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짧은 마음생활백서 #6

"마음과 마인드"

by 깨닫는마음씨




마인드(mind)를 마음으로 번역하고 그 뜻으로 마음을 이해할 때, 마음생활은 어려워지게 된다.


마인드는 '생각'이다. 마음은 '존재'다.


이 '생각'과 '존재'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가 얼핏 직감하는 뉘앙스만큼이나 그 둘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가장 많이 들 때를 떠올려보면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것은 통제다.


우리는 통제하려고 많은 생각을 하며, 그렇게 움직이는 많은 생각 때문에 힘들어서 그 생각들을 또 생각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인드는 통제의 기제와 가장 크게 연관되어 있다.


통제는 언제나 안팎으로 함께 일어난다. 곧, 통제는 외부 조건에 대한 통제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다.


때문에 마음을 마인드로 이해하고 있으면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통제하려고 하게 된다. 곧, 자신의 마음을 필연적으로 통제하려고 하게 된다.


가장 통제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할 때, 문제는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통제하려고 하는 일이 문제를 유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정말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슬기로운 마음생활의 지름길이다.


곧, 마음을 마인드로 이해하며,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내려놓는 일은 아주 유용하다.


정말로 마인드 컨트롤만큼 헛된 이야기가 달리 없다.


내친김에 이 마인드 컨트롤과 관련된 소재들을 비판적으로 훑어볼 수 있다.


최면?


이것을 잘 배울 수 있는 학과는 분명 심리학과가 아니라 연극영화과다. 그 근간은 증강현실의 쇼다. 물론 우리의 존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존재는 쇼하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면 피험자들에게 한번 물어보면, 정직한 이들은 말해주기도 한다. 최면이 진행될 때, 피험자들은 실상 최면에 걸린 척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는 딱히 업계의 비밀도 아닌 공공연한 사실이다.


최면에 걸린 척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최면의 시험자도 피험자도 모두 다 이득이 되기에 공조하는 것일 뿐이다. 마법이 있다고 믿고 싶은 둘이, 해리포터 연극을 진짜인 것처럼 연기하며 얻는 이득과 같다.


이처럼 최면은 근본적으로 게임과 같은 것이다. 게임 마스터의 안내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며 가상현실을 체험하던 고전적인 테이블 RPG와 그 구조가 동일하다. 오늘날 더욱 실감나는 증강현실을 여러 감각적 차원에서 제공하는 VR 컨텐츠들의 원시적인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무리 게임에 능숙해진다고 우리의 마음이 통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메이플스토리 만렙 300인데, 왜 무기력하고 우울한 거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일이야말로,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비유하자면, 게임 마스터가 옛날 패미콤 게임기에 꽂아준 팩맨과 같은 고전게임을 하루종일 하며, 아싸 도트 10개 먹었으니까 이제 일류대 갈 수 있고, 20개 먹으면 애인도 생길 거고, 30개 먹으면 모든 사람이 날 존경하게 될 거야 캬캬캬, 라고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 극이 결정적인 비극이 되는 때는 이처럼 팩맨을 즐기기 위해 커다란 비용을 지불할 때다.


최면이 그저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증강현실의 게임을 좋아한다면, 차라리 오큘러스와 같이 더욱 실감나고 유용한 VR 장비를 사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NLP는 어떠할까?


이것은 최대한 좋게 말해서 사이비심리학(pseudo-psychology)이지, 그 본질은 더욱 난감한 것이다.


NLP는 흡사 엔터테인먼트가 빠진 게임과도 같다. 소위 쿠소게(못 만든 게임)라는 것보다 더 재미없는 것이다.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다.


NLP는 RPG에서 일종의 튜토리얼로 입장하게 되는 맨 처음의 사냥터에 평생토록 머물며, 끝없이 토끼와 다람쥐를 잡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게임 속에서 게임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토끼와 다람쥐만 잡고 있으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재미없는 노가다를 영원히 반복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NLP를 가르치는 이들도 정작 자신은 NLP를 하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나 재미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NLP를 가르치는 이들에게 NLP의 효용은 단 하나다. 게임 속 사냥만 반복적으로 연습해 숙달되기만 하면 게임 밖 현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며, 기적의 물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RPG의 초보들을 유혹해 그들에게 게임하는 법을 가르치며 돈을 버는 일이다.


