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11

"시선의 원리: 전구와 그림자인형"

by 깨닫는마음씨




우리가 '내 마음'이라고 자기 안에서 경험하는 것은 시선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시선은 관심의 은유적 용법입니다. 즉, 우리가 관심을 갖고 바라본 것이 '내 마음'이 됩니다. 여기에서 편의상 '내 마음'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에 따라 마음이라는 표현으로 통칭해본다면, 우리는 시선의 빛을 받아 태어난 것이 곧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마치 마음에 대한 창조주와도 같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음은 언제라도 자신을 만든 그 시선 속으로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시선에는 절대적인 시선과 상대적인 시선이 있습니다.


시선의 빛에 의해 태어난 마음은 더 많이 존재하려면 더 많은 빛을 받아야 한다고 믿으며, 자기 앞에 있는 대상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하게 됩니다. 곧, 더 많은 대상들이 제공해줄 시선을 수집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집되는 시선이 바로 상대적인 시선입니다. 표현 그대로입니다. 상대로부터 얻는 시선이라 상대적인 시선입니다.


마음이 이러한 방식으로 앞에 있는 상대들의 빛을 받다보면 필연적으로 그 뒤에서 생겨나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시선의 빛이 많을수록 이 그림자도 당연히 짙어집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음에게 시선은 창조주이자 양분입니다. 광합성의 빛과 같습니다. 빛을 받음으로써 식물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상대적인 시선을 받아, 아이가 자라나듯, 올챙이가 팔다리를 갖추듯, 더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어 자기를 비추는 그 상대적인 시선쪽으로 걸음마를 하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시선을 제공하는 대상을 향해 마음은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이 대상을 향해 이동할 때, 마음 뒤편에 생겨있는 그림자 역시 같은 보폭으로 함께 이동하게 됩니다. 마음의 그림자 또한 같은 크기로 실현되어 마음을 쫓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자인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음과 똑같이 생긴 그림자인형이 마음이 가는만큼 똑같은 방향과 속도로 마음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라 어두워서 그 형상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에, 마음은 그림자인형이 자신과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섭고 싫은 것이 자신을 쫓아오며 위협한다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두렵게 느껴지는 그림자인형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 적을 제거하려고 하게 됩니다. 더 많은 상대적인 시선을 받아 자신이 더 힘을 갖추게 되면 그림자인형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은 더 많은 대상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더 많은 엄마들의 미소에 노출되면 자신을 무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진다고 믿는 아이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상들에게 관심을 얻어 스스로를 더 힘있게 실현하려 할수록, 그림자인형 또한 정확하게 그 노력만큼 같이 강화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용사의 레벨이 올라가면 마왕도 같이 강해지는 바로 그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대상들로부터 인기를 추구하며, 그 인기에 근거한 힘을 얻으려 해도, 실제로 마음에게 있어 그림자인형은 더 강하고 무섭게만 느껴지게 됩니다. 마음은 이제 더는 안심하고 쉴 수 없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마음이 이해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크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그러한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자가, 누군가에게 죽을 것 같아 두려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상대적인 시선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눈동자에 사물이 비치듯, 시선은 다만 그와 같은 거울입니다.


거울은 힘의 원천이 아닙니다. 거울은 다만 우리가 그렇게 비친 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힘을 얻는 것만 같은 상대적인 시선의 구조 속에서만, 마치 엄마와 같은 거울이 힘의 원천인 것처럼 우리에게 착각되는 것입니다. 이 착각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엄마와 같은 관심을 얻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중적인 인기에 대한 열렬한 추구의 모습은, 마음이 처한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며 그렇게 인기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인기가 없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아니 더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착각은 다시 한 번, 거울에 대한 착각입니다.


거울이 자신을 예쁘게 하는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거울을 잃으면 자신은 이제 예쁘지 않으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놀라운 것은, 정말로 인기를 잃게 되었을 때, 거울을 잃게 되었을 때, 곧 상대적인 시선을 잃게 되었을 때, 오히려 마음은 편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마음을 쫓아오던 그림자인형도 사라지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안심이 됩니다. 편안해집니다. 아무렇게나 있는 그대로여도 편안한 자신의 방에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있는 그대로여도 마음은 죽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적인 시선의 수혜에서 벗어나 혼자 있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 실감 속에서 마음은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을 비추던 대상작용, 즉 거울이 사라지니 그림자인형도 사라지게 된 현실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 자신이 곧 광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빛을 내는 전구와 같습니다.


그 빛이 앞에 있는 거울에 비치고, 그렇게 거울로부터의 반사광이 다시 자신에게 비추어짐으로써 자신의 뒤에 그림자인형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 그림자인형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마음이 거울을 광원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빛을 거울의 것이라 착각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그림자인형에, 즉 스스로의 모습에 떨며 두려워하던 현실이, 이처럼 전부 자신이 전구라는 사실을 몰라서 생겨난 현실입니다.


