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가 전하는 공존의 실존
1947년에 출간된 카뮈의 『페스트』가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으로 대접받는 이유는, 세계를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망상은 철저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삶의 부조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은 생명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페스트는 박테리아에 의해, 즉 생명현상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소설 『페스트』는 이 생명현상에 맞서 싸움으로써, 끝내 생명현상을 인간의 힘으로 복속시키게 되는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다. 또는 생명현상을 굴복시키기 위해 인간이 연대하며 투쟁해야 한다는 주제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페스트』는 마치 정의를 자임하는 이들이 내세울 법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와 같은 슬로건이 너무나도 공허하고 무력한 목소리임을 첨예하게 묘사해낸다. 소설 속의 주요인물들이 어떠한 활약을 펼치든 간에, 그들이 이룬 소기의 성과로 인해 소설의 무대인 오랑시에서 페스트가 격퇴되는 것이 아니다. 페스트는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태풍이 자연발생했다가 스스로 소멸하듯이 그렇게 떠나갈 뿐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결국 카뮈의 이 작품이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철저한 인간의 주제파악이다. 인간은 생명과 삶, 세계를 통제하고 그것들을 주인처럼 부릴 수 있는 입장이 애초 아니라, 오히려 언제라도 그것들이 인간을 산산조각낼 수 있는 입장에 서있음을 이해하고 그에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카뮈의 입장에서 이 겸허함은 역설적으로 반항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운명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의도의 반항이 아니라, 운명을 수용함으로써 그러한 운명조차도 품을 수 있는 인간의 거대한 존재감을 개방하려는 의도의 반항이다. 이것은 니체의 '운명에 대한 사랑(amor fati)'과도 맥을 함께한다. 이는 또한 대부분의 실존철학자들이 운명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주된 방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카뮈가 주요하게 제안하는 참여(engagement)라는 개념도 이러한 성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고작 정치적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연대를 통해 더 많은 선한 힘을 모아 사악한 장애물을 극복해나가자는 식의, 정의의 용사를 꿈꾸는 골목대장 놀이의 개념이 아니다.
참여는 바로 당사자 의식이다.
이 당사자 의식은 결국 "나도 죽는다."의 자각이다. 페스트와 같은 생명현상에서 그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죽음의 실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뮈가 『페스트』에서 애정을 담아 묘사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 이 당사자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멀찌감치 벗어난 죽음의 방관자나, 죽음 위에서 내려다보는 죽음의 승리자처럼 굴지 않고, 정직하게 죽음을 받아들여 살아간다. 자신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더 섬세하고, 더 열정적으로, 더 자신을 나누며, 깨어난 삶을 살아간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의 자각이 곧 삶의 자각이 된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살지도 못한다. 당사자 의식이란 곧 죽는 것도 나고, 사는 것도 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당사자 의식을 실존철학에서는 주체성이라고 말한다.
이 삶은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나의 일이다. 때문에 삶이란 남에게 위탁해서 해결을 꿈꾸어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오로지 내가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카뮈가 그의 소설에서 '신 없는 세상 속의 성자(聖者)'로 암시하는 인물들은, 이처럼 페스트라고 하는 현상으로서 그 자신의 앞에 주어진 삶을 독대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이 오롯한 그 자신의 삶임을 알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 그에 응답하려는 인물들이다.
때문에 신이나 왕, 군주와 같은 지도자에 의해, 나의 삶이 좌우될 수 있다는 환상은 카뮈에게서 철저하게 기각된다. 이를테면, 지도자가 더 좋은 통치를 했더라면 내 자신이 더 안전할 수 있었다거나, 반대로 지도자가 제대로 처우하지 못했기에 내 자신이 더 위험해지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카뮈에게는 단지 주체성의 상실을 의미할 뿐이다.
