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눈부시다"
삶은 진화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묘사한다. 변화의 핵심은 '다름'이다. 그리고 이 '다름'이라는 표현은 결국 다양성이라는 표현을 이끌어낸다. 다양성은 진화가 드러난 현상이다.
이 현상을 굳이 결과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정해진 보편적인 인과법칙으로서의 결과가 아니라, 임의적인 결과다. 동시에 이러한 결과는 또한 목적이 아니다. 달라지려는 목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살다 보니 달라진 결과가 생긴 것이다.
이 결과를 중립적 의미에서의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조는 마치 새의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듯이, 다만 그것이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한 현재의 상태의 이해다. 그리고 이 이해는 결과가 임의적인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언제나 임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한계 속에서 바라본 현상에 대한 것일 뿐, 결코 절대적인 보편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조를 보편적인 목적론으로 활용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여기에서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이제 복잡성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된다. 이로 인해, 복잡성은 추구되어야 할 목적으로 거듭난다. 애초 진화가 점점 더 복잡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니, 이 섭리를 능동적으로 취해 더 많은 것을 포괄하는 형태로 구조의 복잡성을 심화시켜야 하는 지상과제가 생긴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보편적인 인과법칙으로 상정되는 구조에, 이제 인간의 입장에서 지향할 수 있는 합리적인 목적성까지 부여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조의 위상은 인간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진리법칙인 것처럼 정립된다.
이처럼 구조에 목적론적인 방향성을 부여해, 임의적인 결과인 것을 보편적인 목적인 것으로 말함으로써 얻는 이득은, 과거에 대한 합리화와, 현재에 대한 통제이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며, 동시에 그로 인한 불안의 감소다. 곧, 자신의 전능감과 안전감을 동시에 확보시켜 줄 수 있는 힘의 증진이다.
분명하게도 힘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 의지로 인해, 현상에 대한 이해는 일방통행의 인과론이 되고, 또 인과론은 숭고한 목적론으로 뒤바뀐다. 그리고 그 목적론을 이 우주의 보편적인 설계도처럼 삼아, 인간과 세계의 모습은 그 설계도를 따라야 한다고, 또는 따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곧, 목적론은 다시금 인간에게 적용되는 당위의 윤리론으로 둔갑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세상은 복잡성을 그 동력으로 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이 구조는 더욱더 복잡해지려는 목적을 향하니까, 우리 모두는 그 목적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나가며 나날이 복잡하게 사는 것이 올바른 진리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와 같이, 인과론이 목적론으로, 또한 그 목적론이 윤리론으로, 수차례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들며, 하나의 진리담론으로서의 통합적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즉, 하나의 진리담론을 통해 모든 통시와 공시를 다 설명하려고 하는 통합주의를 만들어낸다.
이 통합주의를 구성하는 통합적 세계관, 이것이 바로 '실존'과 대비되는 그 맥락으로서의 '구조'라는 표현의 함의다. 곧, 본질적 진리처럼 상정되는 구조의 함의다.
이러한 함의를 가진 구조는 오직 단 한 가지만을 위해 기능한다. 그것은 바로 힘이다. 전술한 것처럼, 구조를 꿈꾸는 이들이 가장 얻고 싶어하는 그것이다.
물론 니체가 말한 것처럼, 생명은 힘의 증진을 향해 나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힘을 확장하고, 또 그 확장된 힘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힘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인간도 생명이다. 때문에 인간 또한 자신의 힘을 소비하는 일에서, 즉 자신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힘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서 충족감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 충족감을 얻기 위해 인간은 더욱 많이 자신의 힘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소비되는 힘의 크기는 충족감의 크기와 비례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충족감이라는 표현이 이미 암시하듯이, 힘은 행사되지 못하면 오히려 결핍감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결핍감은 쫓기는 듯한 조바심과, 갑갑함, 불만족스러움, 짜증 등으로 형상화된다. 힘이라는 표현을 욕망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이러한 이해는 명료해진다. 우리는 욕망을 쫓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욕망에 쫓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이 가장 큰 힘을 쓰게 될 때는 바로 번식기때다. 번식기에 든 동물의 모습을 보면, 이 힘에 쫓기는 상태가 잘 드러난다. 번식대상을 찾아 성공적으로 번식행위를 이룸으로써 자신의 힘을 소비하지 못하면, 그 개체는 커다란 불만족 속에서 고통받게 된다. 이처럼 힘에 대한 생명의 본능은 명령과도 같다.
