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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과 사람 그리고 깨달음

"백조 백수를 위하여"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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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사람을 벗어난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으로 사는 것에 반해,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즉, 약육강식의 당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동물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살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약육강식의 구조가 야기하는 생존에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 않기에, 곧 다른 사람에게 해침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구조를 모든 것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로서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게 될 때, 다른 동물을 해치고자 하는 필연적인 의도가 발생하며, 동일한 그 논리에 의해 자신도 해침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항시 노출되게 된다. 따라서 그 결과, 종국에는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더욱 강한 힘을 가진 동물이 되기를 꿈꾸게 된다.


이러한 동물적 논리로 깨달음을 이해하려 할 때 착각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깨달음이라는 상태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전능한 동물이 된 상태인 것처럼 간주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상대를 해칠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깨달음은 그러한 위력의 기각이다.


어떠한 것에 임의적인 힘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모습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바라보는(behold) 일이다.


그리고 바라보는 일은, 곧 바로 보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정견(正見)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은 이처럼 다만 바로 보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다. 태양빛 아래 선연한 저 얼굴이 결코 해침받지 말아야 할 가장 신성한 얼굴임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바로 본다는 것은 곧 사람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이 우주 어디에서나 사람을 찾아 보는 것이다. 아무리 깜깜한 우주 어느 곳에서라도 사람을 비추어 드러내는 것이다.


혹자들은 깨달음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깨달은 이가 있다고 한다면, 마치 그가 자기보다 더 강한 동물이라서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깨달음은 더 강한 동물의 논리가 아니다. 깨달음에 대한 두려움은 오직, 똑바로 보는 깨달음의 시선 때문이다. 그 시선 앞에서 자기의 연약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즉, 자신이 지금껏 강한 동물인 것처럼 의태하기 위해 전신을 위장해 놓은 그 모든 포장지가 벗겨지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이처럼 연약한 것이다. 언제라도 깨어지고 파괴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것이고 가장 섬세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따스한 것이다.


사람의 품은 그래서 그토록 다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보고, 그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깨달음이다.


이와 같은 사람의 면모를 실존철학에서는 유한자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자신과 같이 이 모든 것 역시도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이 모든 것에 다정해질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사람의 향기다.


"유한해서 사랑한다."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황금률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이해하기에, 상대의 보잘 것 없음에도 친절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더불어 살자고 하는 것이다. 결코 너를 해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황금률로 살아가는 대표적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모든 시간 속의 백조 백수들이다.


많은 이가, 더 강한 힘을 가진 동물로 성장하기 위해 전력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 이들은 쓸데없는 짓을 하며 시간을 하루하루 낭비한다. 다만 그 시간을 목도하며 매일매일 태양이 뜨고 진다.


그렇게 그들은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상냥한 오늘을 살아간다.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 시간을 하루하루 쌓아간다. 다만 그 시간을 목도하며 매일매일 태양이 뜨고 진다.


그리고 그 태양의 증언 아래 고이고이 쌓아진 시간이, 그들이 바로 사람임을 증거한다.


때문에, 더 강한 동물이 되어, 더 많은 이들을 해치며, 또 그 결과 자신 역시도 해침당할 것 같은 더 큰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되는 이들 앞에, 이 백조 백수들은 당당하게 할 말이 있다.


그래도 나는 사람이라고. 내가 망하더라도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온 땅의 백조 백수들은 그렇게 이미 깨달아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 백조 백수로 살아가는 목가적 삶을 찬미했다. 그들이 풍기는 사람냄새를 철학으로 묘사하고자 했다. 분명하게 실존철학자들은 모두가 다 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반한 이들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당위적인 율법이나 윤리가 아니다. 소위, 하기 싫은데 해야만 하는 숙제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서 가는 길이다. 내가 사랑하기에 가는 길이다.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가는 길이다.


사람,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영원한 연인의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백조 백수만이 온전하게 사랑한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다 이 백조 백수라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 곧 실존이며, 그 사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이 우주는 백조 백수를 위한 것이다. 그 고운 목소리를 위한 거대한 콘서트홀이다.


러브송은 영원하다.


태양이 다시 뜨고 진다.






Haruka Nakamura - Hel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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