지도자가 오롯한 나의 삶과 죽음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지도자를 일정 부분이라도 마치 신처럼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처럼 신으로 상정된 지도자에게 힘은 집적된다. 개인들이 그 자신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써야 할 고유한 힘은, 이러한 믿음의 기제를 통해 지도자에게 상납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힘을 상실한 개인은 더욱더 현상 앞에 무력감을 느끼게 되며, 그 결과 지도자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소위 말하자면, 지도자가 적격한 신의 자격을 갖추었는가 또는 못갖추었는가의 문제만이 이제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해지며, 지도자의 신성을 지지하거나 또는 배척하기 위한 온갖 소모적인 행위에만 그의 힘은 투입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도자가 나의 삶과 죽음의 고유한 의미에 조금이라도 개입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 동의하고 있는 한, 그러한 개인은 지지를 통해서도, 또 반대를 통해서도, 그저 그 지도자에게 그 자신의 힘을 공급하게 될 뿐인 셈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지도자는 아주 빈번하게 찬반을 다 아우르는 황희 정승과 같은 형상을 보이게 된다. "얘 말도 옳고, 쟤 말도 옳구나."와 같이, 마치 대립하는 아이들을 인자한 웃음으로 다 포용하는 것 같은 형식을 취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지도자는 자신이 그 모든 대립을 포괄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그 대립이 만들어내는 힘을 효과적으로 수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공된 힘을 통해 가장 높은 자로서의 여유와 관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립구도에 대한 이 포괄자적 입장은 사실 죽음에 대한 방관자로서 위치하고자 하는 의도가 만들어낸다. 즉, 가장 죽고 싶어하지 않는 이가 황희 정승이 된다. 자신은 대립이 야기하는 갈등에서 비껴선 채, 곧 잠정적인 죽음의 위협에서 철수한 채, 다만 그 갈등이 만들어내는 힘만 취함으로써 삶을 존속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기만이라고 명명한다. 기만은 곧 당사자 의식의 결여다. 그리고 당사자 의식이 결여된 이일수록, 문제의 밖으로 빠져 그 문제를 대상화하고, 또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만이 충만해진다. 그러나 이 해결에의 의지는 아무리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참여가 아니다. 참여는 곧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필요한 이해는,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한 것이다.
지도자도 죽는다. 그에게는 그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 임의적으로 다룰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없다. 따라서 그러한 지도자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그 어떤 삶과 죽음의 문제도 없다. 지도자에 대한 기대는, 그것이 긍정적인 기대이든, 부정적인 기대이든 간에, 단지 지도자를 위해 힘을 제공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도자는 마치 바이러스와도 같다. 이 표현은 분명 극단적이지만, 그 의미는 심히 사실적이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차이는, 박테리아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단독으로 증식할 수 있는 반면, 바이러스는 반드시 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에 기생해야만 비로소 생명활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다. 곧, 숙주로부터 힘을 얻어야만 하나의 생명으로서 그 자신의 삶을 존속시켜나갈 수 있다. 이것은 지도자의 모습과 분명하게 동일하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는 2019년에 시작된 코로나의 문제로 옮겨 온다.
바이러스는 그 기생성 때문에 박테리아보다도 더 악착같다. 무생명에서 생명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열망은, 끝없이 더 많은 숙주를 만들고자 하는 동력이 된다. 이것은 마치 변두리에서 아무 관심도 못 받은 채 죽은 듯 있던 주변인이, 하나의 기회를 통해 인기를 얻음으로써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끼게 되자, 이제는 더욱더 인기를 추구하며 그 생생한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과도 같다.
인간은 모두 죽기 싫어한다. 한 번 얻은 삶을 그 손에서 놓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무생명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 그 생명을 포기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또한 엄연한 생명현상이며, 때문에 인간이 그에 맞서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심지어 바이러스의 성질과 같은 지도자가 바이러스를 없애고자 하는 일은 완벽한 자기모순에 봉착한다.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지도자의 특정한 역량에 위탁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바이러스의 통제에 대한 현실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통제가 아니라 공존이다. 이 바이러스가 하나의 생명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것와 어떻게 공존하는가의 문제다.