"가서 힘을 써라. 더욱더 힘을 써라. 네 자신을 망쳐서라도 힘의 소비를 달성해라."
그리고 인간은 항시 번식기에 있는 동물이다. 때문에 인간은 늘 이 힘에 쫓기는 상태에 위치한다.
우리가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생명의 본능 때문이다. 동시에 권력, 돈, 인기, 지식, 이성 등, 우리가 힘을 쓸 번식의 대상을 끝없이 추구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 생명의 본능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생명이 힘을 소비하고자 하는 본능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곧 구조다. 구조는 힘의 증진과 소비에 최적화된 것이다. 그 구조가 복잡성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윤리의 기제로 작동하기까지 한다면, 이 힘의 증진과 소비의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복잡할수록 더 힘이 요해진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구조로부터 실제로 우리는 협박을 받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기실현, 민주시민의 권리, 역사적 사명 등의 외연적 표현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실질적인 그 내용은 협박이다. 구조 속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힘을 소비하는 것이 마치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 것처럼 우리에게 종용됨으로써, 결국 우리는 힘을 소비하지 않으면 잘못된 존재가 된다는 암묵적인 협박을 받는다.
그리고 그 협박의 성공적인 결과, 우리가 끝내 더 소비하게 되는 힘을 구조는 수집한다. 그럼으로써 구조 자체를 존속시키고, 더 복잡한 형태로 확장하며, 그 영향력을 강화한다.
이를테면, 구조를 위한 힘의 증진과 소비를, 곧 번식을 포기하는 나홀로족들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지탄과 교화의 대상이 되는지를 살펴보면 이 점은 명확해진다. 구조는 그러한 이들을 생존경쟁에 낙오한 부적격자로 규정하며, 그래도 그 부적격자가 다시 구조 안에 편입되어 구조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우리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라며 흡사 휴머니즘에 입각한 구원자처럼 행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구조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나홀로족이라는 사실만을 시사한다. 구조는 번식을 포기하고 구조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나홀로족들을 가장 경계한다. 그들로부터는 도저히 힘을 수집할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끝내 구조는 차라리 이들을 박해하게 된다. 구조를 증오함으로써, 바로 그 증오의 방식으로 구조를 향해 그들이 힘을 투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구조는 구조의 위나 아래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른쪽이나 왼쪽 또한 신경쓰지 않는다.
구조의 위에 위치한 상류층의 지지도, 구조의 아래에 위치한 하류층의 원망도, 구조에게는 단지 동일한 힘일 뿐이다. 지지나 원망이나, 그저 열광적이고 거세기만 하면 된다. 더 큰 힘이기만 하면 된다. 또한 구조의 오른쪽에서 현재의 구조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나, 구조의 왼쪽에서 더 나은 구조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나, 그저 구조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일한 의지일 뿐이다. 지속이나 변화나, 그저 더욱 뜨겁고 활발하기만 하면 된다. 더 큰 힘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구조의 양극화 현상이 생겨나는 그 이유다. 더 극단적으로 거리를 벌릴수록, 더 큰 힘이 촉발되는 까닭이다. 단순한 물리학이다.
