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6

"정죄하는 자여, 정죄되리니"

by 깨닫는마음씨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도한 일들에 비하면 담배 따위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말한 폴 오스터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가 우리 건강에 있어서 담배의 유해함이 사소한 문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결국 도덕적 기만이다. 도덕으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처럼 치켜세우기 위해, 흡연자들을 어둠의 여신이 낳은 사악한 족속들로 만들어 정죄하려는 그 태도.


이러한 이들은 담배연기가 그들의 폐로 침투하기 이전에, 이미 그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실상 그들의 건강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담배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정죄하려는 그 태도가 오히려 그들의 내부를 병들게 한다.


'정죄'라는 도덕적 표현의 잘 알려진 심리학적 표현은 '억압'이다. 이 억압이라고 하는 현상은 단지 생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연하게 우리의 신체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체로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이 다만 스트레스 내지 심인성이라고만 진단되는 신체적 증세들은 이 억압의 기제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언어는 분절시키는 데 능하며, 우리가 언어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먼저 분절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어떤 가상의 경계막을 세운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에반게리온의 AT필드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착각하고 만다. 자신이 언어로 규정한 모종의 도덕적 정죄행위가 그 경계막 밖에만 적용되고, 자신은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이 착각은 또한 우리의 언어생활이 '명사'를 중심으로 분절되도록 구성되어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이를테면, '담배'라고 해보자. 자신의 경계막 안에는 그 '담배'라는 명사가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그렇다면 담배와 관련된 정죄행위는 오직 경계막 밖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것이 완전한 착각이다.


핵심은, 하이데거도 말했듯이, 동사다. '담배'라는 명사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며, '정죄한다'라는 그 동사만이 실은 우리의 현실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작동하는가? 위와 아래,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임의적인 경계막의 안팎으로 동시에 다 작동한다.


이것이 결국 세계의 개념이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세계-내-존재'이며, 세계가 이러하다고 우리가 규정지은 그 일은 여지없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삶의 경험을 깊게 쌓아본 이들은, 어떠한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 상호동시성이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 어떤 법칙인 줄을 눈치채게 된다. 자신이 한 것이 자신이 받게 될 그것이다. 자신이 펼쳐낸 하나의 동사적 움직임은 세계로 나아가 결국 자신을 향하게 된다.


인과응보 내지 카르마라고 쓰니 뭔가 판타지소설 같은 개념이나 유치한 도덕률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저 자연법칙이다. 자연법칙이니 곧 마음의 법칙이기도 할 것이다. 도미노패를 밀면? 도미노패인 자신이 밀리게 된다. 정죄하면? 자신이 정죄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호러쇼처럼 사는 법의 전문가들이다.


늘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래서 생존에의 공포가 치명적으로 밀려오는 이유는 왜인가?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죄하는 동시에, 우리는 정죄당할 심판대에 스스로를 올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이 무섭지 않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자신에게 찾아온 그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외부에서 악마를 찾아내 어떻게든 그것을 심판하고 없애려 하기도 한다. 그러면 무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실제로 일어난 현실은 다시 한 번 정죄의 운동을 강화한 것뿐이다. 그 결과로 더욱 무서워질 것이며, 이것은 끝없는 부정적 피드백을 이룬다.


자신이 무서움에 떨고 싶지 않다면, 자기 밖의 것들을 무섭게 하지 않으면 된다. 정죄하지 않으면, 자신도 정죄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붓다에게서도 또 예수에게서도 이러한 상호동시성의 법칙을 알리는 예화들을 목격한다. 자신이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며 스스로를 드높이는 그 가상의 영광을 통해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망상이다. 타인을 지옥으로 몰아세우면, 자신도 함께 낭떠러지 끝으로 몰린다. 결국 우리는 함께 천국에서 기타를 치거나, 함께 지옥에서 구정물을 들이킬 공동의 운명인 것이다.


어찌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일은 이것이 아닐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일, 그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막을 꽃밭으로 만들 수도,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도, 또 고통받던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도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이 신비의 실용이다.


신비는 저 멀리 있는 고귀한 예술작품처럼 단지 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있는 것만이 아닌, 우리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작은 책상을 밝혀주고도 있는 실용적 빛이다.


나는 신비만큼 실용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돈보다도 실용적이며, 그 효과는 더욱 즉각적이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는 예수의 말은 정말로 옳았다. 빵이 육신을 실용적으로 구원한다면 신비는 영혼을 실용적으로 구원한다. 실은 '빵'과 '신비'라는 이 명사적 분절도 의미없을 것이다. 예수는 그 둘을 동일한 동사로 말했다. 그 동사는 '나누다'이다. 예수는 빵도 함께 나누었고, 신비도 함께 나누었다.


우리가 죄인으로 정죄당하지 않고 함께 온전한 존재로 알려지는 현실을 나누고자 한다면, 그 수혜는 가장 먼저 우리 자신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천국을 펼쳐 나누고자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천국에 입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는 왠지 모르게 조금 신비로워보일까? 그렇다면 신비를 나누려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다. 이 신비의 운동은 이 우주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정도의 위용을 가진 우주적 운동의 방향성을, 이제 우리 자신을 위해, 또 인간 전부를 위해, 가장 좋은 실용의 목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어떻게 쓸 것인가? 신비로의 여행이란 결국 그 쓰임새를 배워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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