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실존적 개념들을 만화의 형식으로 쉽게 전달하는 일본의 작가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뢰전 가이』의 도입부를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고립시켜라."
이것은 이른바 '실존적 거리두기(existential distancing)'다.
거리(distance)는 원래 실존을 위한 것이다. 사회를 위한 것은 거리(street)였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도 끝내 거리(street)가 아닌 거리(distance)를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즉, 사회의 구성논리를 사회 스스로가 부정해야 하는 자기해체의 목소리를 발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즐거운 예감이다.
다가올 현실의 변혁을 예감하게 하는 기쁜 소식이다.
유발 하라리와 같은 학자들은 분명하게, 코로나 사태 이전의 세계과 이후의 세계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 속에서는, 먼저 개인이 강조되며, 동시에 역설적으로 연대가 강조된다. 그리고 이는 지당하다. 개별화가 되지 않으면 연대라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까닭이다.
이 말은, 실존하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로서의 공존은 실현될 수 없다는 말이다. 개별화되지 않은, 즉 실존을 소외하는 이들이 이루는 연대는, 마치 여왕개미를 따르듯이 위대한 민족적 지도자의 의지를 따르는 동일성의 군집체에 불과하거나, 집단성이 만들어낸 임의적인 구조 속에서 최대의 이득을 꾀하는 기생체에 지나지 않게 될 뿐이다.
특히나 정의의 이름으로 구성되는 연대일수록, 이러한 집단주의적 굴절은 두드러진다.
아주 단순하게, 개인은 정의 위에서는 설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말은, 개인은 불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의는 표현 그대로 '올바른 뜻(正義)'이다. 그러나 개인은 '나의 뜻(自意)' 위에서만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올바름을 따라 사는 것이 개인이 아니라, 스스로를 따라 사는 것이 개인이다.
이는 다시 한 번, 개인은 정의와 불의의 층위를 넘어선, 더 근원적인 층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개인은 선악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선악과는 아무 상관없이, 개인은 온전하게 개인이다.
올바름이 아니다. 온전함이다.
고정적인 정의(正義)가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自意)다. 정의(justice)는 단지(just) 얼음(ice)일 뿐이다. 똑같은 모양의 조각들을 양산하는 냉장고의 얼음통에서 얼려진 그 생기없는 복사물들이 내는 얼은 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마왕처럼 상정된 바이러스를 격퇴하는 정의의 용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동안 바로 그 용사를 꿈꾸던 이들이 부르짖던 정의라고 하는 것이 삶에 의해 근본적으로 전복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전복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마왕은 없다. 고로 정의도 없다. 오롯이 나만 있다.'
마왕을 만들어낸 것은, 울타리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만들어진 드높은 장벽들을 지키던 이들이다. 민족, 국가, 공동체 등과 같은 집단주의의 수호자들이다. 그것들을 올바른 것으로 상정하고, 자신들은 그 올바름의 원탁을 지키는 정의의 용사로서 자임해온 이들이 바로 이 수호자들이다.
이들이 정의의 용사이기 위해, 그동안 마왕은 끝없이 창조되어야만 했다.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위협하기 위해, 저 높다란 장벽 밖에서 진격해온다고 하는 사악한 존재들에 대한 전설은 더 극화되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장벽은 더 높이 보강되어갔고, 우리가 올려다본 파란 하늘에도 장벽의 경계는 드리워졌다. 때문에 우리의 시야는 장벽의 높이만큼 갈수록 좁아졌고, 우리는 결국 정의의 용사들이 원한 바처럼, 민족, 국가, 공동체 등으로 알려지는 장벽 속의 집단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시선이 구조에 갇힌 것이다. 개인이 집단에 억압된 것이다.
