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토양

"도덕적 완벽주의의 저주 속에서도 더럽게 피어난다"

by 깨닫는마음씨




유교를 비판하는, 특히 조선의 권력을 장악한 주자학을 비판하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의 소재는 바로 이것이다.


'도덕적 완벽주의.'


이것은 결벽증이다. 그것도 존재론적 차원의 결벽증이다. 중증이다.


아주 쉽게, 이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인간조건을 충족한다."라는 진술이다.


대단히 오만한 진술이다.


물론 그 도덕적 기준은 공자가 제시한 기준이다. 조선시대로부터 1000년쯤 전에 살았던 한 중국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엄격한 구분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를테면, 방탄소년단의 성공의 요인으로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그들이 건강한 도덕적 청년들로 보인다는 점은 주요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한국에서는 연예인도 도덕적이어야 뜬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일종의 유사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 더 명확하다. 정치의 헤게모니는 누가 더 도덕적인가, 아니 정확하게는 누가 더 도덕적으로 보이는가의 기준에 따라 선취된다. 이는 외모지상주의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반듯하고 수려하게 생긴 용모의 정치인은, 그 외적 미백(美白)의 조건만큼이나 도덕적으로도 하얗고 투명할 것이라고 가정된다.


실제로 한국의 586운동권 정치인들이 대변하고 또 자임하는 것은 선비정신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주자학의 선비들이 그러했듯이 상대편의 비도덕성을 폭로하고 우리편의 도덕성을 선전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한다. 사람들 앞에서 고고한 선비로 보이려는 것이 권력 창출을 위한 이들의 핵심적 전략이다.


이처럼 도덕을 내세우면, 권력도, 인기도, 명예도, 재산도, 또 노후도 모두 확실하게 보장된다. 적어도 이 한국사회에서는 분명 도덕주의는 마법의 기제인 셈이다.


그리고 이 도덕 제국주의는 종교적 영역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맹진한다.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폭발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유교다. 하늘(天)과 하느님은 멀지 않다. 이 언어적 근친성을 바탕으로 주자학의 보급자들은 언어적 외연을 변주해 그리스도교의 보급자가 되었다. 한국형 유교적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것이다.


예수는 결코 도덕적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지만, 정치권력의 지배논리에 편입되어 도덕주의적 통치기제로 바뀌게 된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모습으로 한국에 상륙하여 또 다른 도덕적 완벽주의의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도덕적 완벽주의에 도덕적 완벽주의가 더해졌다. 이처럼 완벽주의끼리 만났을 때 세워지는 수식은 사실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다.


인간이 당당하게 등을 펴지 못하고 곱등이로 살게 만드는 곱셈이다.


이는 비단 제도종교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심층적 종교활동에 있어서도 이 도덕적 완벽주의의 문법은 스며들어 독특한 수행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규칙을 잘 지키고 더 도덕적으로 살수록 깨닫는다는, 깨달음에 대한 아주 이상한 공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마치 유학자들이 유불선의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환원시켜 오독하는 그 방식과도 같다.


물론 깨달음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를 제외한 그 어느 전통에서 깨달음을 말하든 간에, 그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와는 가장 멀리에 있는 것이다.


도덕적 완벽주의가 경영의 논리라는 것을 이해하면 이 점은 명확해진다.


도덕적 완벽주의의 결벽은 강박이다. 강박은 인위적인 힘을 가해 자연스러운 상태를 자의적으로 통제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경영이다.


경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경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차원에서부터 이 두 개념은 상이하다.


경영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표현 그대로 깨는 것이다. 깨달음은 '유지되지 않음'에 입각한다.


이를 통제의 원리로 다시 이해해볼 수도 있다.


경영은 '삶을 통제하는 것'이며, 깨달음은 '통제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유지하고자 하는 것, 그럼으로써 가장 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힘이다. 권력이다.


권력은 통제를 위해 약화되거나 상실되지 않고 유지되어야 한다.


결벽증은 이 권력지상주의의 증세다. 모든 강박은 통제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강박이다.


때문에 도덕적 완벽주의는 결국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권력에 대한 완벽주의다. 상실되지 않는 완벽한 권력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구체적 용태로서의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기(利己)적이다. 자신들만 권력이 허락된 인간으로서, 아직 인간에 도달하지 못한 미천한 이들에게 감히 권력을 침범당하는 일 없이, 오롯하게 독점가능한 권력의 구조를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이른바, 도덕적 이기주의다.


이처럼 이 현대판 선비들의 이기주의가 그 앞에 '도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까닭에, 그 본론의 내용은 쉽사리 은폐된다. 거칠게 비유해서, 잘생긴 이가 하는 말은 안봐도 다 맞는 말일 것이라는 심리적 효과가 작동하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단어에 대한 절대적 기대가 신앙의 수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이는 다시, 유교의 도덕 제국주의가 종교의 영역을 흙발로 침범했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종교의 끝은 무엇일까?


바로 도덕이다.


물론 종교는 도덕의 기능을 일견 제공하지만, 도덕 그 자체가 종교가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구원이라는 종교의 의미와 효력이 실종된 현실을 뜻한다.


도덕은 인간구원이 아니라, 인간경영을 향한 것이다.


유학은 경영학이다.


반면, 붓다와 예수는 경영의 집대성인 정치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인간은 경영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천명했다. 노자 또한 정치와는 그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노자에게 있어 정치는 도(道)로부터 소외된 결과다.


