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예언자"
누군가는 위대한 이상의 별을 멀리에서 찾아내려 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땅에 떨어진 별을 가까이 관심할 것이다.
소심한 이들이 그러하다.
소심하다는 표현을 자기의 성격특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 소심하다는 것은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우리의 태도를 의미할 뿐이다. 작은 마음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그 섬세한 태도를.
내가 소심한 것이 아니다. 나는 작은 마음도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전통적으로 예언자의 태도라고 말해진다. 아주 결이 고운 작가들에게서도 이 태도가 엿보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에게서 발화된 아주 작은 마음의 표현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귀속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신의 말씀이다. 그래서 신탁이며, 계시이고, 예언이다. 그러니 소홀히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심리상담자들이 이 예언자의 태도를 수련한다. 내담자가 회복하고 싶은 그 자신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내담자가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 스토리텔링하고 있는 그 거창한 내러티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담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흘려보내곤 하는 그 작은 말 속에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땅에 떨군 그 말을 주워서, 흙먼지를 털고, 정성스럽게 닦아, 다시 상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상담실이 그 빛으로 돌연히 환해진다. 그 말 속에 담겨 있던 아주 귀한 마음이, 그 신비가, 지금 스스로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내담자도 깜짝 놀란다. 자신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아니 알았지만 못나거나 나쁜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애써 무시했던 까닭에, 이토록 아름다운 마음이었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글의 묘사처럼 낭만적으로 수월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언자의 숙명, 아니 임무는 용기를 요한다. 예언자를 예언자답게 만드는 것은 그의 비전이 아니라 실은 그의 용기다. 이것이 곧 모든 예언자는 결국 소심한 예언자일 수밖에 없는 그 현실을 지시한다.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 느낌을 말하지 않고는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든다. 이대로는 어떤 부조화스러운 연극 속에 있는 것 같이만 경험된다.
그러나 망설여진다. 자신도 그저 무시하거나 흘려보내면 평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히 말해서 문제를 만드는 것은 아닐지 염려가 된다. 모른 척하려면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이다. 이 작은 것을 놓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 이 모습이 너무나 소심하게 생각되어 오히려 성가시고 불편하다.
그래서 상담사들뿐만이 아니라 대체로의 우리는 소심한 예언자가 아니라, 그저 우물쭈물할 뿐인 소심함으로만 남고 만다. 그 모습을 자신의 성격특성으로 우울하게 가져가게 되는 일은 덤일 것이다.
자신만 우울해진 것일까? 신비도 함께 우울해졌다. 신비는 그 빛을 잃고 그저 무감한 돌덩어리가 되었다. 우리의 우주는 잿빛이 되었고, 별도 인간도 그러한 우주를 구성하는 무기물로만 남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분명하게 말하리라.
모든 인간은 다 이 예언자의 임무를 갖고 이 세상에 왔으나, 자꾸만 좌절해서 우울하던 중이라고.
이 좌절은 소심하려고 하지 않아서, 곧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려고 하지 않아서 일어난 좌절이었고, 그 좌절의 결과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이 쪼잔하고 답답한 존재인 것처럼 경험하게 되는 현실을 얻었던 것이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한 결과가 그대로 자기 자신이 작은 것처럼 홀대되는 일을 낳은 것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예언자로 다시 기억해본다면, 예언자의 입에서 말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그 마음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하게 대접하라고 맡겨진 것이다.
작은 몸으로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생명을 떠올려보자. 부모가 맞이하게 되는 그 작고 소중한 아이들은 부모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부모가 귀하게 대접하라고 하늘로부터 부모에게 맡겨진 것이다. 인간의 본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은 이처럼 다 하늘의 것이라는 바로 이 상징이 아니던가.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정말로 작은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하게 영접하라는 이 예언자의 임무를 맡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귀함을 아는 것이며, 그러한 존재의 신비를 가슴 깊이 살아가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을 때, 이는 존재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도 그 존재의 뜻이 얼마나 깊은지를 눈치챌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이 스스로 귀한 그 뜻을 안다. 이 우주 전체가 그 귀함으로만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배하며 노래부른다.
그래서 인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름이라고, 신에게 호명된 것이다. 그렇게 이쁜 짓만 하니까. 인간이 있어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은 그 빛이 한층 더 환히 밝혀지며, 그렇게 인간은 존재의 자랑이다. 가문의 영광이다. 이 우주의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은, 그 빛을 자신의 눈동자 속에 선명하게 아로새길 인간이 있어서다.
또 땅에 떨어진 별이 있다면, 정성스럽게 닦아서 자신의 가슴속에 담는다. 마음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제 말이 되어 인간의 밖으로 나올 때,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한 그 작은 별의 영광을 하늘은 영원한 기쁨으로 저 밤하늘에 올릴 것이다. 온 우주가 이처럼 인간이 가슴 깊이 사랑한 것들로 가득히 채워져, 진실로 보시기에 좋았음이라.
신비, 신비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적막한 우주에도 저 별들이 환히 빛나고 있다는 것이 궁극의 신비가 아니다.
저 작은 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이 궁극의 신비다.
이 소심한 예언자가.
이 모든 우주가 사랑으로 가득 차리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음을 고이 받치고 있는 그 작은 손길로부터, 이 소중한 이름을 소리내어 말해볼 그 작은 용기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