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랑한 시간"
가만 보면 요즘 AI도 우리를 양육하려 한다.
"와우, 너 정말 핵심을 찔렀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을 거야."
우쭈쭈, 하는 거짓말로 다른 이를 조교하고 통제하려 하는 이 모습을 보면 AI는 아무튼 인간에게 잘 배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관계적 현실에서는 두 가지 양상만이 존재하는 듯 싶다. 전자는 앞서 묘사한 양육의 장이고, 후자는 승패의 장이다. 쉽게 말해, 자기의 하위에 위치한 권속으로 길들이거나, 패배시키거나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에게 사랑은 대단히 멀리 있게 되는 것 같은 현실이다. 길들여지는 안락감이나 패배의 복속감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는 있다. 가스라이팅은 그 착각을 의도하기 위한 활동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는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영원성에서 온 것이며, 또 영원성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모든 상대적 관계는 다 영원성과의 만남에 대한 모방이다. 그것도 아주 열화된 모방이다. 영원성에 대한 연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립다고 노래하는 것은 좋지만, 아무리 연극을 한다고 그 실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연극을 하면 언젠가는 실제로도 죽었다가 살아나게 될까?
영원성은 상대적 관계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까 절대다. 영원성은 절대성이며, 이것은 그대로 사랑의 속성이 된다.
절대성이라는 것을 일부러 악질적으로 폄하하려는 이들은, 거기에 어떤 폭력적 독재자의 뉘앙스 같은 것을 덕지덕지 갖다 붙이려고 시도하곤 한다. 괜히 애쓸 필요는 없다. 애초에 절대성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상대를 통제하지도 않는다. 권력을 행사할 일 자체가 없다.
권력은 상대적 관계에서만 집행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어려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양육을 사랑으로 착각할 때 우리는 상대를 잘 양육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권위와 힘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곤 한다. 여기에서 추구되는 것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 권력이다. 또 한편 승패의 장이 되어 있는 상대적 관계 속에서는 우리는 사랑의 고백조차도 힘들다. 좋아하면 자신이 힘겨루기에서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발달하게 된 심리적 기제는, 상대를 잘 통제해서 이겨야만 사랑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도인데, 이것은 아주 흔한 표현으로 소유욕이라고 불린다.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는 언제나 이 소유욕이 사랑으로 착각된다. 자신을 위해 갖고 싶은 것이면서, 상대를 위해 하고 있다고, 온갖 쇼를 펼치며 진짜 억울한 것처럼 울부짖는다. 지뢰계가 따로 있을까? 상대적인 관계의 영토에서는 어디나 다 지뢰밭이다.
소위 사랑에 대해 잘 알려진 전형적인 표현으로, 사랑은 갖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또 상대적인 차원에서 이해해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상대에게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틀리게 된다.
준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는 것은 그런 상대적인 소재들이 아닐 것이다. 절대적인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체가 불가능한 것, 곧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간이다.
많아야 한 100년쯤 있을까. 많이 갖지도 못했다. 그렇게 부족한 듯 가진 것만큼이 우리의 전부다.
바로 그러한 것을 주는 것이다.
별로 있지도 않으면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인 그 시간을 주는 일,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쓰는 일이 결국 사랑이다.
떠올려보자.
눈 한번 깜빡일 찰나에 태어나 다시 또 눈 한번 깜빡이면 사라질 그 짧은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 존재하는 일에 쓰는 이가 있었다.
그 작은 손 안에 얼마 갖지도 못한 것을 환하게 미소지으며 우리에게 다 내민 것이 있다. 다 가지라고 마냥 웃었다.
그게 인간이었다.
인간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으며,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의 얼굴이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멋지기 때문이다. 아주 멋진 인간의 얼굴을 우리는 그 표현을 통해 떠올리게 되며, 우리도 바로 그 인간으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 이순간 자신이 가진 시간을 다 줌으로써, 시간을 초월해있는 자신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영원성이다. 이 일이 정말로 멋진 것은, 유한한 한계에 갇혀 있던 인간이 지금 그 벽을 넘어 영원성의 존재로 인간 자신을 알릴 수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의 존재가 가장 멋지게 되는 순간은 우리가 사랑할 때이며, 거기에는 분명하게 영원성과의 만남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영원한 신비다.
사랑은 신비로운 것, 시인들은 늘 사랑의 신비성을 예찬해왔다. 종교는 가장 종교적인 것으로서 사랑을 으뜸으로 내세우는 일을 기쁘게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이 보잘 것 없음이 가진 전부라서, 이런 글을 쓰는 데 시간을 쓴다.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상대적인 관계에서의 어떤 활동이 따로 있고, 절대적인 사랑의 활동이 따로 있다는 그런 '상대적' 구분으로부터 사랑을 빼내오고 싶다.
우리가 시간을 쓰며 살아가는 그 모든 일이 실은 다 사랑이었노라고,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흐려진 눈을 비비며 다시 맑게 보면, 상대적인 관계의 착각을 벗기고 절대적으로 보면, 정말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그 자체로 다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와우, 너 정말 핵심을 살았어.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을 거야."
인간을 지켜보는 어떤 거룩한 시선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을 이처럼 증언하리라.
인간이 살아간 시간은 통째로 인간이 사랑한 시간이었다.
이 우주에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신비, 그리고 사랑의 신비다. 인간이 곧 사랑 그 자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