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의문이라면 그 반대를 물으면 된다.
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분명해진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며 더는 의문도 아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하든 말든 아무 상관없이 끝은 이미 확정적이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은 실은 선악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선하고 좋은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구였던 것이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면 더는 선하고 좋은 존재가 되지 못할까봐 그 무게는 중대했다.
그러나 끝이 확정적이라면 이 모든 것은 다 바뀐다.
더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선악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악한 이유로 나는 죽게 되는 것이 아니며, 내가 선한 이유로 나는 더 살거나 또는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선악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렇다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분명 저 여명과 함께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들었는가?
나는 자유다.
죽음이 결정되어 있기에, 나는 절대적으로 자유다.
그러나 함정 하나를 더 피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제 우리가 자유롭다는 이 위대한 사실 위에 서서, 그 자유를 어떻게 써갈지를 탐색해봐야 하는가? 그런 것이 어쩌면 '시작'인 것일까?
함정을 뛰어넘자.
끝이 우리의 것이 아니었듯이, 시작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쓰이고 있다.
고민을 하려는 이라면, 그는 자신에게 고민이라는 것도 가능해지는 그 조건이 대체 어떤 지평 위에서 성립되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있다. 이미 태어나있기에 고민하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즉, 그는 이미 시작되어 있다. 무엇이 시작되었는가?
바로 삶이라는 것이.
우리 각자가 삶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미워해도 좋고, 혐오해도 좋다.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을 말해보자.
삶이라는 것은 나와 불가분의 소재다. 삶과 분리된 나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나와 분리된 삶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가장 밀착되어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해해보자. 저 번갯불이 내리치듯이 그렇게 이해해보자.
어떤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것과 친해져야 한다. 그것의 가장 가까이로 다가가 그것을 살아야 한다.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알 수 있다.
내 자신이 살러 온 이유다.
삶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나를 알고자 바로 이러한 내 자신으로 태어나고자 한 그 일로부터, 나의 자유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 자신을 택했고, 이러한 내 자신과 함께 사는 길을, 이러한 내 자신으로서 사는 그 삶을 택했다.
함께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연인이 그러하고, 고양이가 그러하며, 그 중에 으뜸은 나다. 정말로 그것들과 함께 살기 전에는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야말로 신비다. 그 중에 으뜸은 나다. 내가 나와 함께 사는 일, 이것은 가장 위대한 신비와의 동거다.
나는 나와 함께 살려고 이 세상에 왔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도 끝도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와 함께다.
그러니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라, 언제나 내가 함께 있다.
우리는 이 말을 종교적 경전에서, 또 신비체험의 편린으로, 또 어쩌면 홀로 서러운 밤의 환영처럼, 얼마나 무수히 들어보았던가? 또는 들을 수 있기를 간청했던가?
무엇인가 묘하게 뒤집어지고, 전환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와 함께 살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라는 그 신비의 사실을.
이 사실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니 더는 문제가 아니다. 마르셀의 말처럼, 이것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나야 할 신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