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8

"신비는 미용에 좋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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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누구에게나 신비한 능력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신비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일과 같다.


누군가는 그 능력을 직감이라고도, 또 양심이라고도 부른다.


어떻든 간에 인간은 어떤 거짓을 반드시 눈치채고야 마는 것이다. 가짜, 허위, 기만, 위선,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인간은 결코 숨길 수 없는 부조화의 감각을 그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분명 무엇인가 균형이 깨어져 있다. 위화감이 든다.


아무리 선하고 깨끗하고 도덕적인 이미지로 잘 무장해 있다 하더라도, 온갖 바이럴 마케팅과 자본을 동원해 정말로 그런 척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 거짓됨을 꿰뚫어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기다, 라고.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이를 부조리의 자각이라고도 표현하며, 이렇게 부조리를 자각할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실존의식이라고 말하곤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거짓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리고 동시에 거짓이 자신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는 생리학적 기제다.


니체가 일찌감치 지적했듯이, 참과 거짓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위생학이다. 참된 것은 생명을 건강하게 활성화시키며, 거짓된 것은 생명을 억압한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의 심리치료론으로 완벽하게 지지된다.


우리의 정신은 왜 병이 드는가?


어린 시절 엄마의 불안정 애착의 양육 때문이 아니고, 트라우마 때문이 아니며, 부당한 사회정치적 악 때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을 쫓고, 심지어 그 거짓을 추종하며 신봉하고 있기에, 우리의 정신은 고통받는다.


우리가 거짓을 쫓는 대표적인 방식은, 자기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는 일로 일어난다. 쉽게 말해,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그런 사람인 척하는 일이다. 오늘날에는 이 방식이 아주 변태적인 차원에서 적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만약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더 많은 이들이 자기를 그런 사람이라고 보아주기만 한다면 자기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다고 믿는 오컬트 주술의 방식이다.


곧, 허구의 이미지로 다른 사람을 먼저 속이는 일에 성공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으리라 믿는 저질의 기획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인간은, 하늘과 땅을, 또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만은 절대로 속일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신비가, 인간이 자신을 속이려는 그 기만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인간이 거짓의 이미지로 자신을 속이려는 그 일을 우리는 억압이라고도 부른다. 아무리 자유롭고 선량한 자기이미지로 어떤 좋은 것을 펼쳐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억압이 아닌 것은 아니다. 모든 억압은 다 실제적인 자신을 부정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억압은 무게이며, 하나의 거짓말이 그것을 지속하기 위한 더 많은 거짓말을 낳듯이, 억압의 무게도 갈수록 무거워져 실제의 자신을 더 힘겹게 짓누르게 된다. 대개 돈을 가진 이들은 돈의 힘으로 거짓의 자신을 취하면서도 억압의 무게는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믿곤 한다. 이 또한 착각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써서 그런 척 연출하더라도, 실제의 자신이 보잘 것 없게 경험된다는 체험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기기만의 일에 돈을 쓰는 만큼 실제의 자신은 더 하찮게 경험된다.


우리 대다수가 고통받는 이유, 즉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대개 이 억압이며,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더 무겁게 부과한 노역이다. 단언컨대, 거짓의 자신을 유지하려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힘든 일이다.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고통받을 때, 우리 안의 신비는 더욱 작동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실은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신비는 거짓을 알아보는 빛을 밝힘으로써, 거짓이 낳은 억압의 무게를 일소한다. 분명하게 신비는 억압의 해소제다. 이렇게 신비 앞에 거짓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 더는 거짓에 동조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멈추게 될 때, 인간은 본연의 건강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물론 요즘에는 '억까'라고 불리는 현상도 있다. 자기기만이 너무나 만연한 현실이기에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이것은 일부러 거짓에 힘을 제공함으로써 거짓된 것을 더 번성하게 하는 저열한 방식이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이 일을 만든다. 참된 것 앞에서 자신이 현재 참되지 않음에 수치심을 느끼는 이들이, 오히려 거짓의 세력을 강화함으로써 참됨을 약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면 수치심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이라 믿으며.


흡사, 자기 앞에서 거울을 치우면, 이 세상에서 거울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망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우주에서 거울이라는 것을 다 없앤다 하더라도, 결코 없앨 수 없는 가장 맑고 투명한 거울은 인간 안에 있다. 그 거울이 언제나 인간 자신을 비춘다.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그 거짓의 거짓성을 비추어냄으로써, 결국 온갖 거짓말에 가려져 있던 인간 본연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치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이 입고 있던 광대옷의 조악함이 더 높은 해상도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함께 드러나는 것은 조잡한 광대옷으로도 결코 숨기거나 가릴 수 없었던 인간의 그 어여쁜 얼굴이다.


인간이 건강할 때는 그 살결에서 빛이 난다. 거짓으로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인간, 자신을 속이려 하지 않는 인간의 얼굴이 그렇다. 그 빛은 하얀 척, 착한 척, 순수한 척하는 그 모든 가식과 위선으로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인간 본연의 환한 빛이다. 이 내면의 신비에서 유래한 빛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우주에서 가장 어여쁜 존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거짓된 것을 추종하며 지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못생겨질 팔자다. 그 골격의 생김새가 아무리 유려하다 하더라도 거짓에 봉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부조화스러운 기운이 그들을 에워싼다. 유행하는 비싼 아이템들을 덕지덕지 그 몸에 붙여보아도, 또는 반대로 자신이 선량하고 소소한 행복의 킨포크 전도사인 양 담백한 미니멀리즘 흉내를 내보아도, 거기에는 늘 존재의 응달이 있다. 어딘가 일그러지고, 비틀리며, 그 속이 배배 꼬인 심산이 유감없이 표면으로 노출되고야 만다.


천박하다, 촌스럽다, 유치하다, 우악스럽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거짓에 일조함으로써 못생겨진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들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비의 빛이란 매우 섬세한 성질의 것이기에, 그것을 잃은 인간은 몹시 거칠고 투박한 성정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실은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예쁘고 멋있어보이는 남들을 흉내내고 따라하며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어보기도 하지만, 그 모방의 행위는 오히려 그들의 투박한 촌스러움을 강화할 뿐이다.


인간의 미용은 아주 지대한 부분에 있어 정신건강의 문제이며,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거짓의 지지자로 만드는 일을 조속히 멈출 수 있는가의 그 일에 달려 있다. 즉, 거짓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아니 이미 알아보고 있는 그 내면의 눈이 비추고 있는 바에 우리가 정직하게 동의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의 존재가 아니라, 온전하고 아름다운 참됨의 존재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 거짓으로 위장하지 않은 실제의 자신의 손을 붙드는 일이다. 그러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을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하찮은 실제의 자신 따위는 찾고 싶지도 않다고 절규할 필요도 없다.


신비가 이미 가장 환한 빛으로 비추고 있으며, 신비의 빛이 스며들어 있는 그 얼굴은 난생 처음 보는 가장 귀한 이의 얼굴로 목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였구나, 이토록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경외의 감탄사로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면, 신비는 제 일을 한 것이다. 신비는 인간을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하지만, 인간존재의 미용도 분명 그 주력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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