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禪)과 코로나

선선한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

by 깨닫는마음씨
chole.png?type=w740



선(禪)을 산다는 것은,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든, 내계와 외계이든, 0과 1이든, 선은 일치시킨다.


이는 다시 말하면, 파장을 맞춘다고도 할 수 있다. 비가 오면 그 비와 분리되어 비를 보는 자로서 여여하게 앉아 있는 것이 선이 아니라, 비가 오면 그 비가 되는 것이 곧 선이라는 말이다.


아주 단순하게, 선에는 내로남불이 없다. 일치된다. 때문에 일치되지 않는 갈등이 만들어내는 운동에너지가 없다. 또한 그 운동이 만들어내는 열에너지가 없다. 그래서 고요하다(禪). 또 선선하다. 선은 선선한 것이다.


선선하다는 것은, 막힘이 없는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곧, 선에는 막히게 하는 대상이 없다. 즉, 적이 없다.


이처럼 선은 적을 세우지 않는 길이다. 그렇다고 선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 군집의 정신에 입각한 동일성의 폭력으로, 모든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히려는 전체주의의 또 다른 이름은 더욱 아니다.


선은 '나'와 '나 아닌 적'이라는 상대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이 모든 것의 근저에 놓인 무의미성을 말한다.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선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가 결코 아니다. 선은 오히려 이 무의미성의 근저에서 태어난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의미있는지를 말한다. 무의미하지만 의미롭다. 공하지만 색하다. 같지만 다르다. 전부 다 동일한 묘사다.


"어쩜 이리도 같으면서 다를까?"


때문에, 아마도 이 영롱한 감탄사가 선에 대한 전부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감탄사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을까?" 또는 "무의미한 뿌리에서 어떻게 이런 다양한 의미의 꽃들이 피어났을까?"라고 하는 표현들로 다시 변주되며, 그렇게 변주된 선은 철학이 된다.


같음과 다름, 없음과 있음, 무의미와 의미, 언제나 둘 다며, 동시에 둘 다 아니다. 사실은 말할 수 없다. 곧,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태들이 이와 같다고, 선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다만, 말할 수 없는 감동일 뿐이다. 벅차게 밀려오는 느낌일 뿐이다.


"선은 느낌이다."


스즈키 선사에게는 이것이 분명하다. 느껴진 것, 곧 삶으로 체험된 것이 바로 내가 된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삶이 나를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전하는 그 무엇으로도 온전한 내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 물음이 있다.


지금의 코로나와 그 제반현상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삶은 어떠한가?


이것도 나인가? 이것도 온전한 나일 수 있는가?


선을 산다는 것은, 이 물음에 독대하여 직접 대답을 이루는 것이다.


한편 선을 철학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이 쉽사리 우리의 정당한 삶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그 이유를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코로나와 그 제반현상들 속에서 우리에게 감지되는 주요한 반응들을, 제대로 해야할 것을 똑바로 못했다는 잘못과 그에 따른 처벌이 야기하는 '죄책감'이라고 이해해볼 때, 즉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이 단지 아픔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의 문제처럼 굴절되고 있다고 이해해볼 때, 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쓰게 된 마스크를 잠정적인 카인의 낙인으로서 이해해볼 때, 이것은 중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은 유효할 것이다.


"무의미하느니, 차라리 죄인이 되겠다."


틸리히는 선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이 지점을 환기시킨다. 서구의 이성적인 시민사회의 전통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죄책감의 정조가,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무의미성 내지 공성을 받아들이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은 자신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름의 영역을 인정하기보다는, 모르는 자신을 아직은 빛에 도달하지 못한 못난 자로서, 곧 현재에는 불완전한 죄인으로서 정립시키는 길을 택하는 까닭이다.


일본의 선 연구가인 니시타니는 이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합리적인 의식의 장 위에 놓으려는 경향성 때문에, 이미 공의 장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무의미성의 심연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즉 그렇게 자기라고 규정하고 있던 상대적인 정체성을 소실하게 되는 공성에 접촉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정체성이 명확한 죄인의 자리에 놓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무의미성, 곧 하나의 정체성의 소실을 암시하는 코로나는, 이로 인해 우리가 공성을 자각하는 소재로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빠르게 죄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소재로 변환되어 소비된다.


이처럼 죄책감의 기제를 통해, 이 코로나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상정되는 다른 죄인을 심판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을 죄인처럼 자책하는 동안에는, 마치 무의미성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기대하는 것이다. 주술적 믿음이다.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에 마녀사냥이 활발했던 그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실제적인 차원에서 아픈데다가, 관념적인 차원에서 죄인이 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 되려고 하는 그 열렬한 의도만큼, 악은 끊임없이 양산되어야 한다.


하나의 생명현상인 바이러스가 악이 되고, 그 바이러스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이가 악이 되며, 그러한 악의 창궐 앞에서 스스로를 똑바로 책임지지 못한 우리 자신이 또한 악이 된다.


그러나 선(禪)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선과 악은 가치의 범주다. 선은 이 가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니체의 표현처럼 선악을 넘어선, 탈가치적인 것이다. 무의미성이라는 것이 애초 탈가치적인 것인 까닭이다.


