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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대에게

"결코 가릴 수 없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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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지금은 우울의 시대다. 그대를 가리는 마스크와 함께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우울이다.


그대에게 우울은 흡사 감옥에 갇힌 상태와도 같다. 자기표현이 봉쇄된 상태다. 자기가 가려진 상태다. 그래서 화가 나지만, 그 화조차도 쉽게 표현할 수 없이 더욱더 억압된 상태다. 아주 단순하게는, 화가 계속 눌린 상태가 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울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은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는 가장 쉬운 길은 잘못한 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대가 정당하게 화낼 수 있는 잘못한 자를 만들어서 그에게 화를 내면 우울감은 다소 감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임의적인 우울의 해소법에 따라 잘못한 자는 계속 생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를 악하게 규정하고, 그 악한 존재에 대해 잘못을 가려 심판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희생양을 만들어 자신의 복지를 꾀하려는 약육강식의 문제다.


이 우울의 시대 속에서는, 정말로 사악한 세력이 있고, 또 그에 대응되는 정말로 정의로운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여, 정말로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그저 전부 다 똑같이 우울한 이들만이 있다. 그늘처럼 가려진 이들만이 있다.


하나의 우울한 이가 다른 우울한 이에게 화를 냄으로써, 그 자신은 우울의 그늘에서 벗어난 건강한 존재를 꿈꾸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힘을 합쳐, 부정적인 것을 몰아내고 더 건강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그가 바로 가장 우울한 이다. 가장 우울하기에, 가장 건강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은 가장 건강한 것을 꿈꾼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벗어나려는 노력을 가할수록 더 우울해진다. 감옥에 갇혀 창살을 계속 구부리려고 힘을 줘봤자 더 우울해질 뿐인 그 현실이다.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문제로 규정해 아무리 그에게 화를 내봤자, 실제로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이 우울의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어떠한 이가 자연재해를 일으킨 이라고 간주하며 그에게 모든 고통의 책임을 돌린다고 해도, 화산의 분화가 멎고, 토네이도가 사라지며, 쓰나미가 멈추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이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키면 비가 올 것이라는 원시적인 믿음이다. 곧,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이 있으며, 악한 세력 때문에 우울이 생겨나니, 악한 세력을 제거하면 우울도 제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술적 사고다.


그대여, 모든 주술적 사고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기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내 잘못이다."이다.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즉 벌을 받는 것이며, 그래서 감옥에 갇히는 것이라는 그 자책의 믿음이다. 그리고는 그 자책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대신 잘못을 사할, 즉 표현 그대로 자기 대신 속죄할 잘못한 존재로서의 희생양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감옥은 잘못한 자를 가리는 곳이다. 그대는 또한 감옥에 갇힌 그대 자신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이처럼 그대와 똑같이 감옥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더욱 잘못한 이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애초 가릴 수 없는 것을 가리고자 한 것이다.


그대여, 그렇다면 이제 정직해볼 수 있다.


감옥을 만든 것은 대체 누구인가?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의 착각이 감옥을 만들었다. 그대가 받는 고통은 그대의 잘못에 따른 벌이라고 하는 주술적 믿음에 따른 착각이, 그대 자신을 감옥에 갇혀야 할 잘못된 죄인으로 규정하게끔 했다.


화는 아주 단순하게, "으악, 아프다!"라고 하는 원초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 아픔을 벌로 생각하는 한, 그것은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시끄럽게 떠들면 더 큰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이 봉쇄된 그대는 우울해진다. 말하지 못하도록 채워진 마스크 속에서 그대는 점점 더 우울해진다.


그대에게 마스크와 함께 주어진 것은 분명하게 이 우울이다. 그대가 잠정적인 죄인이라고 하는 이 무거운 낙인감이다.


그대여, 그러니 그대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이해만이 그대를 이 우울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다. 그대는 죄인이 아니다. 그대는 이 세상을 망친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대는 마치, 감기에 걸린 그대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물론 그대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그대는 죄인이기 이전에, 먼저 아프다. 그대는 그냥 아픈 이이지, 잘못한 이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픈데도 남을 걱정하고 있는, 대단히 상냥한 이이기까지 하다.


우울은 그대가 잘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잘못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생긴다. 즉, 그대가 그대 자신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생긴다.


마스크는 그대가 병균같이 잘못된 존재라는 죄인의 증거가 아니라, 다른 이를 지키고 싶다는 그대의 상냥함의 증거다.


그렇게 그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정확한 사실을 이해하면, 그대는 이제 또 다른 정당한 사실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대여, 그대가 잘못하지 않은 만큼, 그대가 잘못한 존재로 간주하던 그이 또한 잘못하지 않았다. 그대의 귀에 듣기 좋았던 말을, 그대는 그이의 귀에도 좋게 들려줄 수 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대도, 그이도, 이 세상의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날이 추운, 이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정말로 우울의 현실을 끝나게 해준다.


잘못이 아니라 아픔이었다.


화는 이것이 아픔임을 기억하라는 신호다. 때문에 화가 눌린 것이 우울이라는 말은, 곧 아픔이 망각되어 가려진 것이 우울이라는 말이다.


그대여, 그래서 그대의 아픔을 다시 이해하는 그대의 상냥함이 우울의 감옥을 열어주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잘못한 죄인처럼 감옥에 갇혀 스스로를 자책하고, 상대를 원망하는, 이 모든 우울의 시대의 비극이, 아픔을 알아보고 그에 친절한 그대의 시선 앞에서 비로소 멎게 된다. 죄인들이 이제야 바위를 내려놓고 쉬게 된다.


우울 속에서도, 감옥 안에서도, 죄인이 되어서도, 결코 가릴 수 없는 그대의 눈빛만이 마스크 위로 부드럽게 빛난다. 이 시대를 가득 담아내는, 가장 아름다운 그대의 자기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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