구조의 위 또는 우측에 있는 이들은 구조를 열렬하게 변호함으로써, 그날 하루도 제대로 살았다며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구조의 아래 또는 좌측에 있는 이들은 구조를 열렬하게 공격함으로써, 그날 하루도 제대로 살았다며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둘은 동일하다. 다만 구조의 봉사자들일 뿐이다. 하나의 관계에서의 애정과 증오가, 그저 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만 작동하는 동일한 애증의 힘인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구조는 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리고 항시 번식기인 까닭에 자신의 힘에 치여 늘 힘들어하는 인간이, 그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 힘을 투입함으로써 그 힘을 해소할 수 있도록 촉진한다. 그리고 그렇게 소비된 힘을 구조는 수집하고, 그로 인해 구조 자체의 몸집을 불려간다. 점점 더 유력하고 당위적인 진리체계인 것처럼 자리잡게 된다.
"어떻든 힘만 많이 쓰면 편해진다. 하루를 제대로 산 것 같다. 조금 더 괜찮은 존재가 된 것 같다."라는 이 힘의 소비의 논리를 자극함으로써, 구조는 그 영향력을 강화해 가는 것이다.
베르자예프는 이러한 구조의 문제를 분명하게 노예의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구조를 위해 제공한 거대한 힘을 통해 만들어진 부산물로서의 작은 빵 한 조각을 구조로부터 얻어 먹으며, 그것을 자기실현이라고 말하는 그 모습을 바로 노예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노예란 결국 생명체로서의 자신의 본능에, 자신의 욕망에, 곧 자신의 힘에 쫓기는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 늘 욕구불만의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만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 구조가 제공하는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 무작정 끝없이 힘을 투여하게 되는 바로 그 모습이다.
그래서 구조는 노예를 사랑한다. 노예에게 최고의 수식어를 붙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명예는 언제나 노예의 것이다. 그리고 불명예는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돌아간다. 신적인 것으로 존립된 구조를 신봉하지 않으려는 그들은 분명 이단자(heresy)다.
선거철만 되면 투표를 강권하는 목소리들은, 이러한 이단자가 되지 말라고 하는 선교의 목소리들이다. 이 구조교의 신봉자들은 말한다. 그들이 지지하는 세력이 아니라 반대편의 세력에게 투표해도 괜찮으니, 투표만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구조의 봉사자들에게는, 그 구조를 이루는 어느 쪽이라도 강화함으로써, 구조 자체가 무너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하려는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화투판에서 언젠가는 자신이 이길 때를 꿈꾸며, 그 화투판이 자신이 이기기 전에 파하지 않게끔, 화투판에 계속 참가하는 것이 도덕적 권리이자 의무라고 사람들에게 종용하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단지 하나의 힘의 단위로 전락한다. 다만 구조에 힘을 제공할 뿐인 몰개성적인 단위로 소외된다.
어떠한 구조도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더 정확하게는, 어떠한 구조도 그 개인의 고유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조는 단지 그 개인이 소비할 수 있는 힘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힘을 구조에 제공해줄 개인은 유용한 가치를 띠며, 그렇지 않은 개인은 무용한 이단자로 평정될 뿐이다.
이 말은, 그렇기 때문에 구조는 결코 개인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구조에 힘을 투여해, 그 자신은 힘에 쫓기는 현실에서 조금 더 편해진 것처럼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보편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된 인간으로 하루를 산 것 같은 충족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어느 때고 불현듯 이 물음은 엄습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실존은 도래한다.
아무리 구조가 철벽의 방어로 봉쇄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이단의 목소리는 반드시 그 구조의 틈새를 뚫어내어 우리에게 당도한다.
이것은 바로 의미의 문제다. 이 의미의 문제가 개입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인과론이 뒤집히고, 목적론이 그 기반을 잃어 붕괴된다. 곧, 구조의 신적인 중요성이 해체된다.
아무리 구조 속에서 힘을 소비함으로써 충족감을 느껴도, 고유한 내 삶의 의미가 생겨나지는 않는다. 고유한 내 삶이 그 자체로서 빛나게 되지는 않는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생명체로서 갖는 번식의 기제에 따라 아무리 힘을 많이 소비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내 자신의 의미가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남들 다 사는 보편적인 모습처럼, 성공적으로 힘을 쓰며 살아가는 것 같아도, 정말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나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존은 생명의 본능을, 곧 힘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을 목적론적 구조에 종속시켜, 그 구조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서만 개인이 자신의 힘을 소비하게끔 하는 바로 그 맹목적 현실에 저항한다.