그러나 일례로 다크소울 같은 어려운 게임도, 초보자가 부탁하기만 하면 고인물들이 자기 일처럼 달려와 게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무상으로 적극 도와주는데, 이 NLP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가장 재미없게 게임을 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데다가 심지어 비싼 금액까지도 지불하게 만든다.


난감한 일이다.


게임에서 아무리 열심히 사냥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에서 체험되는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게이머의 매너로서 상당히 난감한 일이다.


한편, 이러한 마인드를 다루는 분야의 최고 권위자라고 칭해지는 밀턴 에릭슨이라는 사람은 어떠할까?


이 사람은 붓다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다.


묘사하자면, 붓다가 게임보다 즐겁게 사는 법을 우리에게 전했다면, 밀턴 에릭슨은 모든 것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최고의 게임 마스터다.


게임 마스터는 자신이 만든 게임 속의 신이다.


최고의 게임 마스터는 자신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현실에 대한 최고의 규칙으로까지 적용하려 함으로써, 실제 현실에서도 신의 자리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처럼 현실을 게임과 같이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다. 자신이 만든 소꿉놀이가 진짜처럼 이루어지려면 그 놀이의 규칙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역할을 맡아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게임 마스터는 모든 자원과 노력을 총동원하여 사람들에게 권위있는 자로 보이기 위해 목숨을 건다. 권위야말로 더 많은 사람들이 게임의 규칙에 따르게 하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소재인 까닭이다. 최고의 게임 마스터는 분명하게 권위중독자다.


"내가 만든 파이널 퀘스트가 최고의 게임이니, 너희는 모두 다른 게임을 버리고 이 게임만을 해야 해. 특히 현실에서도 다들 파이널 퀘스트에 나오는 마을사람들처럼 살아야 해."


이렇듯 권위를 활용하여 사람들을 자기가 만든 게임 속의 NPC처럼 만들고, 자기는 그 게임 속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또 실제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게임의 전개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의지가, 게임 마스터의 모든 것이다.


때문에 최고의 게임 마스터는 겉으로는 인자해보여도(그 인자함이 또한 그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쓰는 권위의 한 수단이다) 언제나 격렬한 투쟁자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권위에 복속시키기 위해 싸우고, 실제로는 자기 게임의 규칙대로 되지 않는 삶과 싸우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


그 투쟁의 결과로 밀턴 에릭슨은 평생 힘들고 아프게 산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마음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지를 결코 놓지 않았던 사람이다. 힘들고 아파도 모니터 앞에 앉아, 레벨 하나라도 더 올려야 더욱 권위자가 되어 사람들이 자신을 최고의 게임 마스터로 인정해줄 것이라 믿으며 고행을 끝없이 지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고행이라는 동일한 게임의 규칙 속에서, 게임에 동조된 사람들의 실제 현실도 자기처럼 고행의 현실이 되도록 안내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이 사람은 붓다의 정반대편에 있다.


이처럼 마인드 컨트롤과 관련된 소재들은 결국 다 게임적 감각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더 즐겁게 만드는 게임이 아니라, 재미도 없는데, 자원만 탕진하고 시간만 쓰게 만들며, 무엇보다 실제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게임이다.


마음을 마인드로 이해하면 이렇게 힘들어진다.


마인드는 게임이다. 생각은 게임이다.


웹툰 『미생』에서 나오는 명대사가 하나 있다.


"게임을 하니까 게임에 빠진다."


생각을 하니까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통제하려는 생각을 하니까, 그 생각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다.


끝내 생각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 또는 표현 그대로 마인드 게임이란, 이처럼 생각으로 생각을 통제한다는 생각을 하며 생각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더 잘 산다고, 우리가 실제로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내 모습을 더 멋있게 생각하고 자꾸 생각해도,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백날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봤자, 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극복해봤자, 생각 속의 신이 되어봤자, 눈앞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을 권위로 동조시켜 "와, 저 돌멩이가 공중부양하고 있어!"라며 모두가 합창하는 연극을 아무리 펼쳐봐도, 심지어 모든 인류가 그 연극에 동참하여 떼창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돌멩이는 단 1mm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힘이다.


