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아리 애스터
만화 『원피스』에서 우리는 저 유명한 대사를 듣는다.
"찾아라! 이 세상 전부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봐라! 이 세상 전부를 여기에 담아 왔으니!"
아리 애스터는 최고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재능은 갖고 있지 않으나,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말해보려는 재능을 갖고 있다. 섬세할 수 있고 집요할 수 있는 그 재능.
그의 영화에 최대치의 많은 것들이 담기는 이유는 장르적 실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사실을 말해보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널리즘의 용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왜 이 모든 것인지에 대한 것.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또 스스로 자전하는 지구 위에서 현재 우리에게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 차라리 그것은 현상학적 사유를 위한 표현이다.
원래는 이런 것이 인문학적이라고 불리는 어떤 기초의 태도를 의미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한번 말해보고자 하는 그 태도. 그러나 요즘 인문학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정치학의 태도다. 정치학적인 것이 주되게 인문학적인 것이라고 통용되며, 나아가 정치적 태도 및 그 민감성이 마치 한 개인의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처럼 착각되어온지도 꽤 되었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는 섬세하고 집요한 재능은 필요하지 않다. 정치학에는 이기기 위한 재능이 필요하다. 얼마나 빠르고 쉽게 선동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즉, 답이 이미 정해져 있어야 한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미 특정한 정치적 의도로 구성되어 정해진 답에 현상을 끼워맞춘 뒤, 마치 그것이 정말로 사실을 말하는 답인 것처럼 꾸며진 내러티브를 보여주면 된다.
그래서 무엇인가? 결국에는 다 억압자-피억압자의 계급갈등이 문제이고, 다양성의 소외가 문제이며, 중심의 담론 위에 서있는 기득권조차도 실은 이 불평등을 낳는 부조리한 구조의 피해자일 뿐이다. 개개인의 의식이 더 계몽되는 일이 필요할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다양성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연대를 이루어, 이제는 세계가 '따로 또 함께'라는 기치하에 한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 이런 지루한 이야기들뿐이다. 정치화된 이야기들은 지루하다. 아니, 정치화 자체가 지루하다. 정치화의 태도가 광적으로 만연해 있는 만큼이나, 오늘날의 대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고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 세상 자체가 어떤 거대한 마스크에 씌워져 있는 그 기분일까.
이처럼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이것을 정치 내지 정치화라고 부르는 일도 정확하진 않을 것이다. 뭔가 함축적으로 지시할 언어가 필요하니 그렇게 대충 쓰고는 있지만, 실은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전복적이고, 아득히도 막연하다. 그 총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총체적인 미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19, 음모론, 정체성정치, 좌우의 진영대립, 윤리적 나르시시즘, 위선과 위악, 소영웅주의, 역사적 죄책감의 쾌락적 소비 등과 같이, 우리가 이해해볼 수 있는 정치화의 소재들처럼 보이는 것들은 분명 드러나있지만, 요는 이 폐색의 고통은 그것들 이상이다. 부분들을 합한다고 전체가 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전체의 덩어리가 있을 것이다. 아리 애스터는 분명 이러한 것을 포착해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숨겨진 어떤 것을 묘사하려는 시도, 그리하여 이 영화도 결국엔 오컬트다. 장르적 명칭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라는 오컬트의 어원 그대로의 의미다.
그래서 아리 애스터는 무엇을 하는가? 2020년도의 미국 남서부의 작은 마을에 그 모든 것을 다 가져다놓는다. 우리의 근간의 고통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어보이는 것은 모조리 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를 한번 지켜보자고 한다. 이로써 이 에딩턴이라는 작은 마을은 일종의 인류학적 실험장이 되었다.
그 실험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분하겠지만, 나는 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숨통이 트여 너무나 좋았다고.
무엇인가 은폐되고 있을 때, 또 어떤 공백의 자리를 대신 거짓으로 채우며 기만하고 있을 때, 더욱 핵심적으로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로 보려 하지 않고 연극적 행위로 회피하고 있을 때, 우리는 늘 숨쉬는 일이 힘들다. 외부의 그 부자연스러운 압력이 내적으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현실은 무척 개판이라서 마음이 아주 편하다. 실제의 세상이 지금 이렇게 총체적인 개판이라는 것을 아무도 제대로 말하려 하지 않을 때, 이 영화는 아주 정직하게 그대로 다 말해주니 너무나 안심이 된다. 『미스미소우』 같은 만화처럼 치유계로 분류되어야 할 영화일 것이다.
