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것, 불감한 것
일본호러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는 컸지만, 역시 글로 읽을 때가 좋았다.
그럼에도 초반부에는 일본호러 특유의 그 불길함을 어느 정도 잘 전해준다. 인과관계 같은 것은 있지만, 실은 그 인과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도 없는 그 무차별적 악의에 대한 묘사 같은 것 말이다.
2ch 출신 괴담으로 '리얼(リアル)'이라는 작품은 이러한 불길함의 정서를 대표적으로 드러낸다. 더욱 일상으로 다가와있는 크툴루 신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위협하는 악신들이 도처에 도사린다. 귀가길의 골목에도, 지하철 역에도, 동네의 익숙한 편의점에도. 당연한 안전의 공간으로 믿었던 곳이 완전히 전복될 것 같은 그 예감, 또는 실감. 이런 것을 불길함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에 모종의 인격적 실체성을 부여해 초자연화하면 악신이 된다. 이것은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통제에의 불가능성은 이로써 더 커진다.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던 것보다, 막판에 인식의 울타리에서 튀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혼란스럽고 난해한 것이다.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은 더욱 무력해진다. 그야말로 코즈믹 호러다.
그래서 번져나가기도 쉽다. 도시전설이 친구의 친구에게 들었다는 그 방식(FOAF)으로 전염되는 것은 SNS의 역기능 같은 것이다. 집단지성이라는 것을 상정해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해서 함께 고민하면, 그 불가해한 것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타고 전염은 성공적인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이 바로 저주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호러의 주된 핵심인 그 불길함의 실체.
전염을 꿈꾸는 공포가 종종 미스터리의 외연을 입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미스터리에는 어떻든 답이 있을 것 같다. 단서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결국에는 하나로 연결된 어떤 답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독자들은 미스터리의 문법에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속임수다. 단서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그 과정 동안, 과정의 참가자는 저주에 침식되어가는 것이다. 끝까지 가보면 거기에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공포의 소재에 완전히 잠식되어 또 하나의 저주의 숙주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다.
웹소설로 처음 연재된 이 작품도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후유증라디오』라는 나카야마 마사아키의 호러만화도 그렇고, 『어느 게시판 기묘한 글』이라는 근래의 작품(https://m.blog.naver.com/qordb6712/223884504383)도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결국 이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가에 대한 그 전복적 공포의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자신의 안팎에서 가장 신뢰하는 것은 네트워크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작동하고, SNS와 개인미디어가 그렇게 작동한다. 병렬적 정보들을 통합해감으로써 흡사 미스터리의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네트워크의 방식을 통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제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인간 자신이 그 믿음 때문에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가, 이 작품을 위시한 유사한 구조의 이야기들은 바로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똑똑함으로 인해 스스로 더욱 올가미로 뛰어드는 동물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물은 도파민을 먹이로 삼는다. 네트워크는 도파민을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고 개발된 장치, 이른바 도파민공장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저주는 과거 행운의 편지와 같은 것처럼 협박을 매개로 작동하지 않는다. 도파민을 타고 저주는 전파된다. 불행의 예언이 아니라 행복의 약속을 걸고.
그러나 걸린 것은 저주다. 네트워크라는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게 된 것은 저주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 자기 자신.
삶에 대한 최고의 저주는 무엇일까?
삶에 대해 불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는 삶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있던 유기체가 무기물로 화한다. 도파민을 따라 신나게 도착해본 그 미스터리의 끝에는 그저 바위 같은 무기물만이 운명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다들 자살을 한다. 저주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다. 삶이 완전히 무감해진 이 저주에서 빠져나오려면 삶을 끝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다.
실은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하다. 이 또한 일본호러가 고전적으로 잘 묘사해왔던 방식. 더 많은 타인들을 저주에 빠트리는 것이다. 그러면 잠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돌아오는 것 같다. 타인을 절벽에서 추락시킴으로써 얻게 된 그 쾌감, 올가미에 걸린 다른 동물이 내지르는 그 끔찍한 비명소리가 잠깐 자신을 깨워주는 것 같다. 미소가 지어진다. 그 표정이 이제 일본호러를 완성한다. 불길한 그 미소의 음영을 우리의 뇌리에 새기며.
이 과정 속에 괴수물 같은 어설픈 크리쳐가 나오면 불길한 어떤 심리적 정조를 관객에게 전하려는 의도는 실패할 것이며, 이 영화의 패착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크툴루는 문어이면 안되고, 더욱 영리하게 인간 자신의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과 완전히 같지는 않은 그 모습, 그 불쾌한 골짜기. 네트워크라는 관계의 저주에 잠식된 인간이 어느 날 거울을 봤을 때 보게 될 모습이 그 모습이라면, 자, 다시 말하지만, 호러는 완성된 것이다.
전적으로 불감하기에 무엇보다 불길하게 드러나 있는 그것 앞에서, 우리는 더는 불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을 그래서 다시 또 가져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