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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9

"마음포르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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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심리학의 인기는 순기능이기만 한 것일까?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질문을 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심리학은 현재 충분한 인기를 얻고 있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더 인기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심리학의 더 풍부한 깊이를 누리고, 더 실제적인 친밀감으로 심리학을 자신의 삶과 연결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과는 동떨어진, 또는 실제의 삶을 대신할 어떠한 가상현실을 묘사하는 신종의 게임처럼 심리학이 소비되는 것은 아직 심리학이 덜 인기있는 까닭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삶과의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곤 한다. 삶을 통제하는 도구이거나 아니면 삶을 회피하는 장치로 쓰이든가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이러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실제의 삶을 사는 대신에 마음에 붙잡히도록 만든다. '마음'이라는 것만 잘 알거나 잘 지배하여 활용할 수 있게 되면 부와 명예, 인기, 권위 등을 얻게 되리라고 믿으며, 그 '마음'이라는 것을 이세계물의 치트능력처럼 삼아 매달리게 된다. 흡사 현대에서 꿈꾸는 마법인 셈이다.


이를 '마음만능론' 내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마음오컬트'라고 불러보자. 이것은 심리학의 쌈마이화다.


일례로, 심리학계에서는 그 유용성과 정당성이 폐기된 어느 구닥다리 이론 같은 것을 가져와 진화심리학이니 최신의 마음해킹법이니 등의 이름을 붙인 뒤, 그걸 헤어진 애인과 다시 섹스할 수 있는 마음의 비법(그리고 높은 확률로 동탄미시와의 NTR을 꿈꾸는 사용설명서가 될) 등으로 판다고 할 때, 심리학의 쌈마이화는 그런 것이다.


쌈마이처럼 '마음'이라는 것만 완전정복해서 다른 이의 마음을 투시하듯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 마음이 어떻게 작동할지에 대한 알고리즘을 다 예측가능하게 되면, 내 현실이 포르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들뜬 기대감은 전술했듯이 아직 심리학이 충분히 인기있지 않은 까닭이다. 어떤 산업의 초기발달시점에는 그것의 포르노적 가능성에 가장 심취되는 법이다.


포르노의 문제는 선정성이 아니라 우리가 점점 더 우리 자신의 삶과 분열되게 한다는 점에 있다.


포르노를 통해 주요하게 배양되는 것은 삶에 대한 관음증적 태도다. 이것은 자기는 위협받지 않는 신성한 입지에 자리한 뒤 삶을 대상적 소재로 다루려는 대표적인 일방성의 방식이다. 지난 날 아우슈비츠라고 하는 거대한 포르노극장에서는 이 관음증적 일방성의 폭력이 매일같이 상연되었던 바 있다.


오늘날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포르노적 소재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이 성적 환상의 소비재가 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차원보다 더 광의적인 맥락을 말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마법적 자본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제는 이 마음의 자본력을 확보한 이가 모든 욕망을 성취하게 되리라는 선정적인 선전들이 난무한다. 시크릿과 비트코인 사이의 어딘가, 또는 그 둘의 통합모델이다.


자기만은 마음갑옷에 보호받는 안전지대에 서서 다른 이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정보처리능력을 토대로, 때로는 자상하게 품어주고 때로는 엄하게 훈육할 일방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심리적 아이언맨을 꿈꾸는 쌈마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음증적 모델을 따라 살 경우 우리는 가상의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며, 그 세상은 자신이 유능하게 처리해야 할 자기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이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라는 엿보기 구멍을 통해 삶에 참여하지 않고도 안전한 곳에서 삶의 이득만을 취하려 하는 기만적 경향성이 발달한다.


마음은 이제 마음포르노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삶과 직접 교류[섹스]하지 않고도 '마음'이라는 것만 잘 알게 되면 자기가 삶의 대가가 될 수 있다는 태도와도 같다.


그러나 포르노를 많이 본다고 자신이 섹스마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포르노에 중독될수록 몸의 성감도는 오히려 떨어진다. 아무리 포르노에서 본 동작을 흉내낸다고 생리적 만족을 얻게 되는 일은 없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 상황에 처한 개인들은 실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자극적인 상황에 대해 극적으로 느끼는 척 쌈마이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삶은 저 멀리에 있다.


