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요"
미성숙한 자신을 싫어하는 그대는, 노련하게 세상물정을 잘 알며,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갑을관계의 주도권을 적극적으로 쟁취해내는 성숙한 모습을 견지한다.
'빠릿빠릿하다.'
그러한 그대가 자주 듣는 칭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보다 중립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다시 묘사된다.
'눈치를 잘 본다.'
톰과 제리에서라면, 그대는 분명히 제리쪽일 것이다. 기민하고, 영특하며, 늘 세상사에서 승리하지만, 언제나 눈치를 보며 사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대여, 그대는 왜 눈치를 잘 보게 되었는가?
이것은 동시에 그대가 왜 미성숙한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대가 아이였을 때, 그대는 그대의 양육자를 많이 좋아했다. 아빠의 등과 엄마의 품을, 그리고 어쩌면 할머니의 젖가슴을 남들보다 조금 더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대가 남들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도, 여전히 그대의 양육자에게 안기고만 싶었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성장한 그대의 몸은 이제 그대의 양육자에게는 조금 버거웠다. 그대가 매달리면 양육자는 큰 힘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품에 달려들기를 좋아하는 말라뮤트를 키우는 주인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대의 양육자는 언제인가 그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힘들다. 언제까지 아이처럼 그럴래?"
"이제 부모를 그만 의지하고, 네 앞길은 용감하게 네가 개척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지?"
"그만 철 좀 들어라. 할머니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또는, 그저 지친 표정으로, 그리고 깊은 한숨으로, 그대의 양육자는 자신의 피로감을 그대에게 가득 전했다.
그리고 그대는 생각하게 되었다.
양육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즉 아이는 나쁜 짓을 하는 잘못된 존재라고, 그리고 잘못된 존재는 버려질 것이라고.
그래서 그대는 이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아이라고 하는 잘못된 존재에서 벗어나 올바른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대가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올바른 존재는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보기에 어른이 가진 대표적인 특성은 똑똑함이었다. 그대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어른이었던 까닭이다.
이에 따라, 그대는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쌓음으로써,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려고 하는 여행길에 올라섰다. 그렇게 미성숙한 아이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곧 잘못된 존재에서 올바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고행길에 올라섰다.
이것이 고행길인 이유는, 그대가 늘 위장을 해야 했던 까닭이다. 어디에 가나 자신의 유식함을 드러내며, 세상에 호구잡히지 않을 균형잡힌 지성과 인텔리적인 예의바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성숙한 존재인지를 끝없이 연출해야 했던 까닭이다.
어디에선가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가 나오면 그대는 기가 죽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른채 당황했으며, 그 당황스러움이 남들에게 미성숙한 증거로 보일까봐 그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유지한 채 창백한 밀랍인형처럼 담담함을 가장할 뿐이었다.
그렇게 그대는 필사적이었다.
잘못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그대는 아이를 잃었다. 어른인 척 하는 껍데기로만 남았다. 껍데기는 경직된 것이며, 그래서 그대는 경직되었다. 심각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거나, 얕잡아보거나, 무시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 고민하며 눈치만 보게 되었다.
즉, 그대는, 그대가 실상 아이라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필사적으로 눈치만 보게 되었다. 그대가 아이라는 사실에 대한 발각은, 그대에게는 그야말로 파멸이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그대가 저 멀리 우주 끝에 홀로 버려지는 최악의 존재가 되는 것만 같은 일이었다. 더욱이나, 그렇게 어른이 되려고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아이라는 사실은, 그대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저주와도 같았다.
그대여, 그렇다면 이 파멸에 활로는 있을까? 이 유기에 구원은 있을까? 이 저주에 끝은 있을까?
있다. 정말로 있다.
그것은 그대가 이 모든 고행길을 시작한 바로 그 출발점에 있다.
그대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잘못된 존재다.
그대는 단지 그것만을 인정하면 된다. 그러나 어른인 척 하는 자책과, 후회와, 반성의 연출로서가 아니라, 다만 아이로서 정직하게 인정하면 된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하게 되리라.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한 번만 안아주면 안돼요?"
그대여, 왜 안되겠는가?
그리고 왜 한 번뿐이겠는가?
"안아주세요."
이것은 모든 아이의 소망이다. 그리고, 그대가 아이를 잃은 까닭에 함께 잃어버렸던 바로 그대의 소망이다.
그대가 성숙한 어른인 척 하는 만큼 모든 것이 그대를 위협하는 적으로만 경험되는 현실 속에서, 마냥 눈치만 보던 그대를 정말로 편안하게 해줄 그대의 고귀한 소망이다.
이처럼 그대를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다.
그대가 그토록 싫어하는 그대 자신의 모습이라도, 그것은 그대를 구원하기 위해 한결같이 그대의 가장 가까이에 머문다. 그래서 그대가 늘 무엇을 해도 아이였던 것이다. 그대가 부정하는 그 잘못된 아이가 그렇게 늘 그대를 구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여, 그러니 이제 그대가 딱 한 번만 이 말을 안아줄 수 있을까?
"이 세상에 잘못된 존재는 없다."
그대여, 대체 어찌 한 번뿐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