존재는 생각 따위에 꿈쩍도 않는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통제가 없으면 자기가 존재하지 못할 것 같아 안달복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그저 여기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뽐내지도 위축되지도 않으며 다만 그 자신일 뿐이다.


통제의 원리가 감히 적용될 수 없기에, 곧 통제할 수 없고 통제될 수 없기에, 존재는 자유롭다.


마음을 이처럼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면, 그 순간 마음의 자유가 열린다.


이것은 마치 수로가 열리는 것과 같다. 썩어서 늪이 되어가고 있던 저수지의 수문이 열리고 이제 해방된 물길은 그 물 위에 타고 있는 우리를 새롭고 자유로운 현실로 이동시켜준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는 흐르는 것이다. 동시에 바다의 부력이 배에게는 가장 든든한 것이듯이, 존재를 타고 흐르는 이에게 존재는 가장 견고한 것이다. 유연성과 견고성의 역설이다.


곧, 존재는 우리에게 자유와 안정을 동시에 제공해준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일을 정말로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가 자신으로 존재하면 하는 만큼,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될 뿐더러 더욱 안정적으로까지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우리는 결코 자유롭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생각 속에 갇혀 더 갑갑하게 느낄 뿐이다. 동시에 생각이 안정을 주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막연한 두려움만 증폭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가 마음을 마인드로 이해하려는 일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관용적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인 "마음에서 벗어나라."와 같은 진술은 바로 마인드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존재의 의미로 정확하게 이해되는 마음은 애초 벗어나야 할 소재가 아니며, 또 벗어날 수 있는 소재도 아니다. 나아가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일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인 것도 아니다.


하나뿐인 이 마음을, 이 존재를, 정성껏 아끼고 사랑하며 잘 존재하는 것,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이것이 전부다.


잘 존재하는 것, 이것이 정말로 모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수용전념치료(ACT)의 교과서 제목은 이 잘 존재하는 현실을 시사한다.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마인드가 아닌 마음을 살아가라는 의미다.


마음은 존재의 원리다. 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삶에서 잘 존재한다는 것이다. 잘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삶을 떠나지 않는다.


역으로, 삶을 떠나야 오히려 자기가 잘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것이 마인드다.


그래서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일만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전술한 것처럼 그것은 깨달음도 뭣도 아니다. 오히려 마인드 같은 것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삶을 깊게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가 바로 깨달은 이다.


슬기로운 마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잘 존재한다는 것이며, 잘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잘 산다는 것이다.


잘 사는 일, 이것말고 정말로 우리가 이 삶에서 달리 원하는 것이 있을까?


살펴본 바처럼, 잘 사는 일이 마인드, 곧 생각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잘 사는 일은 '생각'이 아닌 바로 '느낌'과 관계된다.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는 방식은 느낌이다. 느낌은 존재의 존재방식이다.


때문에 잘 느껴지는 만큼 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시, 이른바 '잘 생각하는 자'가 되려는 마인드 게임의 원리처럼, 우리가 '잘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대한 잘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냥 잘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생각의 원리는 능력과 연합된다. 그러나 존재의 원리는 능력이 아니다. 존재는 성공적이고 유능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건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건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곧, 우리가 유능한 플레이어가 됨으로써 게임의 감동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그 순간 찾아와 있는 '바로 그렇게 존재하는' 존재의 감동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욱 쉽게 말하자면, 이는 매순간마다 일어나는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이 존재방식을, 곧 현재의 느낌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무엇보다도 현재의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를 귀하게 느끼게 되는 자존감은 생각을 고쳐먹어 만들어지는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은 존재의 결과다.


마인드가 아니라 마음이다.


생각이 아니라 존재다.


능력이 아니라 느낌이다.


마음, 존재, 느낌, 다 같은 말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단지 걸어다니는 노트북이 아니라는, 게임 속 마을의 프로그래밍된 NPC가 아니라는, 기계론적 알고리즘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표현들이다.


그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존중받고 또 존중받아야 할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표현들이다.


존재하니까 사람이다. 느끼니까 사람이다. 곧,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이다.


마인드는 사람을 사람아닌 것으로 만드는 게임이며, 마음은 사람이 이미 사람인 증거다.


때문에 더욱 마음으로 사는 일, 그것이 더욱 귀한 사람으로 잘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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