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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가위바위보

신, 집단, 실존의 역학관계

by 깨닫는마음씨



오늘날 신이라는 단어는 무용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신이 죽은 시대'가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이라는 외연적인 표현이 거세된 만큼, 신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그 실제는 뒤로 숨어 더 은밀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신의 실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다. 그것은 정치다. 그것은 민족이다. 그것은 전체다. 그것은 구조다. 그것은 공동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보편적 이성이다. 그것은 집단무의식이다. 그것은 원형이다.


즉, 그것은 집단정신이다.


헤겔, 융, 윌버와 같은 이들은 정확했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군집적 공동체가 문화적 문법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그 집단정신이 바로 신이다. 집단정신은, 그에 부속된 이들의 삶을 규범짓는 정의로운 법관이자, 안전하게 인도하는 목자며, 성공적으로 생존하게 하는 양육자다.


여기에서 집단정신이란 곧 집단을 대표하는 정신이다. 그래서 신은 언제나 한 집단의 신일 수밖에 없다. 민족마다의 신이 있고, 가족마다의 신이 있으며, 공동체마다의 신이 있다.


이처럼 집단은 언제나 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하나의 집단 속에서, 그 집단의 대표자가 되려는 이들, 그들은 곧 신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이다. 집단을 대표하는 집단정신을 체화하여, 해당집단의 실체적인 신으로서 군림하려는 것이다.


집단의 신이 되려는 이와 같은 의도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는다. 자신이 더욱 해당집단의 집단정신을 잘 체화하고 있는 대표자임을 내세우며, 신도를 유입시키기 위한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 속에서, 자신이 신이 된다면 반드시 경쟁자보다 더욱 좋은 신이 될 것이라는 맹약은 항시 선포된다. 집단의 맥을 잇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통성의 문제도 여기에서 생겨나며, 해당집단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정의의 문제도 여기에서 생겨난다.


즉, 모든 사회적 갈등의 소재는, 집단의 신이 되려고 하는 이 기획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여기에서, 신이 되려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반대편의 적은 악신(惡神)으로 상정되며, 자신은 그 악신에 대항하여 집단의 번영과 안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으로 자기규정된다. 그럼으로써 끝내 그 악을 집단 밖으로 추방해낸 뒤에도, 여전히 집단을 위협하는 외부의 악의 존재를 만들어가며, 자신이 성실한 노병과도 같이 정의롭고 자상한 '유일신'임을 끝없이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정치가 대체로 이러하다. 오늘날의 정치는 진실로 신들의 전쟁이다. 라그나뢰크다.


그리고 무협지의 구조가 대체로 이러하다. 이 모든 신들의 전쟁은 통속적인 무협지의 이야기와 같다.


영웅담에 도취된 아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영웅담에 도취되는 것일까? 아니, 영웅담에 도취되는 아이들은 대체 어떠한 아이들일까?


이것은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다.


이것은 집단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를 시사하는 까닭이다.


영웅담에 도취되는 아이들은, 가장 약한 아이들이다. 즉, 그 자신을 대단히 취약하게 느끼는 아이들이다. 자기 혼자서는 이 세상 앞에 무력하다고 경험하는 아이들이다.


즉, 자신의 몸뚱아리가 부끄러운 아이들이다.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인 몸을 가진 개인이라는 사실을, 덧없고, 초라하며, 수치스럽게 느끼는 아이들이다.


"개인의 몸은 약하나, 집단의 몸은 강하다."


이 아이들이 갖는 이러한 생각은, 더 어린 시절 부모와의 융합을 통해 얻었던 힘의 이득들로부터 생겨난 생각이다. 그래서 이들은 힘을 얻기 위해, 집단을 부모와 동일시하며, 동시에 그 부모-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곧, 집단의 대표자가 되어,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 집단과 동일시된 존재라는 현실을 취득하고자 하게 된다.


이것이, 신이 만들어지는 그 이유다.


집단 속에서 자신을 무력하게 느낀 이가, 신이라는 집단의 대표자가 되어, 이제는 그 집단을 선도함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유 속에는 이미, 신이 되고자 하는 그 개인이 왜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 또한 암시된다.


바로, 집단이 그를 두렵게 한 것이다. 그가 그저 그 자신인 개인이기 때문에 무력해진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개인됨을 무력함의 증거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집단과 신의 관계는, 일종의 애증관계와도 같다. 유지하면서, 동시에 극복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 영웅담의 실체가, 결국 하나의 일그러진 애증관계와 같다는 사실을 눈치챈 선각자들이 있다.


