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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과 세계

일(一)의 폭력, 세계구원병을 넘어서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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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란 무엇인가?


걸작만화인 『창천항로』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아주 명징하게 알려지고 있다. 작품 속 인물인 제갈량의 입을 빌어 천하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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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천하(天下)라고 말하는 것이 곧 세계다. 제갈량은 이 세계를 두 가지의 형식으로 말한다.


i)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

ii) 한 개인이 그의 삶 가운데서 알고 얻은 것


전자는 보편적 본질론에 대한 묘사고, 후자는 구체적 실존론에 대한 묘사다. 그리고 제갈량이 전격적으로 채택하는 세계에 대한 정의는 바로 두 번째의 것이다.


이처럼 제갈량이 세계를 실존론의 입장에서 정의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독재를 해체하고, 자유를 드러내고 싶은 까닭이다. 이것을 조금 자세히 풀어내자면 다음과 같다.


전자는 일(一)의 세계다. 이것은 진정한 세계가 단 하나만 있다고 간주하는 관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가장 진정한 그 하나의 세계에 봉사해야 하는 과업이 주어진다. 그 세계 안에서 자기의 장점을 살려 세계가 원활히 작동하게 하는 유능한 역할로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 속에서는, 개인의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세계에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을 때만 그 가치가 유효하게 평가된다. 개인들의 개성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 역시도 이 하나의 구조로서의 세계에 활력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자원일 뿐이다. 나아가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의 세계가 통일된 구조로서 존속함으로써 모든 개인을 조화시키고 통합적인 이상을 향해 나아갈 방향성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된다.


정확하게, 서구의 근대시민사회의 논리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도, 또한 문화권력을 활용하는 정치세력들에게서도 잘 드러나는 논리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은 신념으로 형상화된다.


"세계를 좋게 만들어야 개인들이 좋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세력들이 제작하고 제공하는 문화컨텐츠에서는 늘 개인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자극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눈이 내려서 신난 이들에게, 저 눈을 치우는 청소부아저씨의 사회적 아픔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들은 이들은, 자신이 아직 덜 성숙하고 모자란 인간이라는 평가를 내사하게 되며, 그로 인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 이제는 눈이 내리는 창가 앞에서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을 짓게 된다.


이처럼, 근대적 하나로의 통합의 신념을 담은 문화컨텐츠에서는, 개인과 세계를 대립시키고, 이 대립구도 속에서 개인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처럼 묘사해낸다. 이에 따라, 개인이 언제나 자기를 희생하여 세계라고 하는 통합적 구조에 봉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하는 가치관을 세뇌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화권력을 쥐고 있는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보편화하여 보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一)의 폭력이다. 근대시민사회가 자연스럽게 귀결된 방향인 전체주의의 전횡이다.


하나의 세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말할 때의, 그러한 세계는 애초 없는 것이다. 추상적인 것이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삶의 지평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의 세계는 언제나 삶을 억압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킨다. 곧,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개인을 억압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킨다. 이것은 키르케고르의 이야기다.


제갈량이 키르케고르처럼 반동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창천항로』 내에서 제갈량은 조조를, 모든 것을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만들려고 하는 독재자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한다. 세계란 것이 결코 일(一)의 세계가 아닌 다(多)의 세계임을 항변한다.


제갈량이 채택한 정의처럼, 구체적 실존론으로 이해된 세계라고 하는 것이 한 개인의 삶과 관계된 것이라면, 세계의 수는 개인의 수와 동일하다. 만 명의 인간이 있다면, 세계 또한 만 개가 있는 것이다. 그 세계들은 동등한 위격을 지니며, 그것들을 통합해줄 더 큰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일의 폭력이다. 다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 다를 전부 복속시킬 일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언제나 교묘한 일의 술책이다.


제갈량은 이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유비를 통해 다만 이렇게 외친다.


"천하삼분!"


유비, 조조, 손권이라는 세 사람이 있는만큼, 천하도 세 개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물론 세 개뿐이 아니다. 이것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가 다 각자의 천하, 곧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위대한 선언이다. 바로, 너만 주인공이 아니라, 나도 당당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하나의 세계 따위에 역할로서 봉사하지 않더라도, 이미 각자가 자신의 온전한 세계를 가진 주인공이라는 이 선언은 분명 혁명적이다. 하나의 세계를 꿈꾸는 특정한 정치체계를 더 발전적인 하나의 세계를 꿈꾸는 정치체계로 바꾸는 것이 혁명이 아니라,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 따위는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세계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진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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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천하삼분을 부르짖으며 자신이 엄연한 주인공임을 알리는 유비의 이 선언은 통렬하다. 일의 폭력하에 시름하던 인간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내지르는, 바로 인간선언이다.