이를테면, 정신분석의 정치학적 내지 문화권력적 적용은, 이 구조를 목적론적 윤리로 활용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변증법도 이러한 구조의 목적론적 이해다. 이러한 접근들의 공통적인 함의는, 구조가 본질적인 것이며, 때문에 인간에게 건강하고 유익한 방식으로 더욱 구조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애초 이 구조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다. 아무리 구조를 붙잡고 씨름해도, 나라고 하는 고유한 개인은 결코 구원될 수 없다는 확고한 사실에서 출발했다.
때문에 실존의 입장에서, 구조는 나쁜 구조에서 좋은 구조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가 초극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구조 속에서 그 구조의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조의 밖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니체적이다.
그러나 이 구조의 초극은, 언뜻 초극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처럼 더 강도 높은 노력을 요하는 것 같은 일이 아니다. 즉, 더 힘을 소비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힘의 소비를 멈추는 것이다. 마치 자위하듯 열심히 힘을 쓴 뒤, 단지 그 힘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야기된 충족감을 잠시 느끼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금새 생겨나는 초조감에 몸을 맡긴 채, 다시 또 열심히 힘의 소비에만 몰두하는 그 반복의 현실을 멈추는 것이다.
곧, 구조의 초극이란, 힘의 소비에 최적화된 구조에 봉사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생겨난 여력을 이제 정말로 중요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나'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없다면 그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처럼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이 발견은, 현대의 위대한 전환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라는 경계를 명료하게 확립해낸 실존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초의 실존철학자를 논할 때, 혹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언급하기도 한다. "네 자신을 알라."라고 하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분명하게, 인간이 이해해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인간이 정말로 힘을 소비해야 할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그 일이라는 것이다.
자기이해는 자기구원이다. 실존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힘의 원리를, 이처럼 구조가 아닌 자기를 구원하는 데 쓸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곧, 생명체가 자기의 힘을 온전하게 자기를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실존이다. 이로 말미암아 온전한 자기를 개방해내는 것이다.
구조에 빠져,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힘을 소비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롤로 메이는 자기로부터의 도피라고 말한다. 이처럼 실존은 언제나 구조의 반대편에 우리 자신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다시 한 번, 의미의 문제를 시사한다.
구조는 애초 동물적인 것이다. 그리고 동물에게는 의미가 필요없다.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에게는 전체의 군집을 유지하기 위해 각 개체가 분담하는 역할과, 그 역할을 통해 효율적으로 소비되는 힘이 전부다. 그리고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동물은 이 구조를 향한 본능으로만 움직인다. 본능대로 움직여서 에너지를 소비하면, 그 충동이 해소됨으로써 충족되는 자극-반응의 기계적 논리다.
그러나 인간은 자극-반응의 기계 이상의 것이다. 인간은 본능의 충족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을 느끼며, 그로 인해 분명하게 의미를 지향한다. 그래서 의미에의 지향은 인간만의 고유한 현상이다.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인간만의 고유한 것인 의미로만 가능해진다.
우리가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 개인이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는 본능이 취하는 유용성과는 정반대편의 기제를 통해 개방된다. 그것은 바로 무용성이다.
생명의 본능은 더 많은 번식을 위해 가장 유용한 길을 택한다. 아주 쉽게 말해, 생명체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빈번하게 쓸데없는 일을 한다. 그렇게 무용성의 기제로 살아감으로써, 그 자신이 본능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쓸데없는 일을 할 때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모든 예술은 무용한 것이다. 그것이 무용한 까닭에, 예술은 인간이 대체 누구인지 인간 자신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알려줄 수 있게 된다.
