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
결국 이 모든 것의 문제는 무엇인가?
관계다.
가장 엿 같은 것은 관계다.
관계는 사기꾼이다. 관계는 마음을 가리고는 자신이 대신 마음인 척한다. 그리고는 상담을 하고, 글을 쓰고, 심리학을 공부해서 자신의 놀라운 가치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관계를 통해 인간은 서로 도우며 발전해왔다는 둥, 평범한 이도 스타로 만들어줄 힘이 관계에는 있다는 둥, 다들 조속히 관계의 마법을 손에 넣으라고, 더욱 관계에 몰두하라고 인간에게 종용한다.
비유하자면 SNS를 하지 않는 이는 세상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식의 공갈과 협박도 그 안애는 내포되어 있다. 관계는 언제나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화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실은 관계가 좋아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무서워 어떻게든 관계의 끈을 붙잡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착각이 있다. 관계를 잃으면 자신의 세상을 잃고, 삶을 잃을 것 같다는 착각이 작용한다.
이 착각은 우리에게 아주 강렬한 저주가 되어 있다.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저주는 더욱 위력을 강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아니, 관계 따위 엿이나 먹어라.
다시 한 번, 관계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고자 여행을 떠났던 선각자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붓다는 생로병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관계에게만 생로병사가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로병사는 언제나 관계를 무용하고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관계의 것일 뿐이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것으로 인해 이렇게 긴 시간을 고통받아왔다니, 붓다는 전율했다. 두려움의 장막에 가리워져 있던 그의 날개가 꿈틀거리며 활짝 펼쳐졌던 것이다.
그때 붓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관계 따위보다 몇천억 광년을 앞서 존재했던, 관계 따위가 없어도 스스로의 존엄함으로 우뚝 서있던 그 존재의 목소리를.
예수는 많은 유혹을 받았다. 관계의 힘을 통해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느니,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추구하며 그 사실에만 동의하면 모든 부를 얻게 해주겠다느니, 관계의 달콤한 속삭임은 예수를 거듭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엿이나 먹어."
우리는 조금 더 풀어쓸 수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관계를 엿먹이는 말씀인 까닭이다.
그때 예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사람과 가장 하나이기를 바라시는 가장 하나님다운, 그렇기에 가장 자신다운 그 목소리를.
가장 자신이 아닌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관계의 다른 이름들. 관계의 부속물이자, 관계의 자식이고, 관계의 근거이자, 관계의 결과이며, 관계의 핵심인 것들.
이야기[내러티브]. 정체성. 마인드. 이념. 서사적 감정. 시스템. 율법. 정보. 역할. 기능. 양육. 윤리. 유니버스. 통합. 구조. 언어. 내면의 아이. 알고리즘. 앎.
바로 이런 것들이 자신을 '마음'이라고 칭하고 있다.
자신이 신적인 것이라며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신적인 것을 대신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늘 상기되어 있고, 도취되어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그 목소리가 크다. 당연하다.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덮으려면 표면에서는 과잉된 잡소리로 시끄러워야 하는 까닭이다.
목소리는 때론 행위로 표현된다.
표면의 목소리는 분주한 행위를 낳는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꾸며내기 위해 과대포장과 날조선동의 헛수작을 한다.
심연의 목소리는 우리 앞에 지금 다가온 그 삶의 사건으로 고요히 울려퍼진다. 모든 삶의 사건은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이다. 빅터 프랭클은 정확하게 말한다. 삶에게 묻지 말고 삶이 묻는 물음에 대답하라고.
삶은 이렇게 묻고 있다.
"오 내 사랑, 당신이 바로 그 대단한 존재인가요?"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우리 자신의 목소리는 늘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남다른 영웅적 행위로 증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놀라운 앎으로 펼쳐내라고 하지 않았다. 선한 영향력으로 행사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마음[관계]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그 자유로운 마음[자신]이 당신이냐고 단지 물은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다.
그러고 싶다고만 대답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된다. 그에 대한 증명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란 걸 삶이 증명할 것이다. 그 모든 관계의 저주를 다 깨부수며 삶은 우리를 태우고 솟구쳐 날아오를 것이다.
우리의 발을 고통 속에 영영 접착시키고 있는 이 엿 같은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렇게만 기억되리라. 그 어떤 서사도 아닌, 언어로 적으면 너무나 재미없어 아무도 관심갖지 않을,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은.
그러나 이 우주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우며 강한 존재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살라고 태어난 것이라고, 우리가 고요할 새벽녘에는, 홀로 여행온 바닷가에서는, 마주한 고양이의 눈동자 속에서는, 무엇보다 깊고 진실된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관계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할 뿐이다.
무엇도 내가 존재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것만을 알리던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