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에 대해 알아보자

"빵과 사랑"

by 깨닫는마음씨




언제나 세대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일은 어렵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개별의 목소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는 사실이다.


개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현대의 사유들은 개인의 앞에 먼저 놓여 작동하는 것들을 밝혀왔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그것은 무의식이고, 니체에게는 욕망이며, 마르크스에게는 구조다. 그 시대의, 또는 그 사회의 문화적 문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개인이 개인이기 이전에 먼저 영향을 끼치는 이러한 집단주의적 정신의 설계도를 운명이라고도 말한다.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래서 자유롭고 싶어한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이 우리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586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은 일이다. 함께 이룰 수 있는 해방을 위한 것이다.


이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다양한 분석들과 함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586의 특성은 놀랍게도 단 한 문장으로 그 핵심이 요약될 수 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586은 누구보다도 이 성경의 말씀을 인생의 기치로 걸고 있는 이들이다.


지금은 이 깃발이 세상의 중심부에서 가장 높게 펄럭이며, 586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시대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그 왕성한 불길을 보며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저 사람들은 빵을 갖고 있구나. 어쩌면 그것도 아주 많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님을 필사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최소 빵만은 갖고 있는 이들이다. 빵만은 중요하게 확실히 챙기고 있는 이들이다. 빵이 없다면 "사람은 빵으로 살 것이요."라고 필수적으로 절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서 터져나오는 바로 그 목소리다.


빵은 단지 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총체적 상징이다. 옷 따로, 밥 따로, 집 따로가 아니다. 의식주는 언제나 통째로다.


따로라고 해도 좋다. 아빠엄마옷을 물려 입은 듯한 복고적 오버핏의 SPA브랜드 옷들과,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천편일률의 배달음식들로 옷과 밥은 어떻게든 해결한다고 해보자.


집이 없다.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까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이 단 한 번뿐인 삶에서 단 하나의 집도 갖지 못할 운명에 놓인 이들에게, 최소 하나 이상의 집을 가진 이들이 목청을 높여 부르짖는다.


"사람이 집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이 품격있는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젊은이들은 참 착하다. 저기 개념없는 프랑스 야만인들 같으면 진작에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조커처럼 다 때려부수고 폭동을 일으켰을 상황에서, 기품있는 선비처럼 꾹 눌러 참는다. 다 자기가 능력이 없고 잘못해서 그런 줄 알고 오히려 스스로를 질책하는 우울증에 빠져, 586 의사가 공기좋은 곳에 별장을 한 채 더 살 수 있게 그가 운영하는 정신과에 돈을 지불하기도 한다.


최규석 작가가 그의 아름다운 작품 '송곳'에서 묘사한 대립구도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지만, 그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과외를 받고 있다. 586 운동권 정치인들의 수족이 되어 활동하며, 동시에 그들의 뒤에서 수렴청정하는 인기강사들에 의해 미디어 과외는 이루어진다. 이제 교육방송의 성지는 EBS가 아니라 TBS다.


집 없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작은 움막이나 동굴에서도 지낼 수 있는 인간의 역량과 자유로운 청년정신에 대해 단체과외를 받는 동안, 586의 자식들은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편법의 역량과 자유로운 반칙정신에 대해 개별과외를 받는다.


586 자신들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기들에게는 빵이 있으며, 자기 자식들은 다른 젊은이들처럼 빵을 못 먹게 되는 현실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면 남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세습이다.


빵을 세습시키는 일, 이것이 이제 노년을 앞두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586의 목표다.


그 성대한 불길은 자기 자식들을 위해 빵을 굽는 가마의 불길이다.


빵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이처럼 빵만을 굽는 일에 전부를 다하게 되는 이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는 586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심리적 역동 때문이다.


이 역동이 외적으로 드러나 더욱 활발해진 것은 분명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서다. 유사하게 동일본대지진 이후로 일본에서도 같은 역동이 표면화되었다. 몇 년 전 미국에서의 트럼프의 당선은 기적이 아니라 이 역동에 힘입어서다.


"내 아이를 최우선으로 지켜야 한다. 내 아이를 최우선으로 위해야 한다. 내 아이를 최우선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이처럼 아이에 대해 과잉되게 예민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다. "내 아이가 먼저다."라고 하는 이 기운이 586의 핵심정서와 아주 잘 상응한다.


586은 그들의 자식에게 통상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니가 알아서 잘 살고, 엄마아빠는 모은 돈으로 이제 노후에 엄마아빠 삶 사련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참말이어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말이다.


586이 갖고 있는 자식에 대한 과잉보호와 과잉애정의 역동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든다.


자식에 대해 과잉된 이 부모로서의 상태는, 부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부모로서의 죄책감은 곧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다.


즉, 586이 그들의 부모세대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까닭에, 그 죄책감을 덜기 위한 반동으로 자기 자식들에게 과잉반응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내 부모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해준다는 식의 표면적 그림을 만들어, 586에게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쉽게 말해, 자신들의 부모를 '나쁜 부모'로 보던 죄책감이 586으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나쁜 부모'만은 되지 않으려는, 어떻게든 자신들의 부모와는 다른 '좋은 부모'로 보이려는 과잉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이 든다는 것은 586 자신들도 사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부모는 생존의 차원에서는 '나쁜 부모'가 아니었다. 오히려 586이 그 어떤 세대보다도 상대적으로 더 작은 노력으로 더 많은 것을 성취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 그들의 부모가 고생한 역사가 있다.


부모 덕에 의식주를 성취해 잘 먹고 잘 살게 된 이 역사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586이 부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부모를 언뜻 '나쁜 부모'로서 부정하는 그 이유는 다름아닌 정서적 이유다.


