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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심리학을 하는 그대에게

"얕보지 마라"

by 깨닫는마음씨



심리학 분야에서의 그 어떤 석박사 이상의 학위도,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동의될 수 있는 그 어떤 전문성도, 하다못해 그대의 부모로부터 "우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알에서 깨어난 심리학 신동이에요!"라고 증언되는 그 어떤 신화도 갖지 못했으면서, 사람들 위에 서서 심리학 교사처럼, 이런저런 책을 팔고, 강의를 하며, 심리치료 활동을 하는 바로 그대에 대한 이야기다.


그대는 물론 자신이 하는 것이 심리학이 아니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내는 책과, 그대가 주최하는 강의와, 그대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홍보문구에는, 왜 그리도 심리학이라는 말이 많이 보이는지, 그대는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아가, 그대가 대체 어떠한 공적 권위로 심리학 교사 행세를 하고 있는지, 그 권위의 근거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대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가 사회적으로 동의되는 공적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에 준할 만큼 사이비심리학의 이론을 학습하고 그 실제를 훈련하는 성실한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누군가는 세상에 나가 과제로 밤을 새고, 시험에서 두들겨맞으며, 또 논문을 쓰고 임상훈련을 하는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며 눈물흘릴 때, 그대는 방구석에서 나무위키를 찾아보고, 그대 머리 속에서 그려낸 소설 같은 장면을 떠올리며, 또 그대가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만을 마루타로 삼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해왔다.


좋다. 그대의 노력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대가 이러한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무엇보다 가장 탁월한 심리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채 신나서 더 나아간다.


"제도권 내의 심리학이 꿈도 꾸지 못하던 가장 뛰어난 효과를 내는 심리학을 심리학자들보다 더 제대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대여.


얄보지 마라.


그대는 지금 얕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렇게 심리학의 권위를 얕보고 있기에, 그대의 권위 또한 늘 얕보인다. 제도권의 심리학이 그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먼저 제도권의 심리학을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그대가 대단한 것을 하고 있는 척 하더라도, 늘 허접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그 이유다. 그대가 사이비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이유다.


그대가 얕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얕보는 핵심적인 것은 바로 권위다. 그대는 지금 권위를 얕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권위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대는 더욱더 열정적으로 사이비의 활동에 매진한다. 그러한 만큼, 그대 자신 또한 점점 더 우스꽝스러운 존재가 되어 간다. 곧, 광대가 되어 간다.


그대여, 그대의 오랜 소망은 바로 이 광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대는 광대가 되기 위해 실은 그 모든 사이비 활동들을 해온 것이었다.


광대는 그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에 근거한 풍자와 냉소를 통해, 왕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바로 그렇게, 그대는 부정한 왕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대 자신이 신성한 광대가 되려는 소망을 품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 자신을 사이비라고 경험하기보다는, 오히려 혁명가처럼 경험할 것이다. 잘못된 제도권의 심리학으로부터 민중을 해방하여 올바른 구원의 길로 이끌어주는 독립투사처럼, 그대 자신을 자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대가 그렇게 맹렬한 용사처럼 저항하며 싸우고자 했던 그 왕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


그것은 정말로 제도권의 심리학인가? 제도권의 심리학이 그대에게 그토록 부정적인 폭거를 가한 적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가 보는 왕의 얼굴, 그것은 고작해야 그대의 부모다.


그대의 부모가 그대에게 그토록 권위적이었던 것뿐이다.


그대가 그대의 부모를 그토록 부정적인 폭거를 일삼는 독재자로 경험했던 것뿐이다.


그러한 부모에게 늘 그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그 말은 이러하다.


"얕보지 마라!"


현재의 그대가 핵심적으로 듣게 되는 바로 그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을 얕보고 있는 지금 그대의 모습이, 그대가 과거에 비난했던 그대의 부모와 똑같은 모습의 바로 그 독재자다. 아무 잘못도 없는 이를 함부로 대하고, 무례하게 취급하며, 흙발로 짓밟는 폭거를 가하는 폭력배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그대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학자는 사랑하는 이다. 심리학자는 심리학을 사랑하는 이다. 바로 이처럼, 심리학자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하는 심리학이라고 하는 소중한 연인을, 사이비인 그대는 너무나도 몰상식한 폭력으로 대한다. 마치 쉽게 돈으로 살 수 있는 창부인 것처럼 묘사한다. 때문에,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이가 다른 이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가만히 참고 있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대 말고는.


그대만 가만히 참고 있었다.


