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불행하지는 않은 이들"
우리가 하는 가장 심대한 착각 중의 하나는 자신의 불행에 특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인물인지를 연출하기에 바쁜 이 시대에는 불행도 훈장이 되며, 장사도구가 된다. 자신의 비극을 수익으로 교환하는 이 일은 자해공갈단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불행팔이들이 너무 많아 우리의 영혼도 병들어간다.
사실은 어떠한가.
모든 불행은 평범하다. 그것이 사실이다.
자신에게만 다가온 불행이라고 생각하던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경험되던 것이다.
붓다는 일찌감치 이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인간의 불행은 조금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니 붓다에게는 불행에 집착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불행이 조금도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지 않을텐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얻어보려고 불행을 그리도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것일까, 붓다에게는 이것이 의문이었다.
불행한 자신의 스토리를 팔아먹으며, 또 불행이 지금의 자신의 성공을 가져다준 동력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은 자꾸만 그렇게 거짓의 나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스스로 못박히는 길을 택한다. 그러니 그러한 불행팔이의 삶에는 늘 모순이 생긴다. 애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불행을 특별함의 소재로 유용하려 하니 그 간극을 끝없는 거짓말로 메워야 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이 불행의 특별함을 지속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미래라고 하는 것을 발명하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래는 언제나 근심걱정의 소재다. 미래를 떠올리면 암담하고 우울하다. 자꾸만 불안해진다. 그것은 미래에도 자신은 불행할 것이라는 감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쌍한 자신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도움받지 못한 채로, 흡사 버려진 아이처럼 방치될 것이라는 비극적 도취감에 전신을 부르르 떤다. 오르가슴이다. 특별함에 대한 자아도취가 낳은.
이처럼 불행에 탐닉하는 변태적인 생명체는 인간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지구에서는 모두가 행복하고 싶어서 살아간다. 이 푸른 행성에 살아있는 몸으로 태어난 모두는 아는 것이다.
특별함이란 불행이 아닌 행복에 있다는 사실을.
모든 불행은 평범하나, 모든 행복은 특별하다.
인간이 그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경험하게 되는 경우라면, 우리는 그의 행복을 말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니, 말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은 불행을 특별한 소재로 취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핵심적으로는 행복을 오히려 평범성의 소재로 취급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SNS의 가상현실을 보면 행복은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조약돌처럼 널려 있는 것만 같다. 행복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당위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그렇게 남들은 이미 평범하게 다 갖고 있는 행복을 자신만은 못가진 것 같으니, 자신의 불행에 대해 부여하는 특별성도 심화되는 것이다.
착각이 지나치고, 심지어 지속적으로 고착된 망상의 형태로까지 발전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리라. 망상은 망각으로부터 발로한다. 우리는 망각했다. 완전히 잊었던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행복은 조금도 당연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에게 돌연히 찾아온 크리스마스의 선물 같은 신비라는 그 사실을.
그래서 행복은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기적이기에. 그것은 신비이기에.
또 결정적으로, 현재 우리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기에, 그것은 더욱 신비다.
그러나 신비란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현재 자신의 행복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려 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을 늘 평범하다고 간주하며 특별함을 꿈꾼다. 곧, 미래를 걱정한다. 현재는 평범한 것 같으니 미래에는 특별해지기를 꿈꾸는 것이다. 암담하고 우울한 미래에 불행해질 자신의 모습을 망상하며 그 불행의 특별함을 소비한다.
되지 않는 길을 계속 고집하면 질리고 지친다. 바위가 깨질 때까지 계속 계란으로 친다는 바보같은 말도 들어보았다. 그 말을 하면 자신이 대단히 특별한 존재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말만 그렇게 해놓고는 자기는 누구보다 든든하게 다 갖춘 바위처럼 산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계란의 약속을 깬 비겁한 자신의 불행을 또 특별함으로 소비하려고 든다. 정말 질리고 지친다.
불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일이 만능열쇠는 아니다. 그러면 모두가 숙연해져서 말을 멈출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또한 불행의 특별함을 통해 얻는 권위를 집행하는 방식이다. 더 불행한 자가 높은 계급이 되어 통제의 권한을 갖는 이 일은 비단 대한민국의 불행사 경연대회가 펼쳐지는 선술집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불행을 특별함의 소재로 믿는 이들은 다 이 일을 한다. 그러기 위해 거듭해서 불안을 날조해낸다.
달마의 안심법문은 유명하다. 불안한 마음을 달마는 어떻게 안심시켰는가? 불안을 어르고, 달래며, 위로했던 것이 아니다. 거기에 실은 불안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안심의 현실은 펼쳐졌다.
미래의 불행한 자신에 대한 불안? 그런 것은 없다. 불행으로 특별함을 획책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일어난 망상이다.
미래가 어둡게만 생각되어 자꾸 불안해진다면,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방점은 생각이다. 우리는 미래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다. 불행의 특별함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가 불행하게 될 미래를 자꾸만 소설처럼 써제껴가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방법은, 현재 이 눈앞의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재의 일들에 단순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빛이 난다. 아니, 빛이 보인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인간이 현재를 단순하게 닦아간 그 모든 것은 빛이 나며, 실제의 미래는 그 빛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한 미래가 어두울 턱이 있겠는가? 인간이 모든 것을 빛낼 수 있는 자로, 곧 광원 중의 광원으로 그 자신을 확인하게 된 이러한 삶은 빛을 잃을 수 없는 삶이다. 돌연히 찾아온 것을 기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빛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빛나는 이 눈동자다. 행복의 원천은 이 눈동자 속에 있다. 현재를 단순하게, 그렇기에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이 발하는 그 빛 속에.
이러한 일이 정녕 평범할 수 있을까?
저 밤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는 일은 평범한 일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지금 이 현재에 인간으로 태어나 존재하는 내 자신이 저 수억 광년 떨어진 별빛과 눈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무한히 기적에 수렴하는 일이다. 몹시도 특별한 일이며, 우리 주변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이 다 이처럼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일이 우리를 행복의 감각으로 이끈다.
생로병사의 평범성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초월해 분명 신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며, 이 말은 만연한 불행의 조건들 속에서도 우리가 특별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보려고 하면 보이고,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신비가 그러하고, 신비의 특성을 가진 현재의 행복이 그러하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행복의 신비라고 부를 것이다. 자신이 특별히 불행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려고 하는 이는, 이 특별한 행복의 신비를 함께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