"이제 배부르고 잠도 잘 잤으니, 나를 사랑해주고 정서적으로 만족시켜주면 좋을텐데, 왜 이쁨이쁨 안해주지?"


생존에 목숨을 걸었기에, 즉 빵에 목숨을 걸었기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유가 정말로 없었던 부모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이 586의 정서적 욕구는, 결국 586의 가슴에 욕구불만이 낳은 커다란 반항심으로 내재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빵만으로 사는 것 같은 자기 부모세대에 대한 반동으로,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동시에, 그 슬로건을 따라 거칠고 투박한 자기 부모의 모습이 투사된 권력자들에게 반항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반항은 정의를 요구하는 반항이 아니라, "날 좀 정서적으로 따듯하게 대해줘."를 요구하는 반항이었던 셈이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정서적 유대감이 이들에게는 정의일 것이다. 그래서 586 운동권들이 그토록 동지애를 챙기는 것이다. 그만큼 586에게는 정서적 욕구라는 것이, 그들이 설령 자각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 아빠는 돈만 알고 날 사랑해주지 않았어. 폭력적인 독재자였어."

"우리 엄마는 늘 바빠서 나에게 무관심했어. 자본주의가 사람을 이렇게 정없이 만들었어."


이러한 목소리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586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었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만족을 얻은 뒤, "이제 정서적인 만족도 내놓아야지. 안내놔? 화염병 던져야겠다."라며, 전부 다 독점하고 싶었던 응석쟁이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인간이 안전한 생존의 조건 위에서 정서적 욕구도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라도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풍요롭게 다 누리기를 바란다.


586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이해에 섬세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빵과 사랑을 다 갖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빵을 중요하게 챙겨 갖고 있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빵보다는 사랑만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자고 선전하는 것은, 가진 자로서의 자기도취에 빠져 인간을 무시하는 일과도 같다.


빵이 없는 이들은 빵을 갖고 싶다. 바로 586이 독점하며 갖고 있는 그 빵이 갖고 싶다.


물론 586 정치인들에게서 빵의 문제는 중요하게 언급된다. 누구나 빵을 얻을 수 있게끔 쉽게 접근가능한 매대를 펼쳐놓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정말로 매대 위에 먹을 만한 빵들이 가득 놓여 있다.


'예약중'이라는 표찰과 함께.


세습은 매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겉으로 투명하게 다 빵들을 펼쳐놓았으니 공정한 분배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뭔가 좀 이상해서, 그래도 아직 예약되지 않은 빵을 달라고 간곡하게 청하는 이에게는 이러한 말이 들려온다.


"모두가 다 빵을 먹을 필요는 없이, 붕어싸만코, 개구리칩, 가재깡을 먹으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빵을 먹지 못해 굶주려 있는 사람들에게, 빵이 없으면 대신 과자를 먹으라고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놀라운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의 창작물이지만, 이 붕어싸만코에 대한 말은 실제로 발화된 말이라는 것이다.


모순.


한 손으로는 막 가마에서 꺼낸 포실하고 따듯한 빵을 자기 자식에게 자상한 표정으로 건네고 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라는 플래카드를 엄숙한 표정으로 흔들고 있는 이 모순이다.


즉, 자신들도 자기 부모의 모습과 똑같이 실제로는 빵을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고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마치 자신들이 빵이 아닌 다른 고귀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순이다.


삶과 말이 분열된 모순이며, 삶과 앎이 소외된 모순이다.


아마도 이 모순이 586이 평생 짊어온 문제일 것이며,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분열과 소외의 문제를 낳는 그 문제일 것이다.


즉, 586의 문제가, 586이라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 586이 최종적으로 활약하는 시대에, 586이라는 분열과 소외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우리는 586을 이해하고 싶다.


586이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싶다.


그들이 다른 부모세대보다 더 특별하게 자기 자식들에게 잘한 업적 때문이 아니고, 부모로서 그들이 가진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며,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그들이 투여한 그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지금 자기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이미 충분히 좋은 부모다.


자신들이 자식으로서 모든 것을 다 갖고자 하던 마음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는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최우선으로 다 가져야 한다."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586 자신들의 부모가 품고 있던 소망과 같다.


그들의 부모도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했다.


이것이 우리가 586을 이해하고자 하듯이, 586이 이해해야 할 부모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다 준다는 것은 가진 것을 다 준다는 것이다. 빵만 가진 이는 그 빵을 주면 모든 것을 다 준 것이다.


강도도 집주인이 못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586 자신들이 바랐지만 부모로부터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소재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부모도 못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586이 그들의 부모에게 무엇을 바랐든 간에, 586은 분명 이것만은 얻었다.


빵과 사랑, 이것만은 동시에 얻었다.


빵만 있는 자가 자신의 모든 것인 그 빵을 주었다는 것, 바로 그 행위가 사랑인 까닭이다.


그래서 빵은 사랑이다.


586이 빵을 구워 그들의 자식에게 건네 세습시키는 행위, 거기에는 그들의 부모만큼이나 좋은 부모로서의 그들의 사랑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 아닌 젊은이들에게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행위, 거기에는 젊은이들을 사랑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저주가 담겨 있다.


586이 자신들의 부모에게 전해받은 것처럼, 또 자신들의 자식에게 전하는 것처럼, 빵은 사랑인 까닭이다.


"나는 왜 내 자식은 사랑의 낙원으로 안내하면서, 젊은이들은 사랑이 없는 황무지로 몰아세우고 있는가?"


이것은 586이 가져야 할 결정적인 물음이다.


빵이 없는 황무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빵과 사랑은 모순의 관계가 아니다. 빵과 사랑은 같이 가는 역설의 관계다.


이 빵과 사랑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586의 모순도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같이 빵을 먹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제 식사시간이니, 그만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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