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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31. 2024

자아초월적 실존상담 #1

"1의 세계와 2의 세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1과 2 사이에서 일어난다. 1과 2 사이의 경계가 구분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거나, 1과 2가 서로에게 망각되어 분리되어 있을 때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 심리적 문제다. 모든 심리적 문제는 경계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융합 또는 소외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활양식의 독특성에서 기인한 문제다. 인간은 언어가 없이도 존재하나, 마치 자기가 언어로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를 가리켜, 인간은 1의 세계와 2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고도 말할 수 있다.


  1의 세계는 존재계, 절대계, 평등계라는 이름을 갖는다.


  2의 세계는 언어계, 상대계, 차별계라는 이름을 갖는다.


  2의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일은 더 쉽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 모든 맥락이 다 2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일이다. 2의 세계는 언어가 중심이 되어 문명을 작동시키고 시스템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의 통상적인 세계를 뜻한다. 이 2의 세계는 언어를 통해 출현하게 된 후천적인 것이며, 언어적 학습을 통해 계승되고 지속된다.


  그런데 언어의 속성을 살펴보면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언어화하려면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을 함께 상정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있다. '길다'라는 말이 이미 '짧다'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언어계는 곧 상대계다. 상대적 대상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세계, 둘로 찢어진 세계다. 그래서 2다.


  그러나 단지 찢어진 것만이 아니다. 상대계에서 출현하는 것은 계급이다. 언어적 평가에서 '선함'은 '악함'보다 우위를 갖는다. 언어는 이제 가치를 창출하게 된 것이며, 그러한 가치들에 부합하는 상태들이 더 우세한 계급적 권위를 얻기 시작한다.


  상대계의 원리가 '비교'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언어는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만 언어일 수 있으며, 비교는 우열성의 세계를 낳는다. 계급적 차별이 생겨난다. 그래서 언어계는 상대계며 또 차별계다.


  인류사에서 언어의 발달과 함께 사유재산제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의미깊다. 언어로 삼라만상을 분리시킨 뒤 그것들을 다시 또 언어를 통해 재소유하면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동하는 심리적 소재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려진 이름으로 '자아'라고 부른다.


  자아는 2의 세계의 주인이다. 언어를 중시하고, 언어를 통해 이 현실을 주체적 자기와 도구적 대상의 구분으로 나누며, 자기 외의 것들에 대해 자기가 언제나 우월성을 갖는 계급적 우위를 창출하고자 한다.


  때문에 자아가 신앙하는 것은 언어다. 자아는 언어의 왕이자 동시에 노예다. 자아는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세계에 대한 지배권 및 통제권을 획득하게 된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런 방식으로 언어에 매인다.


  자아의 가장 큰 믿음은 자기가 언어로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에 따라 또한 자아는 자기가 언어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쉽게 말해, 자기의 생각대로 이 세상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매우 진지하게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때는 그래서 미친듯이 화를 내며 우울해지곤 한다. 전형적인 망상의 증세다. 망상은 언어가 야기한 언어병의 일종이다.


  그러나 자아가 아무리 분노하든 우울증에 빠지든 간에, 이 세상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와는 무관하게 사실적으로 존재하지,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바로 이 존재의 사실에 대한 철학이다.


  실존상담은 바로 이 존재의 사실을 통해 우리 존재의 회복을 모색하는 심리학적 방법론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존상담은 1의 세계를 까마득하게 망각한 채 2의 세계만을 살아가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고통받게 될 때, 그들이 더 본래적인 1의 세계를 회복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돕고자 하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1의 세계는 언제나 2의 세계보다 우선한다. 그렇다고 2의 세계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문명의 발전과 인간복지의 증진은 2의 세계에서 기인한 긍정적 결과다. 오히려 문제는 2의 세계만이 전부라는 착각에 있다.


  이러한 비유를 들어보자.


  넓은 풀밭이 있다. 그 위에 판석을 깔아 '길'을 만들었다. 도로가 생기니 물자의 이동이 수월해지고 유통망이 발달하게 되었다. 문명의 역사는 바로 이 '길'의 역사와 같다.


