대화를 통해, 다만 내가 사랑했을 뿐인 이를 우주 최고의 위대한 이로 등극시키려는 기획을 품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처럼 그 위대한 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진리를 배신한 무뢰배가 되거나, 진리를 모르는 미숙아가 된다. 그렇게 자신은 마치 진리의 대변자와 같은 모습으로 행세하며, 자신의 연인을 진리로 영접하지 않는 무뢰배와 미숙아들이 이 세상에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곧 어둠이 사라지고 이 세상이 진정한 가치의 빛으로 가득 찰 때까지 계몽의 맹진을 계속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의 맹진은 언제나 끝없는 전쟁을 만들어낸다.


"우리 아빠가 우주 최고야."라는 가치를 다른 아이들에게 계몽하려는 아이는, 자신만큼이나 그들의 소중한 아빠를 갖고 있는 아이들과 늘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자기 아빠의 영광을 위해, 다른 아이들을 제물로 삼으려는 모습과도 같다. 이처럼 모든 전쟁은, 주관으로 절대화된 가치 앞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다.


영화에서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은 대사가 발화된다.


"이 전쟁은 모두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야."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가치의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빠의 영전에 공양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치의 제정자가 모두를 가치의 제물로 삼으려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가 사랑했던 이에 대한 사랑의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동시에, 가치의 제정자가 자신의 사랑을 그토록 열렬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 그 사랑이 자신에게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래서 가치의 제정자는 결국, 다시 한 번, 자기의 삶에서 그것이 의미였음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다.


자기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이가, 곧 자기가 사랑했던 이에 대해 고백을 못해본 이가, 이처럼 가치의 폭력을 만들어낸다. 자기가 연인에게 못했던 고백만큼, 세상 모두를 끌어들여 모두가 그 연인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성난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백은 오롯한 자신의 문제다. 고백으로 개방되는 의미는 결코 집단주의적 활동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애초 보편재가 아닌 까닭이다.


영화 내에서 병사들을 위로해주는 한 노래는,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하는 순례자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저는 가련한 순례자입니다(I'm just a poor wayfaring stranger)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여행하고 있어요(Traveling through this world of woe)

그러나 아픔도, 힘겨움도, 위험도 없는(Yet, there is no sickness, toil or danger)

그 밝은 세상으로 이제 저는 가려 합니다(In that bright land to which I go)


그래요, 저는 아버지를 보러 갈 거예요(I'm going there to see my Father)
지금은 없으나 제가 사랑했던 그 모든 이를 보러 갈 거예요(And all my loved ones who've gone on)

요단강 너머 갈 거예요(I'm just going over Jordan)

그렇게 저는 그저 집으로 갈 거예요(I'm just going over home)


인간은 이처럼 그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그 자리, 곧 그가 그일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고자 여행하는 존재다. 그렇게 그가 그일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의미다. 그를 그로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의미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의미의 순례자다. 그 자신을 위한 가장 온전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늘 홀로 여행하고 있는 순례자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정확하게 그러한 순례자의 모습을 대변한다.


때문에 이것은, 이 영화의 카메라가 주인공에게서 늘 떨어지지 않고, 가장 옆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그를 생생하게 비추고자 하는 그 이유다. 주인공이 그 어떤 예상못할 사건들을 체험해갈지라도, 카메라의 시선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며, 성실하게 그의 곁에서 그 여정을 함께한다.


그럼으로써, 관객들의 시선 또한 주인공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안내한다. 주인공이 걸어가는 순례의 여정을 관객들 또한 바로 옆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럼으로써 주인공과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예비한다.


바로 그렇게만이 의미는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만남 속에서만 발견된다.


하나의 만남을 통해, 그 만남에서 체험한 것을 가장 곁에 두고, 즉 자신의 가슴 속에 품고, 그것과 늘 함께 걸어가는 자에게만 의미는 개방된다.


의미는 그렇게 늘 옆에 있는 것이기에, 저 멀리에 도착해서만이 성취할 수 있도록 가정되는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직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미 있다는 사실의 발견만을 요청할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메신저로서 여행을 하며 체험하는 그 모든 만남을 통해 점차로 의미는 개방된다. 그가 정직한 발걸음을 내딛는만큼, 의미는 그가 발견할 수 있도록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다.


그럼으로써 결국 주인공은 알게 된다. 그 의미가 향하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해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궁극적으로 전해진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오롯이 그 자신을 향한 메신저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것은 정말로 순례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순례자는 신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곧, 지금 없는 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자신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위대한 가치를 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해진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언제나 이와 같다.


"모든 것이 다 의미없는 쇳덩어리와 같은 가운데, 너만이 나에게 의미있었다."


의미는 이와 같이 자신이 가장 가까이에서 만났던 것에 대한, 그 친밀한 만남 속에서 분명 사랑했던 것에 대한, 이 정직한 고백을 통해 발견된다. 의미의 어조는 늘 고백적이다.


이 사랑한다는 고백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의미는 가치로 변질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의 은폐는 언제나 폭력이 된다. 곧, 우리가 폭력적인 전쟁을 낳는 이유는, 아름다운 이상적 가치들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에 대해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사랑임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백이 두려워서 우리는 연인 앞에 집단으로 몰려간다. 그럼으로써 고백할 기회를 스스로 잃는다.


집단은 고백할 수 없다. 보편성은 고백할 수 없다. 진리는 고백할 수 없다.


의미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순례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 곧, 그 어떤 가치도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때문에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떠난 자리를 그 어떤 가치로도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것의 유일한 의미를 받아들이며 그 앞에 홀로 서 있는 정직한 순례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그 고백이, 바로 메시지다. 때문에 고백하는 이가 곧 메신저다. 그리고 모든 고백의 메시지는 메신저 그 자신을 향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의미 앞에 선 순례자는 그 의미와 하나가 된다. 아니, 이미 그 의미와 자신이 하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고백은 이처럼, 이미 답신을 받은 뒤의 고백인 것이다. 그는 이미, 그가 그로서 있을 수 있는 그 자리, 곧 그가 그 자신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성공적인 고백의 메신저는, 진리라는 당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며 가치를 전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가 사랑했던 것의 의미는 향기처럼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 향기를 따라, 사람들 또한 그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기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은, 자신들이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던, 전장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반드시 만남의 꽃을 피워가던 그들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한계 속에서 아름답게 피는 꽃, 곧 자신의 삶, 이것만이 의미의 전부다.


의미는 그래서, 우리가 위대한 가치의 추구로 말미암아 누군가를 구원하는 신처럼 굴 때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개방된다.


그럼으로써, 그 유한함 속에서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 그렇게 바로 유한했던 까닭에 우리가 만나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며, 그것이 의미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가치가 인간을 죽이려 할 때에도, 이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삶을 이어왔다. 의미가 인간을 살린다. 때문에 인간은 늘 이처럼 자신을 살리는 의미를 향해서만 여행한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의 순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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