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있는 것"
니체는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기획이었다.
니체에게 우상이 그토록 위협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느껴진 탓일까?
조금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니체는 우상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우상, 그것은 바로 허상이다. 없는 것이다.
존재는 힘이다. 곧,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다. 때문에 없는 것에는 그 자체의 힘도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서 좋은 것이란 없다."
이러한 니체의 입장에서,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여기에 역행한다. 없는 것이 좋은 것이 된 것이다. 때문에 니체는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드러냄으로써, 없는 것의 힘 없음을 정확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우상은 애초 허상으로서 그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다. 현실에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동화책 속의 마법사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우상적 존재들은 일견 뛰어난 힘을 보유하고 또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된 영문일까?
그 답은 너무나 단순하다.
우상을 꿈꾸는 이들이, 그 우상에게 자기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우상의 힘은 전부 다 그것을 우상으로 보는 일에 동의한 이들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도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원래 그 우상이 갖고 있던 우월한 그 무엇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이 자기의 힘을 주는 일에 동의한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우상에게 계속 자기의 힘을 양도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착각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대상화의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상화는 바로 이 대상화다. 그리고 대상화는 언제나 자기대상화다. 이를 아주 쉽게 말하면, 우리가 우상에게서 보는 것은 언제나 자기 모습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그 자기 모습은 자신이 소외시키고 있는 까닭에, 마치 자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모습이다. 이처럼 결국 우상화는 자기대상화로 일어나는 자기소외의 문제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우월한 특성을 알아본다는 것은, 자신 역시도 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자신은 감히 그러한 특성을 가질 만한 괜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부정할 때, 그 특성은 다른 이의 모습에서만 눈에 띄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소외는 발생한다.
모든 소외는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움직임을 갖는다. 이것은 모든 유기체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때문에, 자신의 특성을 소외시킨 이는 그 특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 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에게 자동적으로 끌리게 된다. 이것이 자기소외 속에 놓여 있는 이가 우상에게 끌리게 되는 그 이유다.
그러나 소외의 가장 지독한 지점은, 그것이 소외라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정말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소외시킨 이는, 우상에게 끌리는 이유가 자신의 소외된 특성을 회복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보다는, 그 우상이 고유하게 우월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 특성을 더욱 강화시켜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더욱더 우상에게 투입하게 된다.
그 결과, 우상은 더욱 우월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점점 더 발전해가는 우상과 자신과의 거리감은 더욱 커지며, 그로 인한 자괴감으로 인해 자기소외는 더욱 심화된다. 그리고 그렇게 심화된 자기소외는 결국 다시 우상에 힘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되먹임된다.
이것이 우상화 현상의 핵심이다. 자기소외가 낳은 자기대상화의 행위가 우상에게 힘을 제공하고, 그렇게 받은 힘으로 인해 우상은 점점 더 실체화되어, 마치 원래부터 그러한 존재였던 것처럼, 즉 없는 것임에도 있는 것인 양, 그 허구적 지위를 굳건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자신이 힘을 제공함으로써 우상이 담보하게 되는 월등한 지위로 말미암아, 그 힘의 제공자인 자신을 우상이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곧 우상화의 대표적인 일면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우상화의 또 다른 일면은, 힘의 제공자가 역으로 우상을 구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상화 현상은 중독과 같은 끈끈한 점성을 갖는다. 분명하게, 우상화 현상은 중독 현상이다. 그것은 이러하다.
자기소외는 우월한 특성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은 더욱 빨리 소외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자신의 열등한 특성을 소외시킨 이는, 그 특성을 우월한 특성만큼이나 매우 잘 우상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필연이다. 왜냐하면, 우상으로 등극하게 되는 그 후보군의 인물들 역시도, 그들에게 힘을 제공해서 그들을 우상으로 만드는 이만큼이나 스스로를 힘없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세상 앞에서 대체적으로 다 열등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그래도 하나 정도는 우월한 어떤 것을 갖고 있는 것 같기에, 그 하나의 우월성을 세상이 인정해주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인정받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모습이, 이 우상의 후보군들의 대표적인 면모다.