일(一)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모두가 그 일(一)의 중심만을 바라보도록 종용된다. 개인이 세계를 좋게 만들수록, 세계가 개인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순환이 마치 정당한 이 세상의 질서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어떻게든 행복하고 싶은 개인의 욕구를 자극하여 그 중심에 붙들어맨다. 그러한 방식으로 일의 세계를 확장하며, 더 견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다. 일의 세계에 봉사함으로써, 다의 개인들이 행복을 얻게 된 역사는 이 우주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특정한 정치세력들의 머릿속에서만 실현된 역사일 뿐이다. 즉, 판타지소설이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소설을 따라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2병이다. 그리고 중2병의 핵심적인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세계를 구하러 가자!"


이름하여, 세계구원병이다.


일의 세계를 꿈꾸는 이들이 앓는 그 치명적 질병의 이름이다.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이러하다.


"나의 세계로 너의 세계를 지배하러 가자!"


자기 머릿속에 있는 판타지소설을 진짜 세계로 간주하고, 또 세계라고 하는 것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될 때, 이러한 세계구원병은 촉발된다.


이 세계구원병의 무서운 점은, 병을 앓는 본인은 결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가장 건강한 세상을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는 자이며, 이러한 하나의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 일종의 병자와 같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실은 자기가 외눈박이면서, 역으로 두 눈을 뜨고 있는 이들을 자신이 계몽해주겠다고 하는 코미디를 펼치게 된다.


이는 마치, 남이 그린 그림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그림 위에 자기 방식으로 덧칠을 한 뒤, 자신이 그 그림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고 만족해하는 모습과도 같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지독하게도 둔감한 것이다.


모든 폭력은 삶에 대한 세계의 폭력이다. 곧, 다양한 삶에 대한 하나의 세계의 폭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둔감할 때, 이는 오히려 삶을 폭력적인 것처럼 묘사하는 기만을 낳게 된다. 다양한 삶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세계가 붕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삶이 그처럼 폭력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의 지지자들은 삶을 욕망으로, 죄악으로, 문제로 묘사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머릿속 규칙을 통해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방법론들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러나 삶은 어떤 것도 위협하지 않고 다만 피어날 뿐이다. 삶이 피어나지 못하도록 위에서 누르고 있는 세계라는 바위를 뚫고 스스로 피어날 뿐이다.


이처럼 삶은 나의 세계의 근거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는 남의 세계다. 우리는 이 남의 세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삼아,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객관적인 정의인 것처럼 착각한 채, 또한 그러한 남의 세계가 없으면 우리 자신이 마치 살 수 없는 것처럼 오해한 채, 고유한 나의 세계를 잃어왔던 것이다.


나의 세계를 잃은만큼, 내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되는 공허감과 무력감은 커져만 간다. 거대한 우울이 된다. 아무리 하나의 세계, 곧 남의 세계가 잘 되어가더라도, 이 우울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더 좋은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특정한 정치세력들이 나의 열광적인 지지를 통해 정치적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나의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초라하고, 무력하고, 답답한 상태에 그대로 놓여 있다. 열광만큼이나 허무는 필연이다. 그래서 계속 화가 나고, 계속 우울해진다. 이것은 실증적인 이야기다.


세계구원병은 이처럼 '나'라고 하는 것을 상실한 질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상실한 것이다. 심장보다도, 폐보다도, 뇌보다도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내가 없는데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의 세계에서 고작해야 하나의 톱니바퀴로만 기능하는 그런 인생이 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세계구원병은 분명하게 실존적 질병이다. 그리고 이 질병은 코로나보다도 지독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자신이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맹진해가는 용사들의 일원이 된 것 같은 판타지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질병에 노출되고자 하는 의도가 강화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세계구원병이 전염되는 방향성은 위로부터 아래다. 위에 존재하는 남의 세계가, 이내 진정한 하나의 세계로 탈바꿈되어 모두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독재가 낳는 전체주의다. 독재는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하기에 독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마치 진리와 정의인 것처럼 지속하고자 하기에 독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구원병으로부터 치유되는 방향성은 역으로 아래에서부터 위다. 독재를 붕괴시키는 힘은 아래에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번 근대시민사회의 논리처럼, 사악한 독재자를 깨어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진정한 위정자를 대신 앉히는 것과 같은 대권 교체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절대 아니다. 도무지 아니다.