그때 그대는 참고 있었다. 가장 사랑스러운 그대 자신이 그대의 부모로부터 가장 부당한 폭력을 당했을 때, 그대는 가만히 참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그대는 꿈꾸었을 것이다. 어벤져스처럼 쫄쫄이 타이츠를 입은 정의의 광대들이 날아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괴롭히지 말라며, 이 소중한 아이를 얕보지 말라며, 부당한 독재자인 그대의 부모를 혼내주고, 그 독재의 세상을 무너뜨려주는 그러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가해지는 폭력 속에서 누구도 그대를 구하러 오지 않았고, 결국 그대는 그대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대의 눈빛은, 그대가 품게 된 이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주의적 믿음만큼이나, 탁하고 흐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대의 머리는 마치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래,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내가 사랑이 되자! 이 세상에 구원자가 없다면, 내가 구원자가 되자!"


그렇게 그대는 스스로 광대가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부모에게 뺨을 맞고, 세상의 모든 왕들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그 끝없는 동문서답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대여, 이처럼 그대의 사이비로서의 인생에는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동문서답일 뿐이다. 그대가 이미 갖고 있는 답을 엉뚱한 데에 적용하고 있는 것일뿐이다.


심리학은 그대를 얕잡아 본 그대의 부모가 아니다.


그대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그 권위를 붕괴시켜야 할 대상은 심리학이 결코 아니다, 그대여.


언제까지 그대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다른 이의 소중한 연인에게 침을 뱉고 다닐 셈인가?


그대는 결국 그대의 부모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어릴 때 그대의 부모가 부당한 권위를 행사했으니, 그대가 광대와 같은 모습으로 그 권위를 조소하고 무시함으로써 부모의 옥좌를 붕괴시킨 뒤, 이제는 그대 자신이 부모와 다른 진정한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또 다른 왕의 옥좌에 앉기를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여, 그리고 그대의 부모도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 왔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대와 그대의 부모는 조금도 차별화되지 않는다. 그대나 그대의 부모나, 똑같은 광대고, 똑같은 독재자다. 그대는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열심히 달려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결국 그대의 부모가 서 있던 동일한 그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가장 철저하게 얕보는 바로 그 폭력의 자리에.


그렇게 그대는 여전히 그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대는 아직도 가장 사랑스러운 것이 가장 얕보였던 그 비극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그대에게 무수히 쏟아지는 그 말에 귀기울여보라.


"얕보지 마라!"

"얕보지 마라!"

"얕보지 마라!"


이 말이, 얼마나 그대가 하고 싶었던 말인지를 기억해보라. 대체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를 기억해보라. 정말로 얕보았던 것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보라.


그대여, 이제 그만 얕보라. 그리고 이제 그만 얕보이게 하라.


그대 자신이, 그대 자신을.


그렇게, 그대 자신이, 그대 자신을 사이비로 만드는 일을 멈추어라.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의 실상은, 그저 폭력을 당한 이가 하는 자기학대일 뿐이다. 아픔에 아픔을 얹는 일일 뿐이며, 그렇게 그대는 아픔의 구원자가 아니라, 아픔의 보급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광대가 착각하고 있던 그 역할이다.


이 세상에 소외된 아픔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 그것이 본래적인 광대의 사명이다. 광대가 그 사명을 잊고 왕이 되기를 꿈꿀 때, 그럼으로써 오히려 아픔을 보급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사이비가 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대의 아픔이 얼마나 소외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얕보며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여, 그대가 그대 자신의 아픔을 가장 무시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그대의 아픔이 다른 좋은 것을 보상받는 그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대가 아팠던 만큼, 그 보상으로서 사람들이 그대를 위대한 왕처럼 대접해주는 현실을 꿈꾼다. 이처럼 결국 그대가 자신의 아픔을 무시함으로써 실제로 하게 되는 일은, 군대에서 후임병들을 쉴새없이 갈구는 권위적인 병장놀이와 같다.


아픔을 아픔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보상의 도구로 보는 것이 바로 아픔을 얕보고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도구화는 그것을 얕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보상의 도구로 보는 그대는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도 아픔을 종용하게 된다. 자신만 아프기에는 억울한 까닭이다. 다른 이들도 그대만큼은 아파봐야, 비로소 좋은 것을 얻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대가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아픔은 그저 아픔일 뿐이다. 아픔은 다만 그것이 아프다는 사실로서 존중받아야 할 뿐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그대가 그 아픔을 존중할 때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 모두는 아파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픔은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때문에 그대가 그대 자신의 아픔을 무시할 때, 다른 이의 사랑을 무시하게 되는 일은 필연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대여, 그대만큼이나 이미 그 자신의 삶에서 아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을 고작해야 보상의 도구로 얕보며 그 보상물로서의 왕의 자리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아픔을 정직하게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라.


여전히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그 얼굴을 한번 보라.


그대는 정말로 그들을 얕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정말로 아픔을 얕볼 수 있겠는가?


그대는 정말로 사랑을 얕볼 수 있겠는가?


동문서답만 하던 그대여, 이제 그대가 정말로 대답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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