치유, 그것은 있는 것을 정말로 있는 것으로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적으로 보는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사실을 보는 이 원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이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그 말은 사실의 특성을 드러낸다.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비극과 희극이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모순이 아니라 원래 이 우주의 모든 사실적인 것은 바로 그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사실을 보는 일은 존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킨다. 그런 것을 우리는 치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통상적으로 대개 치유란, 자기 안에 더욱 가까이 갇혀 비극에 사로잡힌 이가, 그런 자기를 자기 밖으로 조금 멀리 빼서 희극을 향하려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보다 쉽게는, 자기 바깥의 시선으로 자기를 관찰해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 애스터도 그러한 것을 시도한다. 온갖 비극적 감정에 사로잡혀 진중하고 심각한 주제들로 열변을 외치던 그 정치화의 군상들을, 우리가 조금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도록 시야를 열어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러고 있던 우리 자신을 향해 웃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것이 헛웃음이라도 좋고 비웃음이라도 좋다. 또는 전혀 웃음이 나지 않고 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중요하고 예민한 정치적 주제들을 이렇게 조롱하듯 다루면 안된다고 근엄한 인문학적 큰어른 연기를 해도 좋다. 그런 모습이 아마도 제일 웃길 것이다.
뭔가 뭔지 전혀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모습은 원래 최고의 코미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을 자신만 모르고 심각해져 있는 그 모습이 코미디를 완성시킨다.
이러한 코미디야말로 인류사 속에서 시공을 초월해 작동하던 가장 보편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러니 2020년도의 미국의 작은 마을을 묘사한 이 그림은 시공적으로 동떨어진 2025년도의 한국사회의 모습 또한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음모론을 퍼트리는 미디어의 사이비교주를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자신을 비극적 주인공처럼 정치화하며, 보수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진보를 이끈다는 헛수작을 하고, 진보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보수한다는 헛소리를 하는 동시에, 정의로 포장된 리비도만이 사방에서 끓어오른다. 자신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한 그 뜨거운 연설은 소개팅에서 이성의 호감을 얻기 위한 그 열렬한 섹스어필이며, 서로 뒤엉킨 광장의 난장은 셔터를 내린 주점에서의 난교파티와 같다.
그렇게 실은 다 모르겠으니, 저 하늘의 별처럼, 또 코인처럼 도파민이나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소망만이 개틀링건의 탄알처럼, 또 정욕처럼 난사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그 자신이 리비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이다. 도덕주의가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저 왜놈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했다. 이처럼 자신의 행동원리가 결코 쾌락감이 아니라 정의감이라고 굳게 신앙하려 함으로써 기만된 리비도는 결국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퇴화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영원한 쌈박질. 끝없는 투쟁과 갈등. 도덕주의로 자신의 욕정이 은폐되어야 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섹스의 대체품으로 싸움을 한다. 그것 또한 뒤엉킴이므로. 그러나 풀릴 일은 없는 뒤엉킴이다. 더 조여들기만 할 뿐인 가시덤불처럼.
이와 같이,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욕구불만이 낳은 가시돋힌 그 분노만이 가지를 뻗쳐 모든 것을 더욱 복잡한 난장으로 만들어간다. 자신이 정말로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 혹은 눈치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마치 자신이 살아가는 그 목표와 원리를 진실하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성가신 기만이 모든 것을 더 꼬이게 한다. 성적 욕구를 도덕적 의지라고, 그렇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만해놓은 곳, 2020년도의 에딩턴과 2025년의 한국땅에서는.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그려진다. 정치적 좌파의 인물들도 또 정치적 우파의 인물들도 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적 욕구가 모종의 이유로 좌절되거나 금지된 이들이다. 그리고 그 좌절과 금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도덕주의적 정치화의 현실로 몰아간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들 무엇을 하는가?
정의라는 이름을 걸고는 현실의 광장에서 또 사이버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정욕을 흩뿌린다. 정의라는 이름을 집행할 때만큼은 자신의 정욕이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열렬히 지지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가 정욕의 유일한 배출구가 되어 있을 때, 올바른 도덕의 이름을 먼저 걸지 않으면 섹스도 할 수 없을 때, 도덕주의의 성립이 곧 리비도의 전제조건이 되어 있을 때,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이라고 불렀다. 니체였다면 삶의 몰락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그 방식. 실존주의에서는 이것이 존재망각이자, 인간소외이며, 생명의 종말이다.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그 기괴한 연극의 출현.
그리고 아리 애스터에게는 이것이 바로 공포다. 광기가 만드는 공포.
광기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그것은 도덕주의가 상실되거나 약화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한복판에서 도덕주의의 적자로 태어난다. 곧, 도덕주의가 억압의 자궁을 통해 낳은 것이 광기가 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는 이로써 과도하게 남용되는 광적인 정욕으로 변한다.
영화에서는 도덕주의가 만들어낸 이 모든 '미친 것들'을 한데 몰아넣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한번 봐보고자 한 것이다. 표현 그대로다. 지금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모든 광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다 있었다.