가치는 앎이 만든 것이며, 무의미성은 삶의 속성이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말을 살짝 변주해서, 삶은 언제나 앎에 선행한다. 때문에 삶 그 자체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는 선은 결코 가치에 갇힐 수 없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선은 인간을 가치가 만든 죄의 감옥 속에 가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선은 인간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가 경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다만 아픔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붓다가 세운 가장 명확한 경계는 고통과 죄의 분리였다. 예수도 그러했다. 한국의 종교철학자인 정재현은, 인간의 고통에 인과론적 합리화 및 목적론적 미화가 첨가됨으로써, 고통받는 인간이 나아가 죄인이 되기까지 하는 비극의 사태에 봉착하게 된다고, 이 고통과 죄가 연합되는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죄책감에는 반드시 이득이 있다. 인간이 반복적으로 소유하며 집착하는 모든 상태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이득이 있다. 여기에서 죄책감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최고의 이득은 죽음의 망각이다. 곧, 무의미성의 망각이다. 이것을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어 존재망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존재망각은 실존철학에서 기만이라고 묘사되는 그 상태다. 곧,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살아있지도 못한 상태다.


그래서 죄책감을 끝없이 양산하고 있는 지금의 코로나 사태는, 분명 오늘날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존재망각의 사태다. 바이러스 그 자체의 생태와도 같이, 우리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만들고 있는 사태다. 곧, 언데드(undead)의 사태다.


이처럼 망각으로 인해 생겨나는 언데드의 상태는 고요함이 아니라 침체다. 그것은 늪이다. 곧, 우울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답답해서 화가 난다. 그러나 그 화가 갈 곳을 잃어 스스로를 치게 될 때, 그것은 자책이 된다. 그렇게 또 죄인이 양산된다.


우리는 이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곧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며, 그 심연 속에서 다시 살아낼 수 있을지를 묻는 키르케고르의 물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연 속에서 대답될 것이다. 심연으로 직접 내려간 이들에게서 응답될 것이다.


공(空; sunyata)의 어원적 의미는 부풀어오른 공간이다. 곧, 자궁이다. 심연은 바로 그 자궁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키워내는 자궁이다.


심연 속에서 그 심연을 체험할 때야, 인간은 비로소 이 무의미성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것은, 사랑이다.


가장 텅비어서, 이 모든 것을 다 품어내고 있는 가장 거대한 사랑이다.


공은 사랑이다. 아는 이는 다 알고, 모르는 이도 다 안다.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이미 이 공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로나의 장 속에서도 우리에게는 늘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삶인 한, 우리가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사랑을 발견할 기회가 있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자각하고, 그 심연의 사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는, 이 하루하루를 더는 망각 속에서 흘려보낼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죽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 삶이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그 자각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바이러스와의 일치성이다. 바이러스는 생명현상으로서의 자신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정직하기에, 그토록 끈질긴 것이다. 바이러스는 원초적인 삶의 형태다.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라는 천지인의 청계천 8가의 노래가사는, 그래서 이 삶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우리가 바이러스와 일치됨으로써 얻게 되는, 곧 다시 기억하게 되는, 이 삶의 중대함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이 자각은 이내 공감이 된다.


"이 귀한 분들아, 다들 죽으면 안돼요."


공감은 자각을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한 일치성의 현상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한다.


마르셀의 탁월한 정의는 언제나 유효하다.


"사랑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와 다른 적이라도, 나와 그 적이 동일한 무의미성의 뿌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 그 다름은 더는 그를 적으로 구성하는 성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나와 다른 그로서 살아야 한다는 배려를 촉진한다.


이것은, 적으로 상정된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배려다. 그동안 우리는, 나와 적이 생존의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다는 상대적인 착각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는 필멸이라는 공동의 운명 위에 놓여 있었다.


오히려 그는 나와 다름으로 인하여, 이 공동의 생존을 더욱 담보해주는 존재이기까지 했다. 이를테면, 나는 젓가락이고, 그는 접시였을 때, 우리는 그로 인하여 더욱 효과적인 섭식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또한 이는 비단 기능적 차원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삶은 노래다. 더 다른, 곧 더 다양한 삶이 펼쳐질 때, 그것은 이 적막한 우주공간을 가득 채우며, 우리를 즐겁게 하는 노래가 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장 먼 우주의 끝에서 홀로 표류하게 될 때라도, 우리보다 먼저 도달한 그 노래의 파장으로 인해,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도 인간의 목소리를 수신하게 된다. 그렇게 인간이 없는 곳에서도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뒤에는 언제나 인간이 서 있다.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며, 언제나 그 뒤를 인간이 지키고 서 있다.


이것이 선을 산다는 것이다. 인간과 일치되는 것이다. 내가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공이 체현된 존재다. 곧, 무의미성이 의미로 드러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의 존재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죽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며, 결국 이처럼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복기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재기한다. 심연 속에서 다시 살아낸다.


그렇게 다시 찾은 삶은, 일치되는 삶이다. 적이 없는 삶이며, 더불어 사는 삶이다.


이 모든 것의 필멸성과, 무의미성과, 공성과 일치된 이에게는 이 음색이 있다. 가장 깊은 심연을 닮은 그의 눈빛과 일치된 음색이 있다. 그것은 바닥없는 심연의 바닥에서부터 솟아 올라와, 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또 긍정하고자 하는 목소리다.


"너도 살아도 된다."


그렇게,


"나랑 같이 살자, 꼭."


선선한 것은 이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치한 것이다. 선선한 이 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실존과 고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