"이거 아무도 모르는 건데, 나만은 알고 있는 거야. 난 이렇게 세상에 숨겨진 보물도 다 찾아낼 수 있어. 난 좀 천재인 듯."
이것은 우상의 후보군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빈번하게 들려오는 대사다. 이처럼 자신의 독보적인 우월성을 강렬하게 주장하고 싶어하는 만큼,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느끼는 전반적인 열등감의 크기는 거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대사에는 하나의 소망이 담겨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등하지만, 사실은 숨겨진 보물과 같은 자신을 누군가가 찾아달라고 하는 그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렇게 "나를 찾아줘."라고 하고 있는 이 모습은 바로, 이 후보군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하는 이들 또한 갖고 있는 정확한 그 모습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우상의 후보군들의 조력자들은, 자신이 그 우상을 더러운 흙 속에서 구원해내어 보물의 광채를 회복시켜주는 위대한 발견자로서 행위하려고 하게 된다. 물론 이는, 우상이 아니라 바로 열등한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동기를 갖고 있지만, 그 동기는 자기소외에 가리워져 쉽사리 자각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각되지 않은 척 하는 기만 속에 숨겨진다.
요는, 이러한 구조로 말미암아, 자신의 열등감을 소외시킨 이는 그 열등감을 우상적 대상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상이 가진 그 열등한 모습을 잘 보살피고 돌봄으로써, 즉 거기에 힘을 적극 투입함으로써, 그 열등한 모습을 보물처럼 전환시켜주고자 하는 구원의 기획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안타깝게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나 자신만은 그 우상의 보물같은 진가를 알아본 이로서, 즉 우상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정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중독 현상인 것이다. 제랄드 메이는, 모든 중독 현상은 신적인 자신을 꿈꾸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상의 열등한 모습에 힘을 투입해 그 우상의 열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모습은, 곧 그렇게 우월한 우상조차도 구원할 수 있는 신적인 자신을 꿈꾸는 모습이다.
이처럼 열등한 우상을 구원함으로써 스스로를 신적인 구원자로서 위치시키려는 이들은, 산으로, 들로, 교회로, 절로, 다양한 공동체로, 종횡무진 유람을 다닌다. 소위, '진정한 스승찾기' 여행을 나선다. 그리고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우상의 후보군으로 보이는 인재를 발견하면, 그들은 그 앞에서 삼배를 올리며 그를 스승으로 모시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포켓몬스터 게임을 현실에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남들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보물같이 귀한 희소 포켓몬을 잡기 위해, 산으로, 들로, 교회로, 절로, 다양한 공동체로, 종횡무진 유람을 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의 재현이기도 하며, 현실에서의 프린세스 메이커의 구현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이것은 게임의 감수성을 담고 있다.
이처럼 분명하게, 우상화는 게임이다.
자신이 하찮다고 느끼는 이들이 모여서, 그중의 한 명을 신으로 만들며 대리만족하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곧, 갓 메이커(God maker)의 게임이다.
그래서 이것은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덤을 정확히 닮아 있다. 아이돌(idol)의 의미가 우상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아이돌을 추종하는 이들은 사실 아이돌을 육성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응원하는 하나의 아이돌에게 물리적/심리적 자원을 투입함으로써 그 아이돌을 보다 탁월하게 만들어주며, 자신이 힘을 투입하고 있는 아이돌을 다른 아이돌과 경쟁시키거나, 또 다른 아이돌을 지지하는 적진에 찾아가 싸움을 걸기도 하는 등, 아이돌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들은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대단히 심각한 태도를 요한다는 점에서, 즉 이 세상에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바로 그것에 목숨을 건다는 점에서, 하나의 뜨거운 연애활동이자 또한 하나의 광신적 종교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게임을 아무리 열심히 즐기고 있다고 해서 자기소외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강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회복하는 일,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아팠던 취약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회복하는 일, 이 자기소외로부터 회복하는 일을, 우리는 바로 '내가 되는 일'이라고 부른다. 자기소외라는 말에서 소외가 사라되면 자기[나]가 오롯하게 남는 것과 같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에서부터, 니체, 마르셀, 하이데거, 야스퍼스, 레비나스, 카뮈, 사르트르, 베르자예프, 틸리히, 빈스방거, 보스, 랭, 제임스, 메이, 부겐탈, 슈나이더, 콘, 두르젠, 스피넬리 등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실존적 경향성을 가진 이들에게서 동의되는 지점은, 실존은 곧 소외의 극복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소외의 극복은 정직성(authenticity)으로만 가능하다.
