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의존하고 싶은 이를 위해

"위선과 위악을 벗어나 은밀하게"

by 깨닫는마음씨




우리는 왜 위선적인 이를 싫어할까요?


거기에서 의존하고 있는 이의 노골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위악적인 이를 싫어할까요?


거기에서 의존하고 있는 이의 노골적인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의존하는 일을 싫어합니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실제로는 의존하고 있으면서 의존하지 않는 척하는 일을 우리는 더 싫어합니다. 그로 인해 자유롭게 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위악이 바로 이처럼 의존하고 있으면서 의존하지 않는 척하기 위해 펼쳐내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선과 위악을 보며, 숨이 막힐듯이 답답해져 화가 납니다. 자유가 폐색되어 있는 기운을 그토록 격하게 실감합니다.


의존의 문제는 언제나 대상의 문제입니다.


위선은 대상을 향해 금욕주의의 방법론을 취합니다. 의존적이지 않은 척하기 위해, 금욕주의는 대상을 억지로 끊어내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의존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이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은 척합니다.


위악은 대상을 향해 쾌락주의의 방법론을 취합니다. 의존적이지 않은 척하기 위해, 쾌락주의는 대상을 더 많이 만들어내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의존하고 있는 하나의 대상이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은 척합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금욕주의의 위선과 쾌락주의의 위악은 언제나 대상만을 그 중심으로 삼습니다.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파란 색연필은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주문을 하루종일 외우는 이가 계속 파란 색연필을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금욕주의의 위선과 쾌락주의의 위악은 대상에게 의존하지 않는 척함으로써 오히려 더욱더 대상에게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의도된 결과입니다.


금욕주의의 위선과 쾌락주의의 위악을 행위하는 주체는 사실 대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붙잡고 싶어합니다.


의존은 붙잡는 일입니다.


왜 붙잡으려 할까요?


대상이 반드시 자기를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 사실을 억지로 부정하기 위해, 위선과 위악은 출현합니다. 위선과 위악은 억지로 만드는 작위적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떠나가는 대상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는 제안됩니다.


결국, 금욕주의의 위선과 쾌락주의의 위악은, 대상에서 독립하기 위해 전개되는 방법론이 아니라, 대상에게 더욱 집착하기 위해 전개되는 방법론입니다. 떠나가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의 모습에 대한 현학적 수사입니다.


그러나 대상은 반드시 떠나갑니다. 이것은 필연입니다. 대상은 결코 대상으로 남아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상은 곧 소외된 것의 이름인 까닭입니다.


대상은 상대의 소외입니다.


우리 자신의 필요에 맞춰 구성되고 기대되는 것, 그것이 대상입니다. 즉, 대상은 우리 자신에게 유용한 기능을 제공해줄 형상의 거푸집에 담겨 자유를 잃게 된 상대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대상은 반드시 대상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갖습니다.


생명은 자유롭고 싶어합니다. 그 자유를 향한 움직임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위선과 위악은 바로 자유라고 하는 그 운명적 현상을 억지로 제어하기 위해 펼쳐내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운명과 투쟁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운명에게 응석부리는 행위입니다. 고집부리는 아이와 같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바로 자기중심성입니다.


위선과 위악으로 펼쳐지는 의존이 우리를 정말 고통스럽게 하며 우리에게서 자유를 상실하게 만드는 그 핵심적인 이유는 이 자기중심성입니다.


자기중심성의 실천적 표현은 과대망상입니다.


여기에는 자기가 전능하다는 착각이 있습니다.


이 착각 속에서, 금욕주의의 위선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상 없어도 나 혼자 다 할 수 있거든? 두고 봐, 중력 100배 수련실에 들어가 수행해서 초사이어인되면 더는 대상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당당하게 다 해낼 거야! 난 의존하는 사람 아니야!"


같은 착각 속에서, 쾌락주의의 위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상부상조하며 좋은 걸 주고받으면 되는 거지. 대상도 좋고 나도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냐? 그렇게 서로 상생하는 대상들이 많으면 좋은 거 아냐? 그게 왜 의존이야? 사람이 의당 서로 돕고 사는 도리지.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니야?"


이처럼 언뜻 들으면 그럴듯한 소리로 들리는 까닭에, 위악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쾌락주의의 위악이야말로 가장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기제입니다.


이 상부상조라는 미명하에 펼쳐지는 위악의 기제는 NLP 등과 같은 사이비심리학에서 자주 활용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사람을 관찰해서,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먼저 해주면, 결국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내가 얻을 수 있게 된다."


스머프 마을의 똘똘이 스머프가 할 법한 생각입니다.


즉, 자기가 10세에 세계의 진리를 체득한 대현자가 된 천재라고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잘 돌아가는 자기 머리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해서 만들어진 기제입니다.


여기에는 거대한 오만이 있으며, 그 오만의 크기만큼의 거대한 소외가 있습니다.


자신이 과대망상적으로 맹신하는 자기의 지적 능력으로 모든 인간을 대상화하고자 하는 오만이 있으며, 그 대상화가 만들어낸 모든 인간의 소외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천재인 자기만 중요한 존재고, 나머지는 일회용의 도구로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절대로 상부상조가 아니며 상생이 아닙니다.


그 말들은 오직 착취와 남용의 이 인간소외의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들일 뿐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쾌락주의의 위악으로 사는 주체는 자신이 얻을 것이 없다면 절대로 상대에게 좋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돈 없는 백수 앞에 5성 호텔의 상냥한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자기 필요할 때만 주장되는 상생인 셈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만 돌아갑니다. 뻔뻔하게 노골적입니다.


