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자"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는 그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대는 지켜야 할 것을 배신했고, 비겁하게 도망갔으며, 그대가 책임져야 할 다른 이의 인생을 망쳤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좌절로 끝난 인생이었다.
그대는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다며 하루하루 가슴을 옥죄이는 아픔을 느낀다고 했다. 밝은 빛 아래 더는 자신있게 걸어다니기 힘들다고도 했다. 휘청휘청 머리에 매달린 짐이 무거워 차라리 누군가한테 시원하게 얻어 맞고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1990년 12월 5일, 눈 내린 반포대교 위에서 그대의 이야기는 더욱 잘 들려왔다.
맞은편에서 오던 음주운전자와 충돌해 빙판길에 뒤집혀진 차 안에서 기어나온 택시기사는 그대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전했다.
"OO야───."
그 마지막으로 호명된 이름이 어떠한 의미인지 말을 전한 택시기사는 결코 알 수 없었듯이, 말을 전해받은 그대의 아이 또한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그 말은 그래서 오랫동안 자책의 탄식이 되어 왔다.
엄마 없는 10세의 아이에게, 이제 아빠마저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선고를 직접 내려야 했던 그대는 바로 아빠였다. 그대는 사건에 대한 피해자였고, 아이에 대한 가해자였으며, 스스로에 대한 심판관이었다.
그래서 그대의 마지막 말에는 늘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함께 따라 붙었다.
그대는 지켜야 할 것을 배신했고, 비겁하게 도망갔으며, 그대가 책임져야 할 다른 이의 인생을 망쳤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좌절로 끝난 인생이었다.
그대가 남긴 그 자책 속에서 나는 살았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반복