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과의 대화"
우리의 마법선생님들은 또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법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그동안 무시해왔던 내면의 목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외부의 목소리들을 중요한 정보로 소비하는 일에만 열중하던 우리는 어느새 자신과 대화하는 방법을 잊게 되었다.
혹은 오해하거나 쇼를 한다. 자기 안의 여러 속성의 캐릭터 같은 것들을 만든 다음 그 가상인격들끼리의 군상극을 연출한다든가, 아니면 몹시 서운해하며 징징대는 내적인 갓난아이를 상정한 뒤 그 목소리에 대해 "그래그래."라고 성모처럼 다 받아주는 엄마소꿉놀이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자기와의 대화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연극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상담의 형식이다. 실제로 자기 자신과 대화를 잘하는 이는 상담도 잘하게 된다.
상담은 그렇다면 어떤 활동인가?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일인가? 이 말은 말 자체로는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용법은 아주 굴절되어 있다. 모성을 다소간에 신성시하는 문화적 문법 속에 있는 우리는 '잘 들어주는 일'을 '다 받아주는 일'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성이 있다. 마치 아이의 응석을 다 받아주어야 하는 의무를 엄마에게 강제하듯이, 상담사에게도 유사한 의무가 강요된다. 자기 말에 무조건 공감만 해달라는 식으로 적지 않은 수의 내담자들은 분명 상담자에게 일방성의 폭력을 가하곤 한다.
"내 말은 정답이니 그냥 듣기만 하고 다 맞다고만 해." 여기에는 이런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상담이 아니다. 대화조차도 아니다.
오히려 상담의 핵심인 '잘 들어주는 일'이란 '잘 질문하는 일'을 뜻한다. 질문은 지금 불변의 진리처럼 가정된 그 닫힌 정답을 의문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담자의 말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린 이해로서의 가능성을 개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상담자는 많은 질문을 한다. 상담은 이처럼 순수한 질의응답의 구조를 갖는다.
올바르게 질문하는 일은 그 자체가 공감이다. 정확하게 잘 들었기 때문에 올바른 질문은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오히려 작위적인 공감반응을 연극처럼 수행해야 그게 잘 듣는 태도라고 착각하는 '공감강박증'은 올바른 질문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올바른 질문이란 닫힌 현실이 열린 현실로 전환되게끔 촉진하는 질문이다. 특정한 하나의 답이 정답으로 고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질문이 이끄는 올바른 답이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분명한 답이 된다. 고집 때문에 지금 꽉 막혀 감옥이 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로 자신을 연결지을 수 있는 그 길이 되는 까닭이다.
심리상담이 이처럼 가능성의 개방을 통해 개인의 자유가 증진되도록 조력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결국 자신과의 대화라는 것 또한 동일한 방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과정도 동일하다. 질의응답이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답을 기각한 채 순수하게 묻고, 또 정답을 포기한 채 정직하게 답하는 일이다.
정말로 자신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투명하고 지대한 관심으로만 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향한 관심이 견인하는 이 탐구의 운동은 주요하게는 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세 요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첫째는 '침묵'이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일이라고 해서 끝없는 독백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독백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정답의 소유자인지만을 반복하는 앵무새의 일이다. 그것은 늘 청중을 강제적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침묵은 절대적인 혼자의 의미다. 해질녘 강둑의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상태 같은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상태다. 존재하기만 하는 상태다.
둘째는 '묘사'다. 이것은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쓰라는 말인 것처럼 막중하게 오해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묘사에서는 철저히 자기가 빠져야 한다. 묘사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경이다. 우리는 풍경화를 그린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정직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려간다. 정답대로 짜맞춘 시나리오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을 사실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셋째는 '자각'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의 짧은 표현이 바로 '자각'이다. 허위의 정답에 가려진 어떤 사실을 기억해내는 것이 자각이며, 대화의 목적이다. 올바른 질문은 이 자각을 돕기 위한 것이다. 자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있는 그대로를 묘사해놓은 풍경에 이제 자신을 위치시키면 된다. 그러면 그 관계성 속에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이 자각의 내용이다.
예를 들어보자. 초등학생들로 가득한 공원의 풍경을 그린 이가 있다. 그는 모두가 바라볼 수 있는 공원의 중앙에 스스로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믿는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러면 자신이 살아온 그 모든 것이 다 이해가 간다. 자신에게 왜 그러한 일들이 생겼는지, 그동안 왜 전체의 그림이 조화롭지 못했는지, 자신이 대체 무엇이었는지가.
그는 최고의 천재초등학생을 꿈꾸던 가장 초등학생인 이, 그러나 자신만은 가장 초등학생이 아닌 척하던 이. 그래서 늘 초등학생들과 애증했다. 그렇게 초등학생에게 집착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다 초등학생으로 굴절시키게 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것들과 늘 반목하던 부조화의 풍경이 펼쳐졌다.
자각은 언제 썼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주 예전의 일기장을 보게 되는 일과도 같다. 그게 자기가 쓴 일기장의 내용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마치 인류의 위대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일기장을 섬기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일기장으로 돌아가보자.
일기장에 적힌 모든 내용은 다 이러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는 아주 많이 사랑받고 싶었으며, 그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진정 못나고 형편없는 그 자신으로서 한 번이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세상이 자신의 일기장에 적힌 소망을 이루어주어야 한다며.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다.
세상에서 오직 그 자신에게만 들린다.
그러니 응답할 수 있는 것도 세상에서 오직 그 자신뿐.
일기장에 적힌 그 모든 소망에는 다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주 큰 사랑에 속하고 싶었으며, 그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진정 못나고 형편없는 그 자신을 한번 사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자각의 온전한 내용이다.
자각되는 것은 사랑의 소재이자, 그 기회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음, 기필코 사랑하고야 말겠어!"라며 우리가 의지의 힘을 발휘해 억지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거울만 봐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안다.
그러나 마법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우리 자신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와 대화를 해나가는 일은 아주 오롯하게 우리 자신을 향한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우리 자신만을 향해서 100%로 비치는 햇살이다. 이 관심의 빛으로 인해 결국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전체의 풍경화가 그려질 때, 그 그림을 그린 힘은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의 풍경화. 우리를 향한 순수한 관심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것은 분명 사랑이다.
'사랑의 마법'은 이렇게 펼쳐진다.
가장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제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한다.
사랑의 마법은 모든 마법의 기초이자 원점. 모든 마법은 다 사랑의 마법의 응용판이다.
삶은 이 근원의 마법의 끝없는 표현이며, 그래서 삶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마법현상이다.
우리가 가장 배우고 싶었던 마법 중의 마법, 사랑을 배울 모든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