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못놀게 될 때"
우리가 놀지 못하게 되는 일, 그건 누가 막아서는 절대로 아닐 것이다.
오히려 막는다면 우리는 더 놀고 싶어지며 그 일을 반드시 실현하게 된다. 인간이 호모 루덴스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핵심적 활동인 놀이에는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놀이는 언제나 한계 속에서의 놀이라는 것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분명한 한계가 있을 때, 그럼에도 그 한계를 초월하려고 할 때 극적으로 놀이는 창조된다. 놀이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 더 큰 자유를 펼치고자 하던 초월적 존재방식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떤 한계가 아닌 어떤 완성인 것처럼 굴 때, 우리는 놀이의 감수성을 잃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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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막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뿐이다.
심리학적으로 이 말은 진실이다.
그러나 못난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가 대단히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화상이 우리의 갈 길을 막는다.
우리는 어떨 때 가장 못놀게 되는가?
자신이 가장 잘 놀고 있다고 생각할 때다.
소위 말해, 그런 척하고 있을 때, 우리는 실제의 그것을 가장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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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자.
그 모든 '척'의 소재는 다 남에게서 얻은 것들이다. 남에게서 들은 말로 자신이 똑똑한 척하고, 남에게서 배운 내용으로 자신이 대단한 전문가인 척한다.
또 남이 입혀준 옷, 남이 꾸며준 얼굴, 남이 써준 대사, 남이 지어준 노래, 남이 연출한 컨셉으로 덕지덕지 무장하고서는 자신이 아티스트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장 잘 노는 자유로운 영혼인 척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을 그렇게 썼을까? 커트 코베인이 MTV에서 시키는 대로 공연 중에 기타를 박살낸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래서 그는 자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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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잘 추지 못하면서 춤을 즐기는 일은 쪽팔리지 않다.
쪽팔린 것은 남의 말을 따르는 일에만 능숙한 모범생들이 마치 자기가 진정한 춤꾼인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할 때다. '척'을 하고 있을 때는 언제나 언행이 과장되며 그 반응이 호들갑스럽다. 도통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자아도취가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연기하고 있다.
연기는 놀이의 일종이다.
그것은 거짓말놀이다.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놀이다. 이 일을 잘하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여느 놀이꾼에게 보내는 것과 동일한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어떤 명배우들도 자신이 바로 그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러한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자각이 있다. 그래서 거짓말놀이는 놀이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자각을 잃으면 정신병이다. 자신이 정말로 해리 포터라고 생각했다면 다니엘 레드클리프는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치심을 영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은 분명한 자각이 있을 때 수치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누구도 맨정신으로 자신이 20년 전에 쓴 싸이월드 일기를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수치심을 통해 오히려 인간은 정신병으로부터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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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코헛 얘기를 해보자. 현대정신분석을 대표하는 코헛은 여느 정신분석가들과 마찬가지로 상담의 성공여부는 내담자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좌절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이가 경험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대해 묘사한다. 자신을 이 세상의 위대한 대장으로 생각하던 아이는 자신보다 더 거대한 한계를 만났을 때 무력감을 경험한다. 코헛은 이 지점에서 부모가 섣불리 개입하지 말 것을 권한다. 아이의 과장된 자화상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 기죽게 뭐하는 짓이에욧!"은 아이의 발달에 좋지 않다. 아이가 정직한 한계를 무시하고 과장된 자화상으로 계속 '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가장 치명적으로 아이를 망치는 일이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깨진 화분을 마치 안 깨진 척 부모의 손으로 계속 막아주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일을 하려 하니 부모노릇이 늘 힘들다. 정말로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와 함께 깨진 화분을 치우는 일이다.
해체에 동참하는 일, 이것은 아이가 부모에게 깊은 신뢰를 형성하게 되는 기회로 작용한다. 잘못해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해도 부모가 그 끝에 함께 있어줄 것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든든한 실증적 믿음이 된다.
'척'을 하는 이들은 이러한 신뢰가 잘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유아적인 정체성이 해체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들은 늘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남들에게서 얻은 가장 좋은 소재만을 모아 자기의 자화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도 잘못해선 안되기 때문에. 자신은 무오하고 완벽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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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이란 실패로 이루어진다.
정확하게는 실패가 아니다. 끝없는 과정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해보면서, 모험하고, 경험하며, 배워가는 것이 놀이의 즐거움이다.
자신이 완벽한 척하고 있는 이는 모험을 떠날 수 없다.
모험이 아닌 삶이란 지루함 그 자체. 실은 죽어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죽음을 싫어하는 이유는 속상해서다. 더는 놀지 못하게 되는 일이.
사랑하는 것들과 더 오래 놀고 싶은데, 가능하다면 영원히 함께 놀고 싶은데────
그래서 이 영원이라는 것이 인간의 가장 진실한 소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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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 막연하게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해질녘까지 아파트 단지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기억, 밤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놀이터에서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대화, 또 연인과 함께 앉아 있던 카페에서의 시간.
거기에는 분명 영원의 편린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거기에는 분명 어떤 종류의 가장 진실한 것이 있었다.
놀이는 우리가 영원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놀이 속에서는 영원이 재생되며, 우리는 그 향기에 흠뻑 젖어든다. 놀면 놀수록 영원의 감수성이 우리에게 무르익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라고 말한다면, 놀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일 것이다.
어떤 기도보다도, 어떤 명상보다도, 놀이는 깊다. 그리고 빠르다. 선(禪)은 마음으로 잘 노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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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이것은 단순히 한계없이 길게 늘려진 시간의 연장을 뜻하는 개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놀이를 통해 영원을 체험하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완벽함.
온전함.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이어도 된다는 어떤 허락.
우리는 놀이 속에서 바로 그것을 체험했다.
놀이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개방하는 장. 놀이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속일 필요도, 무엇보다 특히 우리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노는 척하는 애들을 우리는 놀이에 끼워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 짜장면을 사주고, 비싼 선물을 돌려도, 우리는 그런 이들과는 진심으로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요즘에는 오히려 노는 척하는 애들에게 사람들이 열광한다. 우리가 얼마나 노는 법을 잃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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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 인형에게 찬사를 보내며, 우리 자신도 꼭두각시 인형을 닮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것은 모방품의 복제품이 되는 현실이다.
가장 완벽하게 모방한 것을 가장 완벽하게 복제하면 그것은 오리지널리티인가?
그게 정말로 '나'인가?
놀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본다면, 차라리 우리는 완벽한 꼭두각시 연기에 실패해야 할 것이다.
못해도 괜찮으니 그럴듯한 남의 것들을 치우고 혼자 해본다면, 놀이는 시작된다.
우리는 예쁘고 똑똑하며 잘난 꼭두각시가 아니라, 못날 대로 못났지만 엄연한 나다. 한 번뿐인 나며, 하나뿐인 나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러한 '나'를 즐길 자유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즐기는 일, 이것이야말로 놀이의 원형이다.
놀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보는 일을 이제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척'만 하며 가장 못놀게 되어버린 오늘날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분명 이 초월의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