  여기에서 길을 만드는 판석을 언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다. 아주 편리한 도구다. 유용하다. 그러나 이 판석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출현한다. 마치 판석 위에서 떨어지거나 판석을 벗어나면 우리가 죽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판석을 벗어난 것뿐이다. 사실적으로는 더 푹신하고 편한 잔디가 우리가 발을 내딛는 도처에 깔려 있다. 우리가 죽게 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는 잔디밭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2의 세계만을 유일한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을 경우에는, 언어라고 하는 판석을 벗어나는 일이 자기의 죽음처럼만 생각되기에 매우 두려워진다.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처럼 언어를 떠날 생각을 못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2의 세계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언어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의 노예가 되었을 때의 전형적인 증세는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자존감이 약하다는 표현은 자신을 잃은 이 상태를 가리킨다. 삶의 중심이 없고 든든하지 못하다. 그러니 삶이라는 것이 늘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그럴수록 더 언어를 의지하게 되며 그로 인해 상황은 악화되는 순환고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잔디밭에 깔린 판석이 언어라고 할 때 그럼 잔디밭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우리에게 깔려 있던 것. 길보다 더 큰 우리의 영토.


  인간은 길 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그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던 이 초목의 동산에서 태어났다.


  그 이름은 바로 삶이다.


  삶 위에 언어를 깔아 그것이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만들어놓고, 이제 그 언어 위에서 떨어지면 죽는다고 인간이 믿게 되었을 때, 삶은 인간으로부터 망각되어 오히려 두려운 소재로 화했다. 이제는 인간은 자신의 삶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자신이 기원하고, 심지어 지금도 속해있는, 그것을 벗어나면 존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인간의 본래적인 영토로부터 인간은 자신을 추방한 것이다.


  이것이 1의 세계다. 삶이라고 하는 존재의 세계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의해 존재하기에, 이 1의 세계에서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적인 차원의 것들이 사라진다. 그래서 절대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삶에 의해 이처럼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여기에는 존재의 위계가 없다. 평등계다. 존재는 절대평등하다.


  불교에서는 이 1의 세계에 대해 매우 잘 묘사한다. 언어 때문에 생겨난 착각을 해지하고 우리가 1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불교의 방편들은 구성된다. 나아가 선불교에서는 1의 세계의 감각으로 2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한다. 이는 십우도와 같은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두 세계는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 경계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 그 존중이 1의 세계와 2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2의 세계에서만 사는 이들이 1의 세계를 망각함으로써 그 경계를 무시하는 일만큼이나, 이제는 1의 세계를 알았다고 하는 이들이 2의 세계의 경계를 무시하는 일도 빈번하다. 죽을까봐 판석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는 이들 앞에서, 이게 뭐가 무섭냐고 혀를 내밀고는 잔디밭에서 뛰어다니는 일 같은 것이 그런 경우다.


  이러한 이들은 실은 1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아직 그 몸에 자리잡지 못한 것이다. 정말로 1의 세계를 체화한 이들은 오히려 판석 위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한 사실로 알고 있으니까, 굳이 떨어지기보다는 판석들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다니며 생활한다. 그러니 보는 이들에게는 누구보다 2의 세계를 잘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판석은 잔디밭을 벗어나있는 것이 아니라, 판석도 잔디밭 위에 놓여 있다. 그렇게 놓여 있으면 예쁘고 재미있다. 놀 수 있는 소재가 된다.


  이처럼 언어의 우상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선불교는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아주 가볍게 유희하듯 쓴다. 언어에 무게를 두지 않으며, 다만 삶을 함께 즐길 장난감으로 쓰는 것이다.


