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과 말함"
종교철학자인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듣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잘 듣는 일, 즉 경청의 미덕은 익히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은, 잘 남용되기 좋다는 것이다.
"자기야, 그냥 내 말만 죽 들으며 공감해주면 안될까?"
"상담사 선생님, 죄송한데 조용히 앉아서 제 100권짜리 자서전 낭독만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홍상수 감독 영화의 인물조로) 내가 널 알잖아. 내가 잘 알아. 내 말만 들어봐."
폭력, 폭력, 폭력.
경청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현실은 어느덧 그 빛 속에 숨은 폭력의 현실로 뒤바뀌고야 말았다.
그렇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듣는 쪽의 입장에 선 이는 자신이 제대로 못들어주는 못난 사람인 것처럼 자책까지 하게 되었다. 얻어 맞고 돌아온 불쌍한 몸에 채찍질까지 스스로 더하게 된 것이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들음보다 말함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곧, 들음이 말함의 종속가치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들음의 도구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말함을 더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들음이 도구처럼 쓰이게 된 것이다.
호흡으로 비유하자면, 이것은 들숨과 날숨의 정당한 구도가 깨어진 것이다. 들숨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날숨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날숨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만 들숨이 있는 것처럼 간주되는 일이다.
다르게 비유해보면, 이는 또한 우리가 싸기 위해 먹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 자체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오히려 싸는 행위는 먹는 행위의 부산물이다. 먹은 결과로서 싸게 되는 것이지, 싸려는 목적을 위해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들음과 말함의 정당한 구도는 이와 같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듣는 것이다."라고 한 틸리히의 말은 진실로 옳다. 틸리히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요청하는 이는 먼저 사랑을 향한 모험에 그 자신이 뛰어 들어야 한다고.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상대에게 들음이라는 사랑의 의무를 요청하고자 하는 이는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의무를 그 자신이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차원에서, 이를테면 "자기야, 오늘 자기 상태가 어때? 같이 대화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건강한 상태가 준비되어 있어? 자기 말 먼저 내가 들어줄게."라는 식의, 결국에는 자기의 말함을 이루기 위해 먼저 상대에 대한 들음을 실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숨을 들이마시는 이는, 반드시 그 순간에 숨을 내쉬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한번 해보면 알 수 있다. "내쉬어야지, 내쉬어야지."하는 의도를 견지하며 숨을 들이마시면 호흡이 대단히 불편해진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호흡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호흡일 때야 흐름이 생겨난다.
이 순환하는 흐름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교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감은 대화의 모든 이유다.
우리가 듣는 이유는 상대로부터 강요된 공감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와 정말로 교감하고 싶어서다.
들으면 자연스럽게 상대의 상태가 우리에게로 흘러든다.
상대가 지금 느끼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그대로 이쪽의 상태로서 체험된다.
그리고 들숨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로, 날숨 또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억지로 형식적인 말을 만들어 발화해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말함은 생겨난다.
"아, 니가 지금 이렇게 슬펐구나."
"아, 당신이 바로 이 정도로 속상했군요."
"아, 너 진짜 많이 답답했구나."
노영심씨의 공연제목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랑이 사람에게 말을 거네."
사랑은 들음으로 피어나 말함으로 그 향기를 알린다.
꽃이 있어야 향기가 있다.
분명하게, 말함은 들음의 목적이 아니라, 들음의 결과다.
말함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들음을 온전하게 이룬 결과, 역설적으로 다시 부활한 말함이 바로 사랑의 말함이다. 이 사랑의 말함은 그야말로 사랑의 첫 번째 권리다.
내가 너만을 생각하는 소중한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더없이 누리고 턱없이 행사할 수 있는 분명한 우리의 권리다. 기적적인 권리다. 그렇게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기적이다.
이처럼 우리의 호흡 자체가 사랑의 숨결이 되는 일, 꽃이 되어 향기로운 일, 바로 들음으로 가능해진다.
노영심 - Glad You Told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