그러나 이 말은, 멀리 구름 위에서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가는 속세를 내려다보며, "껄껄, 생명과는 공존해야 하는 법이거늘."이라고 세상 초탈한 황희 정승의 미소를 담아 선포하는 팔자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공존은 수용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수용은 무엇인가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아픔을 수용하는 것이 수용의 정확한 의미다. 곧, 수용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든, 그 환경으로 말미암은 바로 나를 상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로 수렴하는 것이다.
나는 괴롭다. 서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에게 죽음의 책임을 돌리며, 그 결과로 인해 오로지 지도자에게만, 그리고 바이러스에게만 다시 힘을 제공하게 되는 이 현실이 너무나 괴롭다.
지도자는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없고, 나는 지도자와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생명의 본능을 통제할 수 없다.
다만 나는 그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반항한다. 지도자와 바이러스에 의해 야기된 그 어떤 통제된 환경 속에서도 내 삶과 죽음의 의미만은 결코 넘길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지, 그 삶의 방식만은 오롯이 내가 결정할 것이다. 나는 나로 살고, 나로 죽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카뮈가 제시하는 인간상이다. 반항하는 실존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참여, 즉 공존, 즉 수용의 의미다. 이 모든 삶과 죽음의 현상이 빚어낸, 바로 나의 의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전지구적인 바이러스의 열풍 속에서, 첨단의 문명으로 보호받아온 인간에게도 죽음을 상기시키는 이 원초적인 징후 앞에서, 이처럼 나를 부르짖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나의 삶이 밀려와 다른 하나의 죽음을 만들 때, 인간은 다만 파도에 휩쓸려가는 나뭇잎이 아니라, 이것이 나라고 외친다.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는 바로 이것이 나라고 외친다.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는 바로 그것이 나다. 내가 그렇다. 나도 그렇다. 이것이 당사자 의식이다.
타인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사자 의식을 가진 이가, 곧 주체성으로 사는 이가, 정말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추상적인 동정심 속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안타까워하며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아픔을 자기 살처럼 느낀다.
그래서 "나도 죽는다."라는 해결될 수 없는 사실에서 비롯한, "내가 죽듯이, 너도 죽는다."라고 하는 공감은 결코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공감은 해결 아닌 해결을 가능하게 한다. 공감 속에서, 통제를 위해 쓰이던 힘이, 이제 이해를 위한 힘으로 전환될 수 있게 되는 까닭이다.
이 이해의 핵심은 무엇일까?
지도자도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며, 조금 희극적인 묘사지만, 바이러스도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죽음 앞에 선 당사자라는 것이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이 사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연대다. 그래서 연대는 곧 삶을 향한 공존의 의미다. 당사자 모두가 살아남자는 것이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지도자도 살고, 바이러스도 살자는 것이다.
때문에 연대는 적을 상정한 뒤, 그 적 앞에서 우리편만 힘을 합쳐 살아내자는 집단패싸움의 원리가 결코 아니다. 또는, 마치 문제처럼 설정되는 적폐의 세력을 정의의 힘으로 척결해서 청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마녀사냥의 논리 또한 결코 아니다.
연대의 핵심은, 곧 적과 연대하는 것이다. 적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죽음 앞에 시름하는 상대로 정확하게 공감하면서, 바로 그렇게 함께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카뮈의 가장 위대한 반항은 실현된다. 적이 없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하는 오랜 약육강식의 법칙에서 벗어나, 인간은 이제 그의 적조차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인간의 눈을 띄운다. 그럼으로써, 애초 적이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보게끔 만든다.