민족, 국가, 공동체 등의 집단주의만이 전부가 되었을 때, 그것은 그 집단주의가 작동하는 경계의 바깥쪽만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안쪽 또한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바로 나를 망각하게 된다. 그렇게 나를 상실하게 된다.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 즉 시선이 갇힌다는 것은, 바로 이처럼 나를 잃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모든 것 앞에 '나의'라는 수식어가 붙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곧, 나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요성의 근거다. 중요한 것을 창발하는 중요한 것이며, 곧 중요한 것 중의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그 전까지는, 민족의 숭고함과, 국가의 위대함과, 공동체의 진중함이라는 보편적 압력에 의해 억압되고 은폐될 수밖에 없었던 이 사실은, 이제 오늘날 코로나로 인해 가까스로 표면화될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정직해질 수 있게 되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는 오늘날 왜 집에서 나가지 않는가? 이 민족의 구성원들을 지키기 위해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국가의 뜻을 위해서?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나를 안전하게 살리기 위해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왜 밖으로 나가는가?
감옥 같은 현실 속에서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다. 곧, 나를 자유롭게 살리기 위해서다.
이처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나를 위해 하고 있다고 하는 이 정직한 실감이 중요하다. 이 실감만이 우리를 두려운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까닭이다.
코로나는 분명하게 두려움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그 어떤 집단주의의 논리가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집단적으로 신에게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집단의 중추인 국가의 정책을 신봉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중세의 교회론이고, 후자는 근세의 국가론이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에 비해 결코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이 둘은 그저 동일한 집단주의의 논리일 뿐이다.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의 논리다. 두려움 앞에서 그동안 우리는 이 구호를 외쳐온 것이다. 구호를 더욱 크게 외치는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격한 우리 자신의 목소리에 열광적으로 도취됨으로써 두려움을 망각하려고 해온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백날 뭉쳐봐야, 코로나가 그러하듯, 두려움만 더욱 크게 확산될 뿐이었다. 그렇게 더 커진 두려움에 대해, 더 큰 떼창의 목소리를 공급하고, 그럼으로써 두려움은 다시 또 더 큰 크기로 형상화되는, 이러한 역기능적 악순환 속에 우리는 매몰되어 왔다.
이것은,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만든 악순환이다. 즉,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최대한 거세되어야 하며, 우리가 속한 집단이 그 당위적인 거세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낳은 굴절이다.
물론 이것은 일정 부분 기능할 수도 있는 기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주의의 방식으로 두려움의 원인을 거세할 경우, 곧바로 이제는 집단주의가 두려움의 원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곧, 마왕을 해치운 용사가 이제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바로 그 이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려움의 역사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두려움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이 필요하다.
두려움은 집단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려움의 말을 듣는 것이다. 즉, 두려움이 전하고 있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살아야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만은 살아야 된다."
두려움은 가장 신성한 이기주의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한다. 이 신성한 이기주의는 우리의 이기성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만을 어떻게든 반드시 살리고자 하는, 그 어떤 신성한 것의 이기성이다.
즉, 이처럼 두려움이 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의미다.
일개의 작은 몸으로 흩어져 있는 이 나라고 하는 개인이, 흩어진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 곧 삶의 온전한 형태라는 그 의미다.
개인이라 힘이 없어 두려운 것이 아니고, 개인이라 부족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집단이 아니기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개인으로 살게 하려는 두려움의 말을 듣지 않기에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찾아든다. 그것은 이 방향으로 계속 가면 우리가 죽게 된다고 하는 신호와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의 신호를 무시하고 계속 낭떠러지를 향해 갈수록, 신호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두려움의 신호는 거세게 발광하게 된다. 우리를 두려움의 무게로 바닥에 쓰려뜨려서라도, 어떻게든 우리를 멈추게 함으로써 우리를 살리고자 한다.
우리의 오해와는 전혀 다르게, 두려움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는 것이다. 우리를 죽이는 것, 즉 우리로 하여금 낭떠러지로 향하게 하는 것은, 실상 두려움이 아닌 다른 것이다.
정직하게 기억해보자. 우리는 왜 낭떠러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는가?
그것이 올바른 뜻, 곧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집단자살을 하는 레밍스와도 같이, 우리는 집단주의의 정의를 위해, 나라고 하는 개인을 희생하여 죽이는 길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희생으로 인해 집단이 살면, 설령 개인이 죽더라도 그 개인은 집단 속에서 불멸이 될 것이라는 주술적 망상 속에서, 그렇게 자신의 삶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곧, 집단주의의 정의가 우리를 실제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인 두려움은, 정의보다도 더 강력한 세력인 두려움은, 정확하게 그 반대로 알리고 있었다. 개인이 집단 따위를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신성한 이기주의의 이름으로 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두려움의 신성한 명령을 바로 자신을 향한 명령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비로소 하나의 놀라운 현실이 개방된다.