결국 우리가 마음을 포르노로 소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삶으로부터 철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조악한 삼류연극으로 삶을 상실한 그 자리를 구차하게 대체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방구석의 모니터 앞에 앉아 AV 배우들의 이름과 특징들을 자세히 암기하면서, 무엇인가 자신이 지금 삶에서의 대단한 권위를 얻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일례로 요즘 대중심리학에서 선호되는 융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림자와 트릭스터 원형이 어떻느니,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단계별 발달이 어떻느니, 대극의 역설적 통합이 어떻느니, 무슨 게임용어 같은 표현들로 이루어진 그 구조를 소비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AV 배우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우리의 실제 삶에 그런 것들은 없다. 이마트나 홈플러스에 장을 보러 갈 때 한번 확인해봐도 된다. 그런 게 정말 있는지.


마음이 어떤 게임 같은 것, 무협지 같은 것, 라이트노벨 같은 것, SF소설 같은 것, 어디 던젼의 보물상자 같은 것, 소수의 상류층만 향유하는 부와 권력의 비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면, 지금 마음포르노를 보고 있는 중일 뿐이다.


동무들과 포르노를 보곤 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이 있다. 그때 포르노의 보급자는 뭔가 남들보다 성숙하게 앞서 있고, 인생에 대해 뭘 좀 아는 선구자처럼 인식되었다. 세상의 어떤 특별한 비밀을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민중에게 전하는 헤르메스의 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인기는 그의 몫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음포르노가 범람하는 이유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가 더 널리 마음포르노를 보급하고자 한다. '마음'이라고 하는 특별한 지식을 전하는 정보메시아가 되어 슈퍼스타의 인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심리학의 인기를 자신의 인기로 갈취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심리학은 아직도 충분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심리학이 더 펼칠 수 있는 현실이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향하는 현실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관음증이란 불가능한데, 우리 자신의 삶은 대상화되면 흐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삶은 턴제의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것이 아니다. 시간을 멈추어둔 채 마음을 통해 자기만 알 수 있는 어떤 비밀의 지도 같은 것을 얻은 뒤, 다시 시간을 흐르게 해서 이제는 치트능력 같은 것을 적용한 삶을 실행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정말로 향할 때는 바로 간다. 그런 '마음' 같은 것을 거쳐, 또는 통해, 또는 알아감으로써 가지 않는다. 마음을 안 다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매개없이 바로 산다. 즉각 산다. 선에서는 이를 가리켜 직지인심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마음을 향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삶과 일치한 마음의 온당한 의미를 다시 얻는다.


마음을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을 사는 것이다. 그게 곧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산다는 의미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상태로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는 "긴 시간 나를 불편하게 했던 이 신체 하복부의 긴장되고 수축된 떨림의 반응을 알아차려보니, 대체 어떤 마음일지에 관심을 가지며 성찰적 글로 한번 묘사해보니, 아하! 나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그럼 이제 이 감동적인 마음을 삶에서 실천하기 위해 화장실로 기꺼이 향해야겠구나, 껄껄껄!"하며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그냥 간다. 바로 간다. 인간은 병신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과 삶은 원래 일치된 것이다. 따로일 수가 없고, 대립일 수는 더욱 없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향할수록, 많은 것은 간명해진다. 피곤한 여분의 과정들도 빠지게 된다.


반대로, 심리학이나 마음이라는 표현을 소비할수록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늘어간다면, 기존에는 안하던 것을 여분으로 더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게임 같은 알고리즘을 우리가 복잡하게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삶과 멀어지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주변을 확인해보자. 분명 마음포르노가 상영되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마음을 잘 보면서 스스로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삶과 멀어졌기에 삶은 더 낯설어지고 두렵게 경험된다. 마음을 보는 일 같은 것을 강박적으로 하지 않고는, 삶에 대해 실은 더욱 무능력해진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자신감은 삶을 효과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관음증적 태도를 발달시킴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일치할 때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그것은 말하자면 일방성이 아닌 상호성의 현실이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다.


지금 실제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삶이 나를 보는 그 시선이다. 내가 어떻게 보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고, 다만 사건들을 통해 다가온 삶의 시선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자 할 때 그것은 삶을 들이받기만 하던 우리가 이제 받아들인 것이고, 상호적인 교류가 처음으로 성립된다.


일방적인 포르노가 아닌, 삶과의 상호적인 섹스 속에 마침내 우리는 놓인 것이다. 일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로 포개진 삶과 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여분의 자리가 없다. 여분을 채우기 위한 허기진 잉여의 작용이 없다. 결핍이 없고 부족함이 없다.


마음[마음포르노] 따위는 보지 않더라도, 보지 않아도 되기에, 마음이 자유롭다. 삶이 자유롭다. 삶이 자유로워 심리학은 좋은 것이구나, 한다.


이렇듯 마음이 자유로운 삶을 묘사하기에, 인간 모두의 가장 진실한 소망을 노래하기에, 포르노보다 인기있는 것이 원래는 심리학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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