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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정원(モリのいる場所, 2018)

아름다운 집착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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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행복하다.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다. 동산 위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왜 그럴까?


선에는 우리가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와 같은 당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오직 이 한 마디에 대한 것이다.


'무일물(無一物)'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또는 하나의 사물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다 공(空)하다는 표현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은 이 표현을, 그러니까 "이 모든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명령문으로 법제화하지 않는다. 집착은 금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불가능한 것이다.


무일물은, 애초에 이 모든 것이 집착할 수 있는, 즉 붙잡을 수 있는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흘러간다. 고통도 흘러가고, 깨달음도 흘러가고, 부처도 흘러간다. 흘러가는 강물에 대해 "강물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라고 발화되는 명령문은 실상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선은, 붙잡으라고 말한다. 지금 이 손을 시원하게 적시면서 흘러가는 이 강물의 감동을 한껏 누리라고 말한다. 애초 불가능한 것이니, 얼마든지 자유롭게 그 가능성을 펼쳐보라고 말한다.


이는 다시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정한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진리는 없다. 진리가 있다면, 오직 "진리는 없다, 또는 진리는 불가능하다."라는 이 말만을 진리로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진리가 없을 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은 바로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가 향하는 것은 바로 의미다.


의미는 사랑의 결실이다. 자유롭게 이것이어도, 또는 저것이어도 되는 것이, "나는 이것이다."라며 그것을 전부로 삼는 것이다. 사랑은 이처럼 스스로를 어떤 것에 묶는 것이다. 그리고 묶은 그것이,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며 그것에 빛을 더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귀한 의미로서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그것이 보편적인 차원에서 귀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쩌면 우리의 손길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것은 이미 가장 귀한 것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쓸데없는 이 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이란 것이 생겨난다.


쓸데없이,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으며, 가장 오롯하게 그것과 함께했던 그 상냥함의 자취가 가장 그윽한 아름다움의 향기를 풍겨낸다.


그것은 인간의 향기다.


그리고 인간의 온기다.


내일 죽지만,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사과나무를 심는 인간다움이다. 불가능성 앞에서, 그 불가능성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따듯한 가능성이다.


선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 그리고 또 긍정의 몸짓이다. 그래서 선은 모종의 신적인 존재가 되는 길이 아니라, 그저 인간으로 사는 길이다.


영화에서는 한 아이가 그린 그림에 대해, 영화의 주인공인 모리 선사(禪師)가 평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사는 말한다. 이 그림은 못 그린 그림이지만, 오히려 못 그려서 좋다고, 잘 그린 그림은 끝이 뻔히 보인다고, 못 그린 그림도 작품이라고.


여기에서 그림이라는 단어를 인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볼 수 있다.


선사는 분명하게, 우리가 못난 인간이어서 더 좋다고 말한다. 잘난 인간은 오히려 그 가능성이 자유롭지 못하게 닫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이미 작품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언제나 선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진정한 나를 이루기 위해, 지금의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애초에 집착될 수도 없이 금방 흩어질, 이 단 한 번뿐인 지금의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이 선이다.


이처럼 선은, 지금의 나에 대한 긍정, 또 긍정이다. 지금의 나에 대해 가장 상냥한 것, 그것이 바로 선이다.


이것은 곧 아름다운 집착이다.


원래 사랑은 집착이다. 우리는 집착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곧, 스스로를 묶어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집착은 그것의 무조건적 불가능성을 알고 그에 따라 조건없이 행위할 때, 다만 사랑일 뿐이다. 즉, 집착이 문제처럼 경험되는 것은 그것이 조건화되었을 때뿐이다. 그러나 그 어떤 조건으로도 집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집착은 무조건성의 영역으로 이행된다. 곧, 사랑이 된다.


무조건성은 시공간의 비유로 묘사하면,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리 선사가 있는 곳(モリのいる場所)은 그곳이 어디이든 사랑의 정원이다.


이처럼, 아무리 작든, 또 아무리 크든 간에, 인간이 있는 곳은 언제나 인간이 그 자신의 사랑을 피워내는 사랑의 정원이다. 이 사랑의 역사가 끝없이 진행되는 곳, 바로 우주와 같다. 아름다운 집착으로 말미암아, 작은 정원은 이미 가장 거대한 우주와 동격으로 드러난다. 더 진정한 것이 아니라, 다 진정한 것이다. 때문에 선에서는 가장 못난 우리가 이미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가 아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이다.


오직 하나, 모리 선사의 말처럼, 태어난 것이 너무 좋아서, 또 살고 싶으면 된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다시 또 살고 싶어질만큼, 더 많이 살고 싶어질만큼, 자꾸자꾸 살고 싶어질만큼, 그저 사랑하며 그 사랑 속에서 다만 행복하면 그것이 전부다. 그것이 선이다.


그래서 선은 행복하다.


선은, 가장 작은 곳에서도 가장 거대하게, 또 가장 유한한 조건 속에서도 가장 무조건적으로, 우리의 행복만을 노래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불어보내는 따듯한 바람이다. 동산 위에 선, 사랑하는 이들의 바람이다.


그대가 행복하기만을 집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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