실존이 요청하는 것은 언제나 이 정직성일 뿐이다. 그러나 이 정직성이,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새벽의 횡단보도 앞에서 착하고 순결하게 파란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리는, 바로 그러한 형태의 정직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직성은 아주 단순하게,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정직성은 우리가 애초 우리 자신만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직성은 우리가 의지를 발휘해서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숙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이처럼 이미 일어나고 있던 정직한 시선 속에서 다시 이해한다면, 정말로 확연해진다.
자신을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우리가, 또 다른 보잘 것 없는 이에게 우리 자신의 힘을 줌으로써, 그를 우리 자신이 원하던 모습으로 만들고자 했던 일, 바로 그것이 우상화의 전부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인데, 스스로 잘 사는 이에 대해서는 우상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힘이 투입되는 일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이미 스스로 잘 사는 이에 대해서는 자기대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이는 우상화의 대상으로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극인은 이처럼 우상화의 기제에 포섭될 수 없는 인간의 면모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자신의 강점과 취약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그저 스스로에게 정직한 그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처럼 스스로 잘 사는 이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그 경계가 명확한 까닭에, 역설적으로 대단히 잘난 이로 보이게 된다. 그는 신적인 전능성을 꿈꾸지 않으며,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루하루 쌓아가는 까닭이다. 그렇게 그는 바로 그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누적시키게 되는 것이며, 곧 '나'라고 하는 것을 누적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그가 잘날 수밖에, 즉 '잘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다.
바로 이렇게 스스로 잘 사는 이는 끝내 스스로 잘난 이로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전술한 것처럼, 우리는 이와 같이 정말로 잘난 이들을 우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만큼이나 하찮고 못나서 실은 우리에게 만만해 보이는 이들만을 우상으로 삼는다. 자기대상화란 원래 그러한 것이다. 지금의 자기의 모습과 동일한 것만이 대상화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와 똑같은 수준에서 잘나고, 동시에 자기와 똑같은 수준에서 못난 이를, 임의적으로 자기보다 더 높은 우상처럼 삼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우월성은 더욱 키워주고, 그의 열등성은 정성껏 돌보는 식으로, 그가 우리를, 또 우리가 그를 상호적으로 구원해주는 현실을 꿈꾼다.
그러나 그 현실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둘 다 어느 쪽도 물을 발견하지 못한 똑같은 이들이 서로의 갈증을 채워주는 일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우상화의 현실은 스스로 파국을 맞는다. 여기에 물이 없다고 하는 가장 정직한 실존으로 인해, 모든 우상은 그렇게 스스로 무너져내린다.
우상은 이처럼 원래 하찮은 것이다.
우상을 옹립하려는 이도, 우상으로 행세하려는 이도, 똑같이 자기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는 이들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우상을 논박해서 파훼함으로써 자신이 대신 그 우상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이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상을 우상으로서 대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은 그 힘을, 우상 대신에 자기에게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하찮은 이다.
그래서 모든 우상의 문제는 결국 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가 힘이 없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가, 상대로부터 힘을 얻으려고 하는 방식으로, 또는 상대에게 힘을 줌으로써 자신이 그 힘의 수혜를 얻으려고 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통해 힘을 추구하는 이와 같은 일이 곧 우상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말한 것처럼, 있는 것이 힘이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정직하게 수용할 때, 그것은 정말로 있는 것으로서 힘이 된다.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든,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든 간에, 그것을 그저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힘이 된다.