그들은 실존철학자들이라고 불린다.


실존의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한다. 신과 집단밖에 없던 애증관계, 즉 양자구도는, 이제 실존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삼자구도로 전환된다.


실존은, 아주 쉽게 말해서, 그 어떤 신보다도 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모든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붓다 앞에 엎드렸다는 은유는, 바로 이 실존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준다.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정치도, 어떠한 민족도, 어떠한 전체도, 어떠한 구조도, 어떠한 공동체도,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어떠한 보편적 이성도, 어떠한 집단무의식도, 어떠한 원형도, 곧 어떠한 집단정신도 개인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에서부터 무수한 실존철학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강조된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그러한 집단정신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이제 개인의 시대가 왔다는 새시대의 개벽의 선언이었다.


현대는 분명하게 개인의 시대다.


이 몸뚱아리의 시대다.


신체성의 담론, 타자의 담론, 상호관계성의 담론 등, 현대적 사조에서 핵심적으로 묘사하는 그 모든 담론들은 전부 다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담론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담당했던 역할이기도 하였다.


모든 선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던 핵심은 이와 같다.


"당신은 중요합니다. 당신이 전부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잘 알려진 표현처럼, 이렇게 말했다.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네 자신을 알라."


인간이 군집의 행동양식을 따라 집단정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조차, 개인이라고 하는 삶의 빛을 드러내기 위한 선각적 활동은 이미 존재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실 선지자들은 신의 권속이 아니라, 신의 대항자들이었다.


신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집단이 만든 '허구'라는 사실을 꿰뚫어봄으로써, 그저 가장 취약하게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아이가 만든 '판타지'라는 사실을 꿰뚫어봄으로써, 신의 권위를 몰락시키는 반역자들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집단정신의 대표자를 곧 우상이라고 불렀다. 집단정신과 동일시되어 자신이 신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행위를 자기우상화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우상을 때려부수려고 해왔다. 그럼으로써 개인의 빛을 개방하려고 해왔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일관적으로 해온 일들이다.


실존철학은 현대에 들어와 분명하게 이 선지자적 역할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선지자의 운명 또한 함께 이어받았다.


선지자의 운명,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돌을 맞는 것이다. 신을, 곧 우상을 잃어 화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단은 실존을 죽임으로써, 곧 자신이 개인일 수 있는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양심은 집단 속에서도 결코 감출 수 없는 개인의 빛이다.


이 빛을 잃게 됨에 따라, 집단은 더욱더 신의 노예로 전락한다. 개인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해 창발된 실존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삼각구도 속에서 오히려 실존이 소외되면, 그 몰락은 더 가속화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분명 신, 집단, 실존의 삼각구도가 만드는 역학관계다. 가위바위보와 같다.


실존은 신을 이긴다. 그러나 집단에게 진다.

집단은 실존을 이긴다. 그러나 신에게 진다.

신은 집단을 이긴다. 그러나 실존에게 진다.


이와 같다.


그래서 실존은 집단을 무서워하고, 집단은 신을 무서워하며, 신은 실존을 무서워한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까닭에, 그것을 가장 소외하고 무시하려고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실존은 집단을 수준낮은 것처럼 하대하게 되고, 집단은 신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을 지지하게 되며, 신은 실존을 특이한 개인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하게 된다.


그 대신에 각각의 성분들은, 자신들이 이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즉, 실존은 신에게, 집단은 실존에게, 신은 집단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럼으로써 실존은 마치 신을 추구하는 고상한 구도자처럼, 집단은 실존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열광적 숭배자처럼, 또한 신은 집단을 위해 봉사하는 인자한 마법사처럼, 스스로를 굴절시키게 된다.


실존주의의 몰락은, 이처럼 집단에 의한 실존의 영웅화라는 굴절로 인해, 그리고 그 굴절에 대한 실존의 동의에 의해 야기되었다. 영웅이라는 것은, 신을 죽이고 자신이 대신 그 신의 자리에 앉는 존재다. 결국 실존이 신이 됨으로써, 개인의 가능성을 개방하고자 비로소 창발된 삼각구도는 깨어지고, 개인은 또 다시 신-집단이라는 오래된 애증관계 속으로 용해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실존이 집단에 의해 세련되게 죽임을 당하는 방식이며, 곧 실존주의가 종말로 흐른 이유다.