거울이 사라지면 그림자인형도 사라집니다. 상대적인 시선이 사라지면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도 사라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하게 자신이 광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마음 자신이 빛입니다.


스스로에게서 비롯한 빛이 스스로를 향한 빛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자신이 감싸이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곧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그것이 절대적인 시선입니다.


더는 자기와 그림자인형이 상대적으로 분열되지 않고, 늘 자신으로서 하나인,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인,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하나인, 비추는 것과 비치는 것이 하나인 삶이 바로 절대적인 시선의 삶입니다.


결국 이 절대적인 시선은, 마음 자신이 전구라는 사실로 전환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절대적인 시선 속에서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전방위를 하나로 비추는 빛의 원천인 전구 자신에게는 그림자가 생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전구 자신은 환하고, 따듯하고, 또 자유롭습니다. 빛의 속성입니다.


마음이 스스로를 아름다운 광원으로 눈치채는 이 현상을, 곧 절대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이 현상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깨달았다고 하는 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깨달은 척 하는 이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척 하는 이와는 서로 상대적인 시선을 비춰주는 동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가 더 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는 은밀한 계약이 성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시선으로 사는 이와는 이러한 동업이 어렵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전구는 거울이 없어도 빛을 낼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아가 깨달은 이를 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불호의 감정은 더 크게 자라납니다.


그림자가 없는 광원을 또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상대적인 시선 속에서는, 그 전구라는 대상이 오히려 자신들의 뒤편에 그림자를 만드는 것처럼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즉, 광원을 대상으로 두고 있을 경우, 그 광원에서 나오는 빛이 마치 자신의 두려움과 못남 그리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상대적인 시선 속에서는, 절대적인 시선으로 사는 이는 위협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깨달은 이를 싫어하고, 끝내는 죽이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것 같은, 깨달은 척 하는 이를 오히려 진정 깨달은 이로서 옹립하고, 그를 중심으로 깨달음의 왕국을 세워 깨달은 이를 추방하려고 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벌어졌던 일이고, 다 상대적인 시선의 착각이 만들어낸 일입니다.


절대적인 시선을 발견하고 그 시선으로 사는 이, 곧 깨달은 이가 하는 일은 바로 이 상대적인 시선의 착각을 깨는 일입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으로도, 엄연한 광원이고, 분명한 전구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는 그의 온몸으로 증언합니다. 즉, 아무리 못나고 하찮게 생각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다 전구고 광원이라는 사실을 그는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은 이가, 자신이 발견한 절대적인 시선을 알림으로써 상대적인 시선의 착각을 깨는 그 방식입니다.


자신을 전구로 확인하지 않고 깨달은 이만을 대상화함으로써, 그 대상에서 흘러나온 빛에 대해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어 스스로 수치스러워하는 이 일은, 그래서 끝내 깨달은 이를 미워하게 되는 이 일은 결국 깨달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생기는 일입니다.


모르는데 아는 척 하고 있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즉, 깨달은 척 하고 있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제 이렇게 연결됩니다.


상대적인 시선으로 사는 일이 곧 깨달은 척 하는 일입니다. 절대적인 시선을 거부하고, 심지어 미워하며, 그렇게 더욱더 절대적인 시선과의 요원한 거리를 만든 채, 상대적인 시선만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깨달은 척 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척 하는 일은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전구가 마치 전구인 척 하는 일이고, 코끼리가 마치 코끼리인 척 하는 일이며, 장미가 마치 장미인 척 하는 일입니다.


노력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이 여기에 첨부되면 더 힘들어집니다.


이는, 갈매기가 마치 갈매기인 척 하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갈매기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세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쉬는 척을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숨쉴 수 있게 된다는 말은, 아무 노력없이도 우리가 이미 숨쉬어지고 있는 그 현실 속에서만 유일하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모든 상대적인 시선은, 이미 절대적인 시선이 작동하고 있기에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이 거울에 비쳐, 그 거울을 광원처럼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인 우리가 이미 빛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시선은 그저 이것일 뿐입니다.


스스로가 빛으로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빛나며 있는 것입니다. 빛내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빛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자신이 스스로를 살리고 있는 이 현실이 이미 빛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절대적인 시선의 현실입니다.


그 절대적인 시선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수행이란 쇼도 가능하고, 노력이란 쇼도 가능하고, 인기몰이란 쇼도 가능하고, 적과의 투쟁이란 쇼도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시선의 원리란 바로 삶의 원리입니다.


상대적인 시선 속에서는 그러한 시선을 우리에게 비추어줄 대상이 없으면 우리는 죽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까지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이미 절대적인 시선 속에 우리가 비추어져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를 스스로 살리고 있는 것, 그것이 절대적인 시선입니다. 그것이 곧 삶입니다.


이 절대적인 시선에 대한, 곧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며, 유일한 것입니다. 바로 마지막의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삶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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