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의 진화"
우리는 놀 때 성장한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놀면서 키워지는 것은 감성이다.
감성에는 숏컷이 없다. 내가 느낀 것만큼만 나는 성숙되어 간다. 아무리 트러플과 캐비어, 푸아그라로 치장해도, 고기가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다면 맛이 없다. 맛이 없는 것을 넘어 촌스럽기까지 하다.
차라리 집에서 혼자 간장계란밥을 해먹었더라면, 늘 먹던 버터 대신에 참기름을 넣고 참치와 쪽파를 살짝 섞어보았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놀이이고, 감성이다.
놀면서 키워지는 것은 감성이고, 그 감성을 스스로 양분으로 삼아 인간은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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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으로는 숏컷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외워서 따라 하면 자신도 그런 수준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한다.
실제로는 수준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단지 기준이 높아진 것이다.
명품가방에 대한 정보를 소유했다고, 그 가방을 소유한 것은 아니다. 그 정보로 인해 이제 자신이 가져야만 한다고 믿는 가방의 기준만이 높아진 것이다.
수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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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과 기준이 맞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것은 고통이다.
가슴과 머리가 일치하지 않아 생겨나는 것도 고통이다.
고통스러울 때 우리가 가슴[마음]을 돌아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통은 어찌보면 우리를 실제의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려주는 순기능을 갖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처럼 살려는 일은 너무 힘겨운 일이다.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배신의 고통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배신했으며, 곧 우리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한다는 표현을 우리는 자기부정이라고 옮길 수 있다.
지성을 통한 숏컷을 꿈꾸며 사는 삶은 이러한 자기부정 속에 있다. 그러니 살면 살수록 자신의 상태는 참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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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은 유기체의 건강성을 나타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감성은 투박하고 촌스러워진다. 나아가서는 냉담함의 상태가 된다. 이것은 잘 웃지도, 더 치명적으로는 잘 울지도 못하는 상태다. 이 경우, 가슴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압박감으로 인해 쫓기는 듯한 초조함을 경험하게 되며, 그로 인해 항시 공중에서 부유하듯 들떠있는 상태만이 지속된다. 현실에 대한 실감은 더욱 없어지며 불감증의 증세들이 삶에 만연하게 된다.
더욱 쉽게, 우리가 현재 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심리적 건강에는 다소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잘 놀지도 못하게 된다.
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다 생생한 존재로 경험한다. 놀이의 맛은 그런 것이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음미한다. 건강한 것이 맛이 있다. 이 또한 당연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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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해서 더욱 활력이 넘치게 된 것은 이제 어떻게 되는가?
진화한다.
이것은 수준의 구조적 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성화며 개별화다.
성장한 수준은 이제 새로운 원점을 갖는다. 말하자면 기존에 1부터 20까지의 상태들을 갖고 있던 이가, 이제는 20을 새로운 원점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상태가 하락하더라도 20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늘 수준의 고점을 일정 이상으로 확보하게 된다.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것을 향해서.
그러한 측면이 더욱 섬세해지고, 깊어지며, 개성을 갖게 된다.
인간으로서 아주 매력적인 향기를 풍기게 된다.
이런 이와는 사람들이 더 가까이 접하며 어울리고 싶어진다. 그러니 놀 일을 더 많이 생겨난다. 놀수록 존재의 향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는 멋스럽게 무르익는다. 그가 소유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명품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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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마음을 묘사하는 단어 중에 gemüt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기질, 심성, 기분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어떤 것을 향한 끌림을 뜻하는 표현이다.
마음은 바로 이 끌림이다.
감성은 그 대표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사랑 또한 끌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랑할 때 얼마나 우리가 스스로를 멋진 사람으로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는 분명해진다.
인간은 끌림을 통해 성장하며, 또 진화한다.
사랑의 맛을 알게 된 이는, 그 밑으로는 이제 갈 수 없다. 가지 않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원점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할 것이다.
역으로 얘기하면, 사랑이 그를 추락하지 않게끔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끌리는 것을 향한 그 사랑을 표현해가는 일을 우리는 놀이라고 말할 것이다. 감성의 표현이며, 정직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아주 성숙하고 건강한 유기체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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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끌리는 것을 향해 살아가는 이 방식을 반대편의 입장에서 다시 묘사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공공연한 비밀은 무엇일까?
자신이 발한 사랑이 재귀적으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부정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원리다.
이렇게 놀면서 살수록 자기 자신은 더욱 사랑스럽게 경험된다. 스스로가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순수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그 모습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향한 사랑 속에 있으며, 그 사랑이 또한 더 많은 사랑을 끌어들인다.
우리가 자기부정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스스로를 사랑해보려고 노력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거울만 봐도 한숨이 나온다. 이를 악물고는 절박한 주문처럼 "사랑해. 사랑해." 거울 속을 향해 외쳐보지만,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행인 A만 만나도 우르르 무너져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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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숙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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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늘 높아보이는 이는 어쩌면 진화된 생명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많이 한 이가 아니라,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많이 논 이일 것이다.
남들 앞에서 수준이 높은 척하기 위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추구하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끌리고 있는 것만을 더 가득 느끼며 그 느낌에 스스로를 적셔간다.
촉촉하다.
살아있다.
눈물에는 숏컷이 있는가?
만약 우리가 살면서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들이 우리를 키우는 생명수라면, 우리가 그 경험 속으로 우리의 몸을 던져 더 많이 젖어드는 것이 진화에는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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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울리는 것에 끌린다. 그런 것을 감동이라고 말한다.
감동이 인간을 키운다.
감동 속에서는 반드시 인간이 사랑하던 것이 있으며, 그 사랑이 또한 인간 자신에게로 찾아오게 된 만남이 있다.
우리가 논다는 것은 결국 감동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매순간을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삶 자체를 감동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수준. 어쩌면 우리는 다 이 지고한 수준을 얻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다 잊은 것뿐이다. 감동받을 수 있는 감성을 잃어서 냉담해지고 또 불감해졌다.
진화라고 말하지만 회복일 것이다.
자신이 끌리고 있는 것, 사랑하는 것을 향해 있는 그 감동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 현실을 경험한다.
세포부터 전부 새롭게 태어난 듯한 그런 자기 자신이 된 감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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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놀게 해야 진화합니다."
인간사용설명서에는 앞으로 이러한 문구가 첨부되면 좋을 것이다.
놀려고 학교에 가고, 놀려고 출근하며, 놀려고 글을 쓰는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불교에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감성의 문제라고도 말할 것이다.
가장 완성된 수준으로 활동하는 사랑의 유기체는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