이 말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수용하는 그 정직성을 통해 우리의 힘은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은 단지 무용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힘의 증진을 위한 실천적인 개념이다.
우상을 꿈꾸는 이가 자신의 열등감을 기만하며, 그 열등감을 우상화의 대상에게 돌려 그를 구원하려고 하거나, 또는 그에게 제공한 힘으로 자신의 구원을 바랄 때, 실존은 그저 단순하게 "나에게는 열등감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못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못난 존재로서의 열등감이 생겼다는 것을.
그 일을 억지로라도 해야만,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착각이 분명 이 열등감의 현실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렇게 착각하게 된 것은, 자신이 못하는 일을 누군가는 대단히 잘 하고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 이는 좋은 것들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가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 일에 대해서는 잘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떠한 영역에서 잘날 수 있는가, 즉 '잘 나'일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우상화의 기제를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유용한 자원들을 효과적으로 얻고 있는 것처럼 경험하고 있는 이일지라도, 우상화는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그가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잘 나'일 수 없게 된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자기가 못났다는, 곧 '못 나'라는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더 많은 대상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시도하지만, 이러한 열등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못 나'는 오직 '잘 나'를 통해서만 사라진다. 곧, 나로 사는 삶 속에서만 우리가 못난 존재라는 소외는 유일하게 극복된다.
내 자신에게 드러나 있는 그 전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있는 것을 정직하게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잘 나'로 사는 것이다. 곧, "힘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필요해."라고 하는 대상의 당위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잘 사는 것이다.
실존은 모두가 잘 사는 바로 이 현실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잘 사는 현실 속에, 모두가 '잘 나'인 현실 속에, 우상은 없다. 필요하지도 않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우상도 필요하다."라고 하는 우상의 유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단지 우상의 후보들과, 그 후보들을 지지하는 아이돌 팬덤뿐이다. 그러면 차라리 정당하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하찮게 생각되어, 사는 재미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게임도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적극 동의할 수 있다.
그것이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사실이 개방된다면, 이제 그 게임의 유용론을 주장하는 이들 또한 "이 게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다."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긴 시간 동안 열정적인 노력을 다해 전설의 포켓몬을 잡았다고 해서, 내 인생이 전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흔히,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을 한다. 힘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역으로 성립되는 말이다. 이렇게 묘사해볼 수 있다.
"책임으로 말미암아, 너는 힘있게 되리라."
책임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정말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서 실감하게 된다. 실존에서 이 책임성(responsibility)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책임은, 도덕적 의무에 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규칙을 잘 지키는 어린 양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책임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다. 있는 그대로 있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곧, 스스로의 주제파악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책임은 곧 타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나 근대가 남긴 유산인 자기대상화, 곧 대상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에 들어와 타자라는 개념은 중요하게 제안되었다. 타자란 곧 우리가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철저한 미지성에 대한 것이다. 때문에 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그 자체로 우상화를 해체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타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망상을 기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타자 역시도 이미 그 자체로 잘 살고 있는 '잘 나'인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서 타자는 그 어떤 우상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은유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사실이 절대적 타자라는 표현으로 명명된다는 것은 의미깊다. 하나님은 우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불교의 은유 속에서도, 붓다라는 존재의 사실 앞에, 그 전까지 하늘에 있던 모든 허구적 우상들이 내려와 엎드렸다. 붓다는 우리의 고통의 이유가 이 허구의 대상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존재한다는 사실, 곧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곧 실존한다는 것이, 곧 산다는 것이 가장 타자성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왜 사는지를 모른다. 마르셀은 이를 가리켜 "삶은 신비다."라고 말한다. "삶은 타자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우리의 책임성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이 삶의 타자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저런 게임들을 만들어, 그 게임들의 규칙을 통해 임의적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망상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상의 망상이다. 망상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은 그 자체로 망상이다.
망상은 언제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잘 나'일 수 있는 현실을 가로막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며, 곧 우리 자신의 힘을 잃게 된다.
"나는 아직 힘이 없는 존재니까, 나보다 힘이 있는 존재가 대신 나를 책임져주면 좋겠다."