『아웃사이더』와 『종교와 반항인』이라는 실존주의적 문화비평의 명저들을 집필한 콜린 윌슨은 분명하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실존주의의 끝은 정치이거나 종교였다. 전자는 끝났고, 후자는 도약했다."


실존이라는 표현을 가장 쉽게 말하면 바로 삶이다. 그래서 상기한 문장은 다시 이렇게도 옮겨질 수 있다.


"삶의 끝은 정치이거나 종교다."


또 이렇게도 가능하다.


"삶의 끝은 경영이거나 깨달음이다."


더 극단적으로 변주할 수도 있다.


"삶의 끝은 유교이거나 깨달음이다."


가장 이 시대에 적합한 형태로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삶의 끝은 도덕적 완벽주의의 협박에 굴복해 현대판 주자학 선비들의 권력욕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는 현실이거나, 그러한 구조를 깨고 그 밖으로 나가서 나의 삶을 사는 현실이다."


도덕적 완벽주의가 최악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조건을 임의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을 끝없는 잠정적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통제의 논리에 따라, 인간을 협박해 힘을 착취함으로써 도덕적 완벽주의의 주체 자신들의 권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폭력이다.


도덕적 완벽주의는 인간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폭력이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야기한 것은 비도덕적 의도가 아니라 바로 도덕주의의 의도였다. 그것은 '더럽고 못생기고 추한 비인간들'을 일소하자는 결벽증에서 비롯되었다.


이 도덕적 완벽주의가 펼쳐지는 무대는 강박적으로 깨끗하게 잘 다져진 아스팔트와 같다. 반듯하지만 씨앗의 입장에서는 척박하다.


물론 선비들은 씨앗을 위해 따로 구획이 잘 정돈된 비옥한 토양을 준비해놓고 있을 것이다. 매트릭스의 생체배양기 같은 곳이다. 그렇게 선비들 자신이 정의하는 인간의 기준에 맞게 고고한 분재로 키워질 수 있도록 씨앗은 경영의 장에 심어진다.


계획경제와도 같이, 선비들의 설계도에 따라 그 형상을 잘 갖추게 된 분재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


분명 인간은 씨앗이다.


그러나 분재가 아니다.


인간은 분재의 씨앗이 아니라 깨달음의 씨앗이다.


즉, 인간은 이제 경영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된 것이다.


도덕의 창으로 보는 인간이 부족한 미완성품으로 보이는 것은 도덕의 창이 작은 까닭이다. 완벽주의의 결벽증이 협소한 까닭이다. 선비들의 가슴이 좁은 까닭이다.


자신들의 새가슴에 열등감을 갖고, 그 반대급부로 하늘이 주관하는 웅장한 경영의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선비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여행하고, 넓은 식견을 갖고, 세상 돌아가는 섭리를 알며 노련하게 잘 놀 줄 아는 가슴 큰 인생마스터의 모습을 연출해낸다 하더라도, 도덕이 그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한 그는 그저 새가슴의 선비다. 그러니 이 시대의 무수한 선비들은 조선시대와 똑같이 패거리를 짓지 않고는 아무 것도 못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시사할까?


분재를 경영한다고 생각하는 선비들 자신이 바로 분재라는 것이다.


경영되지 않고는 똑바로 못 살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고 있던 선비는 그렇게 그 동일한 기준에 의해 누구보다 비인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세상을 위해 뜻을 펼치는 품새를 취하며 웅장한 척하던 선비들의 의도는 이처럼 자신들이 분재로서 안전하게 키워질 수 있는 작은 무균실을 바라던 바로 그 의도다. 전술한 것처럼 자신들만을 위한 이기주의의 의도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붙는다고 그것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할 가장 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수식어의 용법은 실제로는 가장 작은 것을 지시한다.


그래서 선비들의 경영은 언제나 더 작은 장을 만들어낸다. 협소는 분열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협소해서 분열되며, 또한 분열로 인해 협소를 달성한다.


모든 폭력의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을 더 작은 것으로 만드는 일.'


유교의 도덕적 완벽주의는 인간을 더욱더 작게 만드는 협소의 폭력이다.


반면, 깨달음이 깨달음인 이유는 언제나 인간을 더 거대한 존재로 드러내는 까닭이다.


깨지는 것은 전방위로 깨지는 것이다. 어디로든 깨질 수 있다. 산산조각으로 깨질 수 있다. 무한하다. 유교가 경영하는 사방의 울타리 속 분재배양지에 갇힐 수 없다.


무균실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꽃을 규정하는 것은 꽃에 대한 저주다.


이처럼 도덕적 완벽주의는 인간에 대한 저주다.


유교가 지배하는 땅은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주받은 땅이다. 척박한 토양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그 척박한 토양에서도 피어나기에 깨달음이다.


도덕적 완벽주의가 정비한 아스팔트를 산산히 깨트려 뚫어내고서라도 나로서 우뚝 서기에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결코 깨끗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다.


태양처럼, 강물처럼, 고양이처럼, 더럽게도 통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더러워서 좋은 것이다.


더럽게 좋은 것이다.


먼지는 더러움의 상징물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먼지로 만들어졌다.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조차도 그 구성의 근간은 먼지다.


그렇게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원래 더러운 것이며, 곧 더럽게 좋은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이토록 더럽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 위에 서 있게 되는 일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가장 거대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 먼지가, 바로 내가 있는 이 우주 전체가 깨달음의 토양이다.


하나의 개인이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그 거대한 토양[먼지]이다.


여기에서 더럽게 좋은 것으로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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