그것은, 누구도 다른 누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그대로의 공존의 현실이다.
바로 이 현실로부터 흘러들어온 공기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거대한 존중감을 우리에게 회복시켜준다.
우리가 그 어떤 집단주의의 논리에도 희생될 수 없듯이, 우리와 집단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누구라도 결코 우리를 위해 희생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그가 우리를 위해 그 자신의 삶이 버려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흩어진 삶, 곧 실존이 공존으로 다시 불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이 공존은 뭉치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임의적인 구조를 이루어, 그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계속 확장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근대 시민사회의 구조가 아니다. 즉,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기능적으로 잘 수행함으로써, 전체의 공동체가 발전하게 되고, 그 발전 속에서 구성원들 역시도 번영하게 된다는 군집의 논리가 아니다.
이러한 공존의 현실은 그 반대로 철저하게 실존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즉,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가장 심원한 깊이를 놓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들이 서로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나만큼이나 너 또한 신성한 이기주의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가장 신성한 것이라는 경외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경외감이야말로 사실 두려움의 본원적인 이름이다.
흩어진다는 것은 멀리 간다는 것이다. 멀리 가면 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더 넓어진다. 이처럼, 너로부터 멀리 갈수록, 너를 볼 수 있는 나의 시야는 넓어진다. 그로 인해, 너를 온전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를 위한 기능이나 역할로 작동하는 너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그 모든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온전한 너로서 볼 수 있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신성한 명령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온전한 존재로 드러내는 일, 이것이 공존의 정확한 의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다. 집단이 되면 언제라도 우리는 서로를 죽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다. 집단을 추구하는 이는, 집단 속에서만, 곧 집단을 구성하는 다른 상대가 있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삶과 죽음의 문제는 표현 그대로 상대에게만 달려 있게 된다. 이를테면, 상대가 집단을 위해 헌신하지 않거나, 집단을 벗어나려고까지 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커다란 위협을 경험한다. 이처럼 자신의 삶과 죽음을 좌우할 수 있는 상대가 두렵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표현 그대로, 우리는 뭉치면 죽는다. 뭉칠수록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 우리를 살린다고 믿었던 원리가 실은 우리를 가장 죽이는 원리였던 셈이다.
우리는 흩어져야 산다. 나아가, 흩어질수록 우리는 정말로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서로에 대한 두려움, 즉 서로에 대한 경외감이 낳은 존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흩어질 때, 그렇게 우리의 시야가 넓어질 때, 우리의 시선이 집단의 억압에서 자유롭게 될 때, 그럼으로써 우리가 감히 나로서 살아날 때, 이로 말미암아 너도 정확하게 살아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나와 너로 흩어져야 정말로 함께 살 수 있다. 실존적 거리두기는 삶의 핵심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은 하나의 기회와도 같다. 변혁의 기회다.
그동안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저주처럼 우리에게 주입되었던 바로 그 삶의 방식, 바로 오롯하게 나를 위해 사는 방식을 정당하게 실현할 기회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나로서 변혁될 기회다. 나를 향한 가장 신성한 것의 명령이, 단 하나의 굴절도 없이 전적으로 나를 향해 행사될 기회다. 그 명령으로 말미암아, 우리(cage)로부터 나라고 하는 것이 자유롭게 해방될 기회다.
그럼으로써, 우리 밖에서, 내가 정말로 너를 만날 그 기회다.
네가 고립된 너라서, 나를 살리고 있었다.
네가 별개의 너라서, 그 자체만으로 나를 살리고 있었다.
네가 나와 아무 관계도 아닌 너라서, 누구보다도 나를 살리고 있었다.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건강하시죠?"
흩어진 것들이 거리(street)에서 만난다. 흩어진 것들 사이에 거리(distance)가 있으니, 경외감으로 고개가 숙여질 공간이 확보된다. 서로에게 인사가 건네진다. 서로가 서로임에 대한 감사가 전해진다.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서로를 살리고 있다는 바로 이 감사의 인사가 나누어진다.
이와 같다.
나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것이다.
그러니,
"고립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