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행자 #9

"내가 제일 똑똑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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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똑똑해."


오늘날 어쩌면 이 말은 저주이리라.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누구나 다 카메라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유튜버들만이 아니다. 무슨무슨 변호사, 무슨무슨 셰프, 무슨무슨 공연기획자까지, 저마다 다 어떤 중요한 사회적 명사이자 지혜로운 현자라도 된 것처럼 인생훈수 한 말씀씩을 거든다. 고객 응대할 시간에 무슨 시골영감 처음 타는 SNS놀이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일이 수익창출에도 더 유리한 시대이기 때문인 것일까.


발달심리학에서 도덕성 발달이 인지능력의 발달과 어느 정도 비례한다는 것을 애써 부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 "내가 제일 똑똑해."라는 이 말은 "내가 제일 선량해."의 뜻을 함축하게도 되었다.


어떻든 많이 떠들고, 제일 똑똑한 것처럼 보이면, "와, 저 사람 인품이 되었네." "거 사람 참 진국일세." "그저 빛XX." 같은 아주 전형적이고 고루한 찬사를 대중들로부터 얻게 되는 것을 볼 때, 이 사회적 성공전략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무척 유효하다. 사회라고 하는 허구의 현실에서 계급을 높이려면 마찬가지로 허구의 논법에 강해야 하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재의 차원에서는 정말로 허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종류의 똑똑함은 신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용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혹자들은, 이를테면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의 켄 윌버 같은 인물은, 인지능력의 발달이 소위 신비와 관계된 것 같은 영성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 이성의 합리성을 거치지 않은 영성은 아직 제대로 된 영성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지성적 똑똑함으로 결국 신비에 가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들을 고전적으로는 영지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주술적 오컬트의 주요세력들이다. 바벨탑의 후예들. 인간이 언어와 이성의 힘으로 신과 같아지기를 꿈꾸었던 이들이다.


그 반대편에는 물론 탑을 부수던 이들이 있다. 기와도 깨고, 불상도 뽀개며, 경전도 불지르던 이들을 동아시아에서는 선사들이라고 불렀다. 서구의 사상사 속에서는 실존주의자들이 유사한 일을 했다. 이들이 야만적인 반지성주의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보이던 태도는 탈지성주의다. 즉, 지성으로부터의 초월을 이들은 기획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저 유명한 책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의 의미를 우리가 떠올릴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아주 쉽게 말하자면 결국 이럴 것이다.


"똑똑해야 깨달을 수 있다" VS "똑똑함을 초월해야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도식을 제시하면 누구나 후자가 옳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 그러한 '앎'을 알고 있는 그들의 실제적인 태도가 그런 것은 아니다. 말은 동의하는 척하면서도, 대부분 그 실천의 태도로서는 전자를 고집한다.


그것은 결국 무엇에 대한 고집일까?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집이다.


자신이 과거에 낸 성적, 자신이 과거에 입학한 학교, 자본의 축적과도 같이 자신이 과거로부터 누적해 저장해온 성공적인 정보들이 자신을 만들어준다는 착각이 이 고집을 낳는다. 물론 이 허구의 내러티브는 마찬가지로 허구인 사회 속에서는 작동한다. 그 허구가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의 차원, 곧 신비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이 또한 쉽게 말해, 자신이 서울대에 갔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울대에 간 그 방식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신비에 접촉하는 것이다. 신비를 향한 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왜인가?


우리가 무엇을 보든 다 과거를 갖고 와 그 필터를 통해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현상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삶을 얻는다' '거듭난다' 등과 같은 비유적 표현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과거에의 집착을 놓은 것이다.


과거가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준다는 착각을 버린 것이다.


그러면 길이 보인다.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그 길 위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도 보인다. 자신은 과거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지금의 이 현재가 계속 새롭게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를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짜 똑똑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지금 눈치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축적에만 의존해 있는 이들은 똑똑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는, 똑똑하고 있지 않다.


현재가 늘 완전히 새롭다는 실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만이 똑똑하고 있다.


신비의 문을, 바로 그렇게 두드리고 있다.


그 일을 그토록이나 사랑한다.


우리가 학제적으로 '초월'이라고 쓰는 표현이 그 함의에 있어서는 거의 언제나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일은 유익하다.


똑똑함을 초월한다는 것은 곧 똑똑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신비의 문을 두드리는 그 일을 인간이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진짜로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과거의 축적된 정보자원에 의존해 똑똑한 척만 하고 있는 이들은 신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만을 주장하기 위해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있다. 그러니 눈앞의 신비를 잃는다. 자기 자신만 바라보다가 사랑하는 연인을 잃게 되듯이.


더 실증적으로도 부연해보자.


자기가 똑똑한 척하는 이들이 가장 하지 않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모험이다. 이를테면, 커피 원두에 대해 자기가 최고의 원두를 알고 있는 척하는 이가 있다. 자기의 똑똑함으로 제일 맛있는 원두를 선별해서 취득했다고 그는 말할 것이다.


진상은 어떠한가? 최고의 원두를 얻은 자신의 똑똑함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대체 얼마만큼의 원두에 도전했는가? 얼마나 깊이 원두의 세계를 모험했는가? 또 실제로 바다를 건너, 협곡을 지나, 이 세상 끝까지의 원두를 향한 그 여정을 그는 정녕 떠나본 적이 있단 말인가?


유튜브와 나무위키에서 떠드는, 또 자기가 우주 최고의 커피마스터라고 자임하는 또 다른 똘똘이 스머프들의 고작 몇몇 얘기들을 종합해서는, 자신이 최고의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정말로 아니리라고 그는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삶'을 향해 모험하지는 않으면서,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앎'만을 붙들고, "내가 제일 똑똑해."라며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척하고 있는 이 일은 정말로 인간에게는 저주다.


또 한편으로, 과거에 자신이 어떤 모험을 했는가도 관계없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영광에만 또아리를 튼 채 인생훈수나 두고 있다면, 그는 살아도 죽어있는 존재다. 화석이다. 통속적인 표현으로는 꼰대라고 일컬어지곤 한다. 요즘에는 영포티도 그 대체용어로 쓰이는 경향을 보인다. 평균수명은 오히려 길어졌는데, 인간이 죽어있는 것처럼 살게 되는 기간은 더 빨리 맞이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지적으로만 똑똑한 척하는 이들이 신비에 접촉함으로써 그 자신을 더욱 살아있는 존재로서 살게 된 유래는 인류사의 어느 경우에도 없다. 그러한 똑똑함을 초월한 이들만이, 곧 정말로 똑똑한 이들만이 스스로를 늘 새로운 활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했다. 그것은 신비의 문을 똑똑, 하며 두드린 이들에게 주어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 것이다.


신비로부터의 선물은 언제나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준비되어 있었으며, 신비를 향해 모험한 이들이 그것을 얻었다. 그들은 정말로 제일 똑똑,한 이들이었으리라. 사랑하는 것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그 사랑을 얻는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삶에서의 영원한 진실이며, 고로 살아있는 신비의 사실이다.


"내가 제일 똑똑,해."


그리하여 이 말은 이제 저주에서 풀려나, 신비를 향해 떠나는 인간의 기쁜 고백이 되었음이라. 크리스마스의 캐롤처럼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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