독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길, 그것은 모두가 그 하나의 세계에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자기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어떠한 놀이터에서 독재가 일어날 때, 모두가 놀이터 밖으로 나가서 다만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독재자는 그 놀이터에서 외롭고 무력하게 홀로 남겨질 뿐이다. 이와 같다. 이것이 바로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정확한 의미다. 이 시대가 전하는 의미다.


아래로부터의 문화, 곧 서브컬쳐(subculture)에서는 이러한 동시대적 의미를 읽어내는 시선이 이미 남다르다.


오늘날 이세계물이 끝없이 범람하는 현상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그것은 세계가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반복적 알림이다. 물론 이 현실 너머에 모종의 초자연적 현실이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진리와 같은 하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의 정체 또한 그저 나의 세계보다 결코 높지 않은 위격의 남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고블린 슬레이어』와 같은 작품에서는, 아예 나의 세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용사들이 마왕을 물리치는 일은, 그 용사들의 세계, 곧 남의 세계의 일일 뿐이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남의 세계와 관계없이 그저 자신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고블린만을 해치우며, 그러한 자신의 세계 속에서 고유한 자신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쌓아나갈 뿐이다.


또한 『진격의 거인』은 어떠한가? 여기에서는 노골적으로 세계를 구원하려는 일에 도취된 이들의 환상을 단숨에 깨트린다. 세계구원병이 자신의 세계를 잃은 아이들의 증세라는 사실을 과감하게 폭로한다. 이처럼 자신을 잃은 아이들이 대신 추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정의,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핏줄,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삶을 억압하는 우상이다.


무수한 용사의 이야기 또한 이 우상의 이야기였음을, 오늘날의 서브컬쳐는 비틀어 꼬집는다. 정의를 주장하며, 대외적으로 친절하고, 지적이며, 인품있어 보이는, 또 결정적으로 잘생긴[이게 용사의 자격에 있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용사들이 얼마나 기만적인 폭력배들인지를,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용사로 인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람들의 자유가 선한 용사에 의해 얼마나 억압받는지를, 이 시대의 용사물들은 잘 묘사해낸다.


바로 이러한 흐름이라는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일(一)에서 다(多)로, 남에서 나로, 세계에서 삶으로, 우상에서 자유로, 이 흐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파도와 같다. 세계구원병을 넘어서, 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그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해일의 전조다.


이 해일이 다가오는 거대한 울림에는 분명 노래가 담겨 있다.


가장 신성한 의미의 노래가 담겨 있다. 그것은 이와 같다.


"내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된다."


나를 위해, 또 나를 향해 살라고 목숨을 선물받은 이 세상이다.


그래서 세계구원병에서 치유되는 방법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따라 명확히 언술하는 것이다.


"세계를 구하러 가자!"


이것이 아니다.


"나의 세계를 구하러 가자!"


이것이다.


나의 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즉 결코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내 자신을 구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은 남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하나의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오직 나의 세계 속에만 있다. 그래서 내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곳은 나의 세계뿐이다.


이 사실을 살아가는 이는 그래서 추상적 이념이 넘실대는 광장으로, 그 일(一)의 세계를 꿈꾸는 하나된 도취 속으로 나가지 않는다. 다만 자기의 집에서 밀린 설거지를 한다. 그렇게 설거지를 하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는 설거지로도 주인공이 된다. 자신의 세계 속 그 무엇으로도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살아있는 삶의 증인이 된다.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남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세계라는 사실에 대한 산 증인이 된다. 그럼으로써, 남의 세계에 종속되어 남으로 살며 고통받던 이들이, 그들 자신이 될 수 있는 명확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나의 길이, 또 다른 나의 길을 개방한다. 나는 끝이 없다.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게 된다. 질병의 끝이다.


이것이 바로 다(多)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다(wholeness)이다.


어떠한 하나의 세계도 나보다 크지 않다.


정말로 내가 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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