  야구를 떠올려보자. 투수가 공을 던지든 말든 그냥 걸어가서 진루하면 되는데 왜 그러지 않는가? 그러면 재미가 없어서다. 또는 공을 잡은 수비가 진루하던 자신을 터치했는데, 자신은 죽지 않는다며, 존재론적으로 이 언어규칙들은 자신을 결코 죽일 수 없다며, 무언가를 깨달은 비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그림을 떠올려보자. 게임에서 죽으면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이 또한 웃픈 코미디다.


  실존상담은 1의 세계에 대한 이 존재강박증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광신의 전통이 아니다. 존재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이렇게 존재를 또 하나의 소재처럼 여기는 착각의 일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소재만 계속 바꾸어가며 어떤 유일한 정답의 언어 같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1의 세계라는 것을 또 하나의 언어로 소비한다. 그렇게 1의 세계를 가장 무시하며, 오직 2의 세계만을 유일한 세계로 지속하려고 한다.


  실존상담은 그래서 이 '자아 너머'를 겨냥하려는 목표를 갖는다. 표현 그대로 '자아초월'이다.


  심리학의 역사 속에서, 1980년대에 미국에서 태동한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은 심리학과 영성의 만남을 표방했다. 새롭게 출현한 조류라기보다는 심리학이 발전되어오면서 이미 암시되었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자아초월심리학의 세력에 가장 큰 비판자로 앞을 가로막았던 것은 바로 커크 슈나이더와 롤로 메이를 위시한 실존상담의 연구자들 또 임상가들이었다. 그들의 주요한 비판점은 상기한 맥락과 같다. 자아초월심리학은 1의 세계를 말하는 척하지만, 아주 많은 경우 그러한 언어만을 차용해 실은 2의 세계를 강화하고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존상담은 아주 멋진 일을 했다.


  그것은 그 성립에서부터 이미 실존주의적 종교성의 핵심이기도 한 1의 세계를 다루던 실존상담이, 자아를 초월한다는 게 정말로 무엇인지를 원조맛집답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의 바깥에 서다."라는 실존이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초월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사족일 수 있겠지만, 어떻든 이제 '자아초월적 실존상담'이라는 이름은 통용될 필요와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실존주의와 선불교는 원래부터도 그 표현과 방향성에 있어 통하는 것이 많았지만, 실존상담이 자아초월적 의도를 더욱 분명히 한 이후로는 두 전통은 흡사 쌍둥이처럼 보이게 되었다. 선불교가 삶의 불교라면, 실존주의는 삶의 철학이고, 실존상담은 삶의 심리학이다.


  삶, 1이면서 2인 것, 1과 2를 함께 사는 것, 그러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아니라, 2를 1로 사는 것.


  그래서 비이원이다. 그러나 삶의 비이원이다. 어디 추상적인 세계에서의 개념이 아니라, 삶에서 직접 비이원의 현실을 사는 일, 바로 그렇게 존재하는 일, 이것이 선불교와 실존상담이 공통적으로 노래하는 길이며, 자아초월적 실존상담의 성립의의다.


  자아초월적 실존상담에서, 자아를 초월하는 일의 핵심적인 열쇠는 마음이다.


  마음은 지금껏 2의 세계의 문법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언어를 바꾸면 마음이 변화된다느니, 언어를 통해 마음을 깨닫는다느니, 마음은 언어구조로 되어 있다느니 등의 얘기들이 다 그 잔재다.


  그러나 자아를 통해 자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이 말이 대체 어떻게 들리는가?


  자아만 강화될 뿐이다. 이 경우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작해야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어줄 사료로 전락하게만 된다. 자아가 비대해지는 정도와 삶에 대해 두려움을 경험하는 정도는 비례한다. 자아는 자신의 삶을 배신하고 상실함으로써만이 비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마음을 이제 1의 세계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존재계, 절대계, 평등계의 원리로 다시 드러내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1의 세계에서 발견한 마음의 그 본래적 모습을 통해 2의 세계를 즐겁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이럴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바로 찾게 되며, 이 삶은 그런 자신이 태어나서 마음껏 행복해도 되는 시간이었다고 마침내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아초월적 실존상담은 바로 이 일을 위해 특상으로 최적화된 접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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