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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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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든 것을 다 바쳐 해오던 것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좌절이라고 말한다. 그 좌절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안개처럼 짙게 깔린 무기력감 속에서, 다만 마지못해 연명을 위한 활동만을 이루며 살게 된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랑의 실연과도 같다. 그래서 모든 좌절은 곧 사랑의 좌절이다.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일에 젊음을 다 바친, 그렇게 영화를 사랑해왔지만 끝내 그 사랑을 실연하게 된 이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모든 실연의 이유는 언제나 단 하나다. 많은 사연들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실연의 이유는 단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바로 소유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소유의 문제다.


우리는 사랑을 향한 우리의 노력만큼, 그 사랑에 대한 소유권이 생기는 것처럼 간주한다. 그래서 사랑이 우리의 손에서 빠져나가게 되는 일이 너무나 당혹스럽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열심히 우리의 손으로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일과도 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모든 노력이 배신당한 것만 같고, 그래서 외롭기 이를 데 없다. 사랑이 없는 이 공간은 그저 적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알게 된다.


우리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벽돌로 지은 이 집에서 사랑을 쫓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쫓아낼 의도가 결코 없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지키기 위해 튼튼한 집을 짓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저 우리는 몰랐던 것뿐이다. 그 어떤 집도, 사랑에게는 그 날개조차 다 펼칠 수 없는 감옥이라는 사실을, 때문에 사랑을 임의적인 형식 속에 소유하려고 하는 한, 사랑 또한 아픔으로 우리에게서 떠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정말로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가 알려진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했던 것, 그것은 바로 삶이다.


다른 어떤 대상이 아니라 오직 삶이었다. 영화 등과 같은 그 모든 매개적 대상은 다만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특정한 방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삶을 향한 매개적 대상을 사랑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결국 소유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영화에 삶을 바쳐왔다는 것은, 영화라는 대상 속에 삶을 투입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영화라고 하는 형식, 곧 임의적인 벽돌집 속에 가두어지게 된다. 나아가 그 벽돌집만이 우리의 모든 삶이라고 선언되기까지 할 경우, 즉 삶이 고작해야 그 작은 벽돌집의 크기로만 축소될 경우, 삶은 그 자신의 크기를 회복하고자 반드시 벽돌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표현 그대로, 살기 위해서, 삶이 삶이기 위해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은,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으로 묘사되듯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그것이 가장 온전한 삶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영화라는 대상이 아니어도, 삶은 지금의 그 어떤 대상으로도, 더욱 자유롭게 그 면모를 펼쳐낸다.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개방해낸다.


삶은 이처럼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였던 셈이다. 이는 영화에서의 직접적인 대사로도 묘사된다.


"내 것으로 가지지 말고, 친구로 지내면 안되나요?"


삶이라는 것이 애초 임의적인 형식으로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면모로 드러나 다만 우리의 친교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하나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것은 실연한 자에서, 더욱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자로의 전환이다. 그래서 하나의 전환이지만 모든 전환이다.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특정한 대상의 형식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로 인해 그 형식이 좌절되면 자신에게서 사랑 또한 영영 끝나게 된다고 믿으며, 그렇게 실연의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방치하고만 있던 영화 속 주인공은 이로써 전환된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궁금해졌어요."


그 자신이 처한 그 모든 삶의 환경에서, 그 모든 삶의 조건을 통해, 그 모든 삶의 형식으로, 무한하게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랑에의 탐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곧,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을 향해 이제야 정확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또,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떠나간 사람은 비록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돌아온다. 떠났을 때보다 더 커다란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랑을 다시 찾은 이는, 바로 이 사랑의 커다란 모습을 그 순간 눈치채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은 결코 소유될 수 없기에 자신이 만든 작은 집을 떠난 것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그렇게 자신이 만든 작은 집을 떠난 사랑이 바로 자신이 만든 작은 집을 더 크게 감싸며 자신의 가장 곁에 늘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자신이 그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기에 그 작은 집을 감싸고 있던 더 큰 사랑을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사랑을 아름답게 지켜야 했던 것이 아니다.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지키고 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사랑을 소유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에 소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사랑받고 있었는가의 이해다. 이것으로도 사랑받고, 저것으로도 사랑받는, 참 복도 많은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다.


그리고 이 이해 속에서 작은 벽돌집도 부활한다.


벽돌집의 안이 아니면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벽돌집이 사랑 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벽돌집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 그녀가 그렇게 영화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집보다 더 크게 벽돌집을 사랑하고, 영화보다 더 크게 영화를 사랑하는 삶을 펼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밝힌 그 삶의 빛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더욱 환히 비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무엇인가를 가득히도 사랑할 수 있다니, 다시 또, 더욱더 사랑할 수 있다니, 참 복도 많은 삶이다. 산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그러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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