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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It Comes, 2018)

두려운 아이들이 온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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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두려운 존재다. 이것은 능동과 피동의 두 방향성을 동시에 묘사한다. 아이는 다른 이를 두렵게 만들며, 그 자신 또한 두려워하는 존재다.


이 영화는 집요하리만치 이 두려운 아이의 모습을 첨예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장면과도 같다.


하루종일 일에 치여 몸이 무너질 것처럼 너무나도 지친 우리가 집에 돌아온 어느 날엔가,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이 우리에게 놀아달라고 끝없이 응석을 부리는 모습 앞에서, 결국 우리의 화가 폭발하고, 그 화가 이내 통곡으로 바뀌어 우리가 바닥에 주저앉게 되는 그 순간에, 바로 그 순간마저도 반려동물이 우리에게 놀아달라는 울음소리를 다시 반복하며 우리를 천연덕스럽게 쳐다보는 그 장면이다.


이 장면 속에서 우리는 공포에 휩싸인다.


다른 이의 아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제공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흡사 어떠한 악마와 같은 것을 목격한 기분에 휩싸인다. 우리가 익히 알던 모종의 호의적인 세계가 결코 아닌, 어느 기괴하고 잔혹한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갑자기 던져진 것만 같은, 그리고 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도저히 소통불가능한 낯선 괴생물체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미지에의 공포에 직면한다.


그러한 괴생물체가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다면, 이는 공포의 절정이다.


우리는 이토록 고통받고 있는데,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그것이 우리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기까지 하다니, 이것은 현실에 강림한 지옥과도 같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공포는, 곧 두려움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아이는 살아있는 것들을 죽인다. 순수하기 때문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아메바처럼 자기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타자의 아픔을 실감하지 못한다. 자신이 즐거우면, 자신에게 반토막으로 찢기고 있는 나비도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자기만큼이나 살아있는 타자는 그저 아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도구적 대상이 될 뿐이다. 이것은 순수한 악의다. 이처럼 순수한 것들만이 악마가 된다.


비유적으로 악마는 영혼을 수집한다고 말해진다. 이 비유는 적절하다. 악마가 바라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영혼을 갖는 일, 즉 사람들의 관심을 갖는 일인 까닭이다.


악마가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만 집중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데에만 열중하는 이유는, 바로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가 없기 때문에 그 아픔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래서 아픔에 대해 무력해진다. 바로 이처럼 자각이 부재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아픔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악마는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사람들이 대신 그 아픔을 처리해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은 아픔에 대한 무관심에 의해 생겨난다. 아픔은 '살고 싶다.'라는 유기체의 반응이다. 즉, 아픔은 삶의 증거다. 때문에 아픔이 계속 소외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두려움은 바로 이 죽음에 대한 것이다. 곧, 죽음에 대한 예감이 두려움이다. 아픔을 소외시킴으로써, 삶을 계속 소외시키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커진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는 결국 두려움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두려워하는 쪽이 되느니, 두렵게 하는 쪽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악마는, 자신의 아픔에 무관심한만큼, 사람들의 아픔에도 무관심해지며, 결국 이로 인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게 된다.


영화에서는 자신의 아픔을 소외하는 세 가지의 방식이 묘사된다. 영화의 주요인물들은 각기 이 아픔을 소외하는 삶의 형태들을 대변한다.


첫 번째는, 아픔에 대한 회피다. 아픔을 회피하고, 그 회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죽음에의 징조로 인한 두려움 또한 회피하고자 하는 이러한 삶의 형태는, 오직 아름다운 꿈에 취하는 것이다. 즉, 눈앞의 현실을 무시하고 SNS 등지에 스스로 만들어낸 가상의 낙원으로 철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다 무시한 채, 자신의 삶을 순수한 긍정의 동화책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픔에 대한 인내다. 곧, 버티는 삶이다. 이러한 삶의 형태 속에서 아픔은 약함으로 굴절된다. 그래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픔을 인정하면 자신이 약한 자가 된다고 착각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약한 자가 되면 아픔에 더욱더 무력해짐으로써 아픔이 영원히 자신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라고 또한 착각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아픔과 싸우는 길이다. 곧, '살고 싶다.'라는 자신의 소망과 싸우는 길이며,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과 싸우는 자학의 길이다.


세 번째는, 아픔에 대한 해결이다. 특히 이러한 삶은, 아픔이라고 하는 것을 특히 타인에게서 보며 이를 어떻게든 해결해주고자 헌신하게 되는 형태를 취한다. 그렇게 타인의 아픔을 유능하게 해결하는 것 같은 품새를 취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아픔을 망각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은 전부 다 자신의 아픔에 실제적으로는 무관심한 모습들이다. 때문에 단지 두려움만 더욱 크게 양산하게 되는 모습들이다. 실존철학에서는 이를 통칭하여 기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기만하고자 하는 그 아픔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이 기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정말로 두려워진다. 기만은 경계를 무시하는 일인 까닭이다. 경계가 모호하면, 우리가 튼튼하게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발판 또한 소실된다.


반면, 아픔은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부터 핵심적인 경계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타자라고 하는 경계다. 이 경계로 말미암아, 정말로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신이 드러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드러남으로써 자신에게 친절할 수도 있게 된다. 이 아픔은 타자의 일이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즉, 스스로 살려야 할 존재로서 자신이라는 것이 소중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픔은 결국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하는 신호와도 같다.


자신의 아픔에 무관심하며, 자신의 아픔을 소외시키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잃은 채, 경계가 모호한 아이의 상태 그대로 몸만 자란 모습이 바로 이 영화의 주요인물들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러한 이들이 아이를 낳아, 회피하고, 인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아픔에 대한 소외의 세 가지 전략을 그대로 세습시킨다. 곧, 두려운 아이들이 두려운 아이들을 재생산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두려운 아이들이 두려운 아이들을 두렵게 하며 또 두려워한다.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그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두렵게 하며 또 두려워한다.


자신의 아픔에 친절하지 않은 이들이기에, 그들은 타자의 아픔에도 친절할 수 없다. 자신의 갈증이 채워져야, 상대 또한 목이 마르다는 사실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아무리 친절한 외연을 취해 타자의 아픔을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를 보여도, 자신의 아픔이 응답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이내 회피 또는 인내로 쉽사리 모습을 바꿔 또 다시 두려움의 권세를 확장할 뿐이다.


이처럼 그것이 가득 온다. 두려운 아이들이 가득 온다.


그것을 회피하려고도, 버티려고도, 또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대신에 우리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픈 이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자각의 언술은, 두려운 아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들에게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리는 까닭이다.


"여기에 아픈 네가 있었구나."


이처럼 두려운 자신이 사실은 아팠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비로소 자각된다. 그리고 자각은 언제나 멈추게 만든다. 알리고자 한 것이 알려진 까닭이다. 알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된 까닭이다. 결승점에 도달했으니 달리기는 멎는다.


그래서, 이제 온다.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온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찾는다. 자신이 있어서, 이제 두렵지 않다. 두려운 아이들의 역사가 종결된다.


그냥 아이일 뿐이다.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모르는 아이일 뿐이다. 자신이 아픈줄도 몰랐던 우리의 모습이다. 즉,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몰랐던 우리의 모습이다. 근본적으로 살면 안되는 존재라고 착각했던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제 아픔이 온다.


살라고 아픔이 온다. 살고 싶다고 아픔이 온다. 살아도 된다고 아픔이 온다.


살아있는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살아도 된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아픔이 온다.


가장 명확한 스스로의 증거를 앞세워, 그렇게 삶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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