본능과 사랑의 차이도 이와 같다. 언제나 그럴 필요 없는 일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받을 만한 유용한 가치가 없는 처절하게 못난 우리가 기적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것도, 사랑이 이처럼 무용한 것을 향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의미는 바로 이 아름다움과 사랑의 감수성을 통해 개방된다. 이것은 곧 온전함에 대한 감수성이다.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것은 거기에 더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때문에 완성된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언제나 쓸데없는 일을 한다.
바로 이렇게, 사랑은 쓸데없는 것을, 쓸데없이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모두 다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우리가 단지 본능에 따라 우리 자신을 끝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힘을 소비해야 할 필요를 끝없이 느끼는 것은, 결국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결핍의 문제를 시사한다. 영영 채워지지 않는 것만 같은 그 결핍감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정체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미완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생명에게 그것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이것이 바로 의미다. 그래서 의미는 언제나 귀한 말씀, 곧 복음과 같다.
은유적으로 묘사하자면, 끝없이 달리기를 하고 있는 생명에게 결승점을 제공하는 것이 곧 사랑이며, 그로 인해 더 유능한 달리기의 성취와 아무 관계없이 그 생명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곧 이미 온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곧 의미다.
만나질 때 모든 것은 멈춘다. 의미와의 만남 속에서 인간의 고군분투는 비로소 멈추게 된다. 모든 생명의 발버둥은 가까스로 멎게 된다. 그럼으로써 끝없이 힘을 소비해야 하는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온전히 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쉼으로 생겨난 여력을, 이제 정말로 중요한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된다.
반면, 목적론적인 구조는 완성을 위해 쉼없이 달려야 한다고 말한다. 목적론의 성립은 현재의 불완전함을 상정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때문에 그렇게 달리는만큼, 달리기의 주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결핍감만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될 뿐이다. 게다가 더 완벽한 구조를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달리고 있다면, 그 자괴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목적론적인 구조에 봉사하는 개인은 끝내 그 자신을 잃고 일개의 역할로 몰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구조에 위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구원이란, 전술한 것처럼, 개인이 그 자신의 고유성을 온전함으로 발견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 고유성이란 곧 다양성의 적격한 의미다. 구조-기계론적인 입장에서 다양성이 복잡성으로 묘사된다면, 실존-인간론적인 입장에서 다양성은 고유성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다양성을 복잡성으로 상정하고, 또한 이 복잡성을 합리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기까지 하는 구조의 입장 속에서는, 더 복잡한 구조를 창출하는 목적에 더 많은 힘을 소비하는 일이 마치 개인의 다양성을 담보해줄 것처럼 기대되겠지만, 그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구조의 심화와 그에 따른 개인의 자기상실일 뿐, 온전한 고유성의 발견은 결코 아니다. 때문에 구조에 위탁한 구원에의 기대는 언제나 좌절된다.
임의적으로 부여된 목적성을 거세하고 다만 우리가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것은 오직 현상이다. 다양성은 우리에게 그저 그렇게 드러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동시에 그것은 원인으로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성이 단지 결과로만 상정되는 일방통행의 인과론에서 벗어난다면, 이로 인해 생겨난 목적론적 변주 또한 자연스럽게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합목적적인 구조에 따라 우리 자신을 더욱 정교하게 완성시켜야 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고유하게 드러나 있다는 온전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곧, 우리는 보편적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각자의 모습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전술한 것처럼, 우리가 이처럼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 곧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바로 의미다.
그래서 실존과 구조의 문제는 결국, 이미 몸부터가 각자 다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그 '다름'을 이미 다른 그대로 완성된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그 '다름'을 극복하여 더욱 나은 '같음'을 추구해야 할 미완성된 것으로 보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실존은 이미 완성된 인간의 다름을 두고 바라보는 것이고, 구조는 아직 미완성된 인간의 같음을 두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구조의 통합주의는 분명하게 이 '같음'을 당위적으로 추구하는 의지를 내보인다. 서로 다른 것을 어떻게든 같은 구조 속에 집어넣기 위해, 일방적으로 잘라내고 덧붙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억지로 눕힌다. 구조는 보편적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그 폭력을 자행한다. 이처럼 구조에는 고유성을 말살하는 폭력의 가능성이 짙게 내포되어 있다. 때문에 구조 속에서 인간은 고통스럽다.