그러나 엄숙하고 비장한 예언자의 어조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하면 인간이 미친다고, 가볍고도 경쾌한 농담같은 그 호흡으로 말하고 있었다. 섬세함도 집요함도, 바로 이 자연스러움의 회복을 위해 기능하던 재능이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전공투처럼 마스크를 눌러 쓴 채, 촛불을 들고 68운동과 바더 마인호프, 또 운동권 열사들을 위해 묵념을 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이 먼 동아시아에서도 조지 플로이드를 기억한다며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오늘도 곤충에 대한 성적 지향을 갖는 어떤 이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이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자아비판한다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려야만 한다면, 그래야만 화장실에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다 미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조금씩 다 미쳐 있는 것일 수 있다. 2020년에 우리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코로나 때문에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코로나에 대응하던 그 방식 때문에 미친 것이다.
마치 기회는 이때라고 노리기라도 하던 것처럼, 코로나에 대처한다는 미명으로 생명에 대한 도덕주의를 강화하던 바로 그 방식이 코로나 이후 이제 우리의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도덕주의가 생명을 지켜주기라도 하는 양,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약자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더욱더 도덕주의의 투사가 되어갔고, 그렇게 도덕주의는 정확한 독재의 원리로 화해 왼쪽에서든 오른쪽에서든 똑같이 인간을 억압하는 무게가 되었다.
주술, 세상은 이처럼 주술로 가득 덮여간 것이다.
생리적 문제를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 환상이 바로 주술의 내용이다. 도덕은 어떤 선한 것으로서, 일견 악해보이는 주술이라는 표현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 자체가 원래 최고의 주술이다.
에딩턴은 이 주술사회였고, 우리도 동일한 주술사회에서 살고 있다.
감독이 발견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지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아니 우리는 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는가?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도덕으로 생리의 문제를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이 주술의 기제, 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곧 억압의 기제를 코로나 이후 우리의 제1원리로 삼아왔기에, 우리는 점점 더 생리적으로 무력해졌고, 그 결과 생리의 불만족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러다보니 역으로 더 도덕주의만을 강화하는 미친 현실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그런 줄도 모르게 된 것은 전술한대로 주술의 효과다. 주술은 그 피험자가 그러한 주술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야 주술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최면과 같다. 최면 속에서는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면에 걸려 있는 이일수록 자기 자신을 가장 깨어나 있는 이로 착각한다.
서로가 가장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하는 일은 서로를 들이받으며, 또 절벽을 향해 함께 몰락해가는 그 일이다. 이로써 도덕주의가 완성되었다. 당연하다. 가장 완벽한 도덕은 인간이 세상에서 다 없어져버리면 실현되기 때문이다.
도덕주의가 곧 도덕으로 생명을 다 끝장내려는 이 일임을 일찌감치 눈치채고, 거기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사상적 전통이 실존주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생명을 지킨다는 기만적 이름으로 오히려 가장 생명을 봉쇄하려던 이 도덕주의를 그래서 실존주의는 거대한 농담거리로 삼으려 했다.
웃음은 생명의 것이므로.
그리고 코미디만이, 살아있는 존재가 엄숙한 도덕에 의해 위협받는 공포를 치유할 수 있으므로.
나는 이러한 차원에서 이 영화를 니체적인 영화라고도, 또 실존주의적 영화라고도 부르고 싶다. 적어도 이 영화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말해보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그 말 자체를 넘어서보고자 했다. 언어로부터 스스로를 탈출시키려는 실존의 운동이 이와 같을 것이다. 언어 중에 가장 권위있는 언어로 가정된 언어, 그것이 도덕이다. 그러니 도덕은 가장 언어적인 것이며, 이를 넘고자 하는 시도는 가장 실존적인 것이다.
그렇게 도덕주의라고 임의적으로 명명할 어떤 거대한 말의 덩어리, 어떤 거대한 고통의 이유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그것은 절벽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세상 전부를 이 자리에 두고서라도 그 절벽은 넘어야 할 가치가 있는가?
질문도 아니다.
살아있는 것이 그 자신으로서 살 수 있다면,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생명은 반드시 그 간극을 건너간다. 이미 허공으로 그 몸을 던지고 있다. 생명은 그렇게 이 모든 것이 왜 이 모든 것인지에 대한, 그 자신이 왜 그 자신인지에 대한, 바로 그 사실을 산다. 그 자신을 마스크에 의해 은폐된 것으로부터 개방하는 그 존재회복의 현실을 향해 간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올바른 정의보다도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옳은 뜻. 이로써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한번 말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숨통이 트여 너무나 좋다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고, 세상은 개판이라고, 그래도 우리는 또 자유롭게 숨쉴 것이라고, 그렇게 한번 웃어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