금욕주의의 위선이나 쾌락주의의 위악이나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아이의 방법론입니다.


혼자서 다 실현할 수 있다고 믿거나, 혼자서 다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의 결과입니다.


실제로는 대상에게 반동하거나 대상을 착취하는 형태로, 대상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면서, "난 의존하지 않는 성숙한 어른이야."라고 주장하는 자기분열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위선과 위악이 펼쳐지고 있을 때, 우리가 답답해지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의존이 낳는 대상화는 대상만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를 이루는 주체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듭니다.


대상화의 주체는 상기한 것처럼 자신이 전능하다고 착각하는 아이입니다. 끝없이 대상화할수록 끝없이 아이입니다.


그리고 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합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존재가 아이라고 하는 작은 껍데기에 갇혀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나 선뜻 그 감옥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감옥의 명패에 "10세에 세계의 진리를 체득한 대현자"라고 써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감옥을 벗어나면 그 위대한 천재의 자격을 잃을 것만 같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망상으로 써붙인 명패에 스스로 갇혀, 그 허구를 잃을까봐 계속 아이의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것이 가장 정확한 의존의 상태입니다.


물론 본인 역시 의심스러워하면서도 그 허구의 명패를 지키게 되는 이유는 있습니다. 그것이 허구인 줄 알면서도 그 허구를 사실처럼 동조해준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구, 우리 아들 천재네."

"어머, 우리 딸 천재야, 천재."


대체로 엄마입니다. 자식이 써붙인 위작의 명패를 진짜처럼 작위로 읽어준 이 대상으로 인해 허구는 권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허구를 지키기 위해, 금욕주의의 위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엄마 없어도 혼자서 대천재 할 거야!"


마찬가지로 이 허구를 지키기 위해, 쾌락주의의 위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나를 대천재로 보는 엄마들을 많이 만들어서 계속 대천재 할 거야!"


천재라고 하는 허구가 유일하게 엄마에 의해 권위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즉 엄마가 없으면 천재가 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금욕주의의 위선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 그 허구의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동시에, 하는 짓이 하도 멍청해서 귀여워 엄마가 그냥 "에구, 우리 천재."라고 추임새를 넣어주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즉 허구를 공짜로 실체화해준 엄마에 대한 감사함을 망각한 채, 쾌락주의의 위악은 자신이 만들어낸 더 많은 엄마들 앞에서 자기는 천재의 행위라고 확신하는 멍청한 광대짓을 함으로써 이득을 성취할 수 있는 자신의 천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허구에 권위를 준 엄마라고 하는 대상을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 허구를 수호하고자 하는 아이의 기획이 이토록 지난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상에 의존하는 것은, 그 대상을 통해 얻은 특정한 자아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자아상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일, 이것을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라고 하는 작은 자아상에 집착할 때 답답해지는 일은 필연입니다. 몸은 컸는데 아동용 침대에서 자는 일을 고집한다면 당연히 감옥처럼 불편해서 화가 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엄마도 답답해지고 화가 납니다. 발로 차주고 싶은 자식새끼의 등짝입니다.


그러한 엄마에게 "나도 이제 다 컸으니까 독립적으로 알아서 살게 그냥 내버려두라고!"라며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늘 가장 가까이에서 잘 보이던 은밀한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엉엉, 여기 침대에서 자야만 엄마가 머리 쓰다듬으며 '우리 이쁜 똥꼬 천재.' 해주는데, 여기서 안자면 난 천재 못 한단 말야, 엉엉."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대단히 한심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을 마주하며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대상이 이미 오래전에 떠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었던 엄마는 더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엄마는 대상을 떠나,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대상에서 마음이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내 것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같이 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눈앞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대상에서 자유로워진 그 사람을 처음으로 바라봅니다.


내가 엄마를 고집하고 기대하던 그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엄마가 아닙니다.


이 분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정성스럽게 산 세월만큼을 증거하는 주름살과, 말 못 할 삶의 아픔들을 사랑으로 담아온 가슴만큼의 깊은 눈빛을 가진, 여기 이 분은 사람입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에게 말을 건넵니다.


"저에게 엄마를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소외가 허물어집니다.


강물이 넘쳐듭니다.


앞에 있는 엄마였던 이도 울고, 내 마음속의 엄마도 웁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람이 된 까닭입니다.


사람은 대상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감동합니다.


그 감동을 감사로 나누어 함께 사람으로 살아납니다.


감동은 축소되어야 할 금욕이 아니고, 과잉되어야 할 쾌락이 아닙니다. 그 어떤 위선과 위악의 작위도 없기에, 그 어떤 의존도 없는 것입니다.


곧,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유롭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 길입니다.


모든 대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람만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마음이 다 알려줍니다.


마음은 은밀합니다.


은밀한 마음이 상냥하게 속삭입니다.


"잘 보이게 잘 숨어."


의존의 대상에게 작위적으로 잘 보이려고만 하거나, 잘 숨으려고만 하는 위선과 위악이 아닙니다.


잘 보이게 잘 숨는 은밀함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는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만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가두고 있던 감옥에서 탈출하는 이의 모습은 은밀합니다.


자유를 향하는 그 모습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잘 보이게 잘 숨어서 감동스럽습니다.


마음이 가는 길입니다.


모든 대상을 벗어나 은밀하게, 사람만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마음은 은밀하게 사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마음의 길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나의 길입니다.


문을 열고 스스로의 두 발로 총총 새벽길을 나서는 그 첫걸음부터 벅차오를 가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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