실존과 친밀한 이웃사촌인 선(禪)에서는 격외선(格外禪)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아주 쉽게는, 구조 속에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구조 내의 최정점의 위계적 상태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깨달음은 언제나 구조의 밖에 있다. 이 말은, 깨달음은 구조가 야기하는 고통의 밖에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힘을 소비해서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지는 없다. 붓다는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깨닫게 되었다. 즉, 인간은 불필요한 고통을 받아야 할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붓다는 이해한 것이다.
예수 또한 이 경계를 명확히 하였다. 광야의 시험에서부터 예수는 인간성을 동물성과 동일시하는 그 관점을 기각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은, 인간은 단지 본능에만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에 의해서 정말로 살아진다는 말이다.
실존상담의 한 분과인 의미요법(logotherapy)을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것은 의미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의미는 언제나 힘의 소비에만 몰두하게 하는 구조의 바깥에서 발견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의미는 우리가 가장 몰두하게 되는 가치의 바깥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의미는 가치의 바깥에 있다. 곧, 의미는 가치없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이며, 쓸데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쓸데없는 것이 바로 인간을 구원한다. 인간을 정말로 인간으로서 회복시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존재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곧, 실존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실존한다. 삶은 이 '다름'이 어떠한 결핍된 이유의 부산물이 아니고, 또 어떠한 고귀한 목적의 봉사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다름'이 다름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왔다. 곧, 삶은 언제나 그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존재의 온전함을 드러내왔다.
우리는 이것으로도 온전하고, 저것으로도 온전하다. 이것과 저것이 모두 공통적으로 구조에 봉사하는 숭고한 목적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무용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온전하다.
인간은 모두 나홀로족이다. 곧, 인간은 실존한다.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신 앞에 선 단독자'의 비유는 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가치없고자 하는 길이다. 그럼으로써 의미있고자 하는 길이다.
노예가 가치없어지면, 그 노예는 노예로서의 역할이 해지된다. 그렇게 노예는 가장 빠른 방식으로 자유를 회복한다. 장자도 말하듯이, 무용성은 자유의 근거다. 동시에 무용성은 그것이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반증이다. 유능한 기능적 역할로 그 자신의 온전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명백하게 쓸데없는 것인 그의 존재가, 그렇게 부정할 수 없이 사실적인 질량을 가진 그의 존재가, 이미 생생한 그 증명이다.
물론 이것은 두려움을 자극하는 위험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구조의 것이다. 모두가 나홀로족의 존귀함을 눈치채게 된다면, 그 즉시 붕괴하게 될 필연적인 운명 위에 놓여 있는 바로 그 구조의 두려움이다.
이처럼 구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실존이다. 아무리 거대하고 힘있는 구조라고 할지라도, 단 하나의 나홀로족이 구조 밖으로 향하려는 아주 작은 한 걸음 앞에도 구조는 심대한 두려움을 피할 길이 없다. 이것은 단 한 명의 인간이 그토록 대단하다는 역설이다. 단 하나의 '다름'이, 그 모든 보편적인 '같음'과 존재적 차원에서 대등하다는 의미다.
바로 이 인간의 온전한 위상의 회복이, 실존의 입장에서 굳이 표현하자면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전환이다. 부분에서 통째로, 기계에서 인간으로, 노예에서 자유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대한 결과를 이룬 것이 아니라, 원래의 출발점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것의 무용한 온전성을 알림으로써, 달리는 주체에게 제공된 결승점은, 이것이 사실 출발점이었다는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나는 남과 다른 나로서 이미 온전하다."
이 출발점에서부터 그 모든 삶이 비롯되었다. 그렇게 이미 완성된 것이 쓸데없는 짓을 해온 역사다. 오로지 바보처럼 사랑만 해온 역사다. 그래서 인간은,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존재다. 별처럼 쓸데도 없이, 다만 눈부신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