그러나 하나의 시대적 유행으로서의 실존주의가 그렇게 역사적 종말을 맞았다 할지라도, 실존철학의 생명은 지속되었다. 오늘날에 들어와, 실존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꽃을 피우며, 실존철학의 핵심인 개인성의 개화를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 선지자적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 핵심적인 목소리는, 결국 인간 자신이 착각해온 이 몸뚱아리의 초라함이, 사실은 가장 큰 존재의 비밀을 개방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하나의 몸을 가진 개인은 유한하다. 그러나 집단정신은 무한하다. 그렇게 개인은 죽지만, 집단정신은 죽지 않는다. 즉, 신은 죽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다.


개인은 반드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며, 그 사실 위에 서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무엇보다 삶이 소중하다. 삶을 귀한 것으로 체험한다. 그렇게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승인한다. 이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귀한 존재로 영접한다.


이처럼, 개인은 죽음의 운명 속에 놓여 있는 까닭에, 역설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집단정신은, 곧 신은 죽지 않기에,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봉사하고, 헌신하며, 인도할 뿐, 그렇게 사랑인 척 기만할 수 있을 뿐, 정말로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살게 한다는 것이다. 가장 고유하게 난 그대로, 가장 온전하게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삶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 갈매기의 비행은 갈매기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죽지 않는 것은 살지도 않는 것이다. 집단정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집단정신은 살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집단정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애초 살아 있지 않은 것이, 삶에 대해 도무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실존은 바로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개인이 정말로 배워야 할 곳은 그 자신의 삶이지, 집단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개인이 정말로 따라야 할 것은 바로 스스로의 삶이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정확하게 붓다의 이야기이며, 또한 예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로를 사랑하라."


이와 같은 예수의 이야기는 '서로'라고 하는 개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서로'는 단순히 집단 속의 구성원간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함축하는 것은 바로 '타자'다. 집단정신의 질서가 만드는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결코 복속되거나 통제될 수 없는 타자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이러한 표현에 와서는, 더욱더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집단정신이 설정하는 민족, 공동체, 우리편 등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을, 즉 집단정신의 바깥에 있는 것을, 예수는 사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윤동주 시인의 고백처럼 이렇게도 형상화된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다시 한 번, 유한성이며, 그 유한성에 대한 사랑이다.


오직 살아 있는 몸뚱아리를 가진 개인이기에 비로소 발현 가능한 그 존재의 빛에 대한 진술이다.


죽어가는 것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 곧, 살아 있는 것만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실존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삶이 좋다는 것이다. 집단정신으로 결코 통제될 수 없이 언제나 그 바깥에 놓여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래서 실존의 운동은 언제나 밖을 향한다. 자유를 향한다. 나로서 살아갈 자유를 향한다.


그래서 실존은, 보편적 군집의 점액질 같은 늪 속에서 개체적 실존을 자각함으로써, 늪 밖을 향한 이 목소리를 목청껏 드높이는 것이다.


"여기 사람 있어요! 여기 나 있어요!"


사람이라는 표현은 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 때만 반드시 유효한 표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영롱한 단어는 또 다시 집단정신을 지지하는 하나의 아름답기만 한 수식어로 몰락하고 만다.


이 몰락을 회복하는 길은 몰락의 구조를 상쇄하는 것이다. 곧, 몰락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애증의 양자구도가 실존의 출현으로 인해 삼자구도를 이루게 되었을 때, 이 삼자구도는 상호적 상쇄를 위한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가위바위보가 계속되면 결국 가위바위보 집단 속의 누구도 전적으로 이길 수 없는 현실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가위바위보의 지속은 결국 가위바위보를 멈추게 되는 현실을 창발한다.


그리고 집단정신의 공터에서 가위바위보만을 반복하던 이들은, 이제 각자의 길로, 각자의 꽃을 피우기 위해, 각자의 삶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집단적 가위바위보의 현실에서 비로소 나의 현실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실존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실존은 또 하나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진정한 신이 되려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게 구원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며, 끝내 착취자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은 신을 상쇄함으로써, 집단을 상쇄하고, 이로 인해 결국 개인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는 연쇄를 유발하는 조커와 같다. 판 자체를 통째로 뒤집어서 무효화시키는 패다. 곧,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해내는 일발역전의 패다. 언제나 사람을 나로서 살리는, 곧 나라는 사람을 살리는 기적의 패다.


"가위바위보!"


"나!"


이처럼 나를 내면 집단정신의 게임은 멈춘다. 무엇을 내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나다. 곧, 무조건적으로 존귀한 것은 바로 개인이다. 개인의 시대, 즉 '내가 사는 시대'는 이렇게 개화되었다. 시대를 알리는 저 종소리는 분명, 나를 위해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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