이러한 착각에 근거한 자기기만이, 결국 우상에게 대신 책임질 것을 요구하며, 우상이 그러한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 결국 그 우상을 비난하고 원망하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상이, 그처럼 힘있어 보이는 우상으로 될 수 있게 만든 그 힘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미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의 힘을 실감할 수도 있었던, 바로 그러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못났다는 착각 속에서 우상에게 책임을 넘김으로써, 동시에 힘도 함께 준 것이다. 그러나 우상이 그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우리를 성공적으로 구원하지 못한 것은, 그 우상 역시도 우리 자신만큼이나 그 책임이 부담스러웠던 까닭이다.
우리가 책임성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그 책임성이 다른 대상을 구원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하는 또 다른 착각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현대의 타자담론들이 드러내듯이, 우리의 책임성은 우리가 다른 대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는 주제파악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다른 대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일련의 신화적 영웅담, 곧 더 넓은 범주로는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를 보고 자란 아이들뿐이며, 나아가 그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아이들 중 누군가는 왕자의 역할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공주의 역할을 하며, 현실 속에서 게임을 펼쳐낸다. 이것이 다시 한 번, 우상화의 실제다.
이러한 우상화 속에서는, 아무리 왕자가 공주에 대해, 또는 공주가 왕자에 대해, 극도로 헌신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행위하지만, 실제로 여기에서는 그 어떤 책임성도 작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게임 속에서는, 대상에 대한 추구만 있을 뿐, 정작 그 자신의 삶이 망각되는 까닭이다.
망각되는 것은 희생되는 것이다. "사랑은 희생이다."와 같은 표어는 또한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가, 곧 우상의 이야기가 자주 쓰곤 하는 선전문구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떤 삶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희생은 있는 것을 없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결국 사랑은 있는 것이 없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랑은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곧 책임성의 다른 이름이다. 책임성을 중시하는 실존이 왜 사랑의 철학인지에 대한 그 이유다.
이처럼, 사랑은 '있게 하는 힘'이다.
때문에, 사랑은 없는 것을 있게 하기까지 한다. 보잘 것 없는 이조차도 대단히 멋진 이인 것처럼 만든 그 힘, 즉 애초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우상으로 만든 그 힘은, 그렇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상의 추구 속에 갇혀 상대적인 크기로 추락한 사랑이다. 그래서 더는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게 된 사랑이다. 바로 이렇게 그 자신의 온전성을 잃고 추락한 사랑의 이름이 곧 희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사랑을 꿈꾼 이들이,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왕자와 공주라는 대상들의 이야기 속에 가둠으로써,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랑의 타자성을, 곧 사랑의 절대성을 잃게 되어, 그 결과 만들어진 우상 앞에 자신의 삶을 희생시키게 되는 현상이 바로 우상화의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한다는 것, 산다는 것, 정직하다는 것, 책임진다는 것, 힘있다는 것, '잘 나'라는 것은, 전부 다 이 사랑의 절대성의 회복을 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절대성의 실천적인 표현은 바로 무조건성이다. 그 표현은 이러하다.
"내가 아무리 우월해도 나였으면 좋겠고, 내가 아무리 열등해도 나였으면 좋겠다."
"네가 아무리 우월해도 너였으면 좋겠고, 네가 아무리 열등해도 너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러하다.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으리라. 아무 것도 구원하지 않으리라. 다만 책임지리라."
"내가 있는 그대로 나라는 사실과, 네가 있는 그대로 너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렇게 서로 또 함께 '잘 나'인 그 사실을, 오직 그것만을 나는 책임지리라."
그동안, 우리 사이에 있던 것은 우상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일을 가로막던 것은 바로 이 우상이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함으로써, 오히려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되던 이 일은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임을 책임지게 된 우리 사이에, 그렇게 그 무엇인 우리로도 있게 된 우리 사이에, 이제 우상이 끼어들 틈은 없다. 이미 있는 것 앞에, 없는 것은 애초 없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우상이 없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사랑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