적이 있었던 적이 없다. 다만 아픔이 있을 뿐이었다. 사랑했던 것들의 죽음과 상실로 인한 아픔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이 적을 만들었다. 그렇게 아픔의 원인으로 설정된 그 적을 제거하면 아픔 또한 제거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끝없는 적과의 투쟁을 시작했다. 하나의 적이 사라지면, 거듭해서 또 다른 적을 만들고, 끝내는 자연현상마저도 적으로 만들며 정의의 용사로서 사투를 벌여왔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적을 꿈꾸는 이들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격전지로 몰아넣어왔다. 평화로운 도시를 끝없이 전쟁터로 만드는 어벤져스들처럼, 모두를 죽음의 이름으로 협박하여 인질로 삼아 전쟁을 종용해왔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정의라는 언표로 사람들로부터 힘을 수집해 사람들의 구원자인 것처럼 행세해왔다.
사악한 외부의 적을 설정해, 그 적을 규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내부의 구성원들로부터 힘을 축적하는 이 방식은, 전형적인 컬트종교의 기제다. 그래서 컬트종교끼리는 늘 투쟁한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공박한다. 자신의 아픔을 소외하는 것이, 상대의 아픔을 증진하는 것이 된다. 당사자 의식이 부재한 것이, 모두를 자기 대신에 당사자로 만든다.
그래서 컬트종교적 현상에는 언제나 음모론이 동반된다. 컬트종교 자체가 음모론으로 성립되거나, 음모론이 컬트종교를 지지한다. 모든 음모론의 핵심은 "반드시 적이 있다."이다. 이처럼 적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마치 사악한 투명인간을 묘사하듯이 어떻게든 적을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정치에는 반드시 적이 필요하다고 말한 정치공학자 칼 슈미트에게 충실한 이야기다.
나치만이 슈미트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의 어벤져스들이야말로 열렬한 슈미트의 지지자들이다. 이것은 정치공학이다. 곧, 공학적 게임이다. 게임을 계속 즐기기 위해서는 참가자가 있어야 한다. 맞고를 즐기기 위해서는 반대편에 적으로 상정될 상대가 꼭 있어야 한다. 이렇게 끝없이 적을 설정해서 게임을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게임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망각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모든 컬트종교에는, 모든 정치공학적 음모론에는, 반드시 아픔의 망각이 있고, 당사자 의식의 소외가 있다.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희생양이 만들어진다. 이 공학적 게임에 의해 설정된 적은 대표적인 그 희생양이며, 동시에 그 희생양을 적으로 보도록 종용되어 증오와 함께 돌을 던지게 된 이들 또한 희생양이다.
때문에 정말로 인간을 인간으로서 죽게 만드는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수는 있겠지만, 인간을 인간으로서 죽게 만드는 것은 적에 대한 증오다. 증오 속에서 인간은, 너와 더불어 사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에 따라, 정말로 나를 죽이는 것은 적이 아니다. 적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을 만드는 자들이, 그럼으로써 증오를 촉진하는 자들이 나를 죽인다.
즉, 당사자 의식으로부터 도망쳐 결국 타자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 이들이 끝없이 적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자신의 아픔을 망각해보려는 그 기만적인 의도로 말미암아 펼쳐진 끝없는 증오의 전쟁 속에서 무고한 나의 죽음이 양산된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나를 정말로 죽이는 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바이러스를 격퇴하는 입장처럼 행세하고 있는 어벤져스라는 것이다. 곧, 어벤져스가 적폐로 규정한 그 적이 아니라, 어벤져스가 정치공학으로 만들어낸 그 끝없는 전쟁터가 나를 죽인다.
이 정치공학적 맞고판에는 자기 자신을 어벤져스라고 간주하는 이들이 서로를 마주하여 착석한다. 그리고 상대를 바이러스로 보며 박멸의 게임을 펼친다. 이처럼 어벤져스가 곧 바이러스다. 상대를 패배시키고 임의적인 우리편을 영광의 승리로 이끌려는 정의의 지도자가 곧 바이러스다. 전술한 것처럼, 정의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힘을 수집해야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지금의 이 현실은 나의 몸을 두고 복수의 바이러스가 다투고 있는 상황과도 같다. 그 바이러스들 중 가장 온화한 것은 사실 코로나 바이러스다. 적어도 이 자연적 바이러스는 자신이 어벤져스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을 적으로 두고 증오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공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죽음을 바라는 악마가 아니다. 인간과 똑같이 공존을 꾀하며 살아남고자 하는 생명현상이다. 인간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힘들듯이,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도 인간을 만나 힘들다고 말한다면 이는 희극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 희극에는 적어도 인간이 사악한 악의 세력 앞에 일방적으로 무력하기만 한 희생자는 아니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카뮈가 인간을 보다 고귀한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담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의미다.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인간이 늘 피해의식에 시달려야만 하는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적이 인간을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을 만드는 이들이 인간을 적 앞의 잠정적인 희생자로서 위치시키게 된다.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분명한 사건이다. 나라는 것이 대체 누구인지를 찾아 묻는 사건이다.
나는, 어벤져스들이 만들어내고 죽음에의 협박으로 조장하는 정치공학적 게임판 위에서, 어벤져스들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고 믿으며, 그 어벤져스들의 논리에 따라 설정된 적에게 증오로 돌을 던지며 오직 나와 같은 희생자만을 양산하는 무력한 희생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반드시 적이 있다."라고 하는 증오의 게임의 규칙에 반항함으로써, 내 주위를 둘러싼 이 모든 필멸할 것과 함께 공존을 꿈꿀 수 있는, 그렇게 그 모든 것을 나와 같이 다 살리고자 하는 가장 넓은 가슴을 가진 자인가?
곧, 나는, 신 없는 세상 속의, 지도자 없는 세상 속의, 어벤져스 없는 세상 속의 성자인가?
그렇게, 나는, 공존을 꿈꾸는 실존인가?
그 어떤 너라도, 바로 그러한 너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나인가?
아무리 적으로 상정되는 너라도, 네가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하며 소외된 채 죽지 않기를 꿈꾸는, 너를 또 볼 수 있기를 꿈꾸는, 바로 그러한 나인가?
이것이 1947년의 페스트로도, 2019년의 코로나로도 늘 인간에게 되물어지고 있는 질문이다. 바로 나의 의미를 향한 질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특정지역의 문제가 아니고, 특정단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굳이 문제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연현상마저도 적으로 설정해 정치공학적 게임을 구성하고자 하는 어벤져스의 문제다.
그렇게 인간이 소외되는 문제며, 바로 그 소외라는 문제로부터 회복되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마치 그 자신이 잘못된 병균과 같은 문제로 규정되는 일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신성한 몸짓이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것처럼,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다. 그리고 그 절규가 소리를 갖게 되었을 때, 그 이름은 반항이 된다.
이처럼, 반항하는 인간의 원형은 소리지르는 인간이다. "나도 죽는다."라며 아프다고 소리지르는 인간이다. 그 소리가 언제나 인간 자신을 깨운다. 적과 싸우는 동안에는 자신만은 안죽을 것처럼 굴고 있는 정의의 기만으로부터 인간을 깨우고, 또는 죽음이 뭐가 두렵냐며 쫄지 말라고 자신만은 안전한 성채 속에서 일갈하는 소영웅주의의 기만으로부터 인간을 깨운다.
밖의 적을 막기 위한 마스크는 동시에 안의 그 자신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외적인 죽음에의 협박으로 내적인 소망을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스크는 임시적인 일회용품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 깨어나고자 내는 목소리를 영영 봉쇄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영원한 소망을 결코 차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한 번, 특정지역의 문제가 아니고, 특정단체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는 어벤져스의 문제도 아니다. 그 무엇도 자연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 신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나의 문제다. 곧, 이것은 나의 아픔이다. 나는 외적인 방관자도, 비난자도, 또는 해결자도 아니라, 오로지 내적인 당사자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소망이다. 너와 내가 함께 아프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나의 오롯한 소망이다.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은 가장 인간다운 소망이다. 카뮈가 시공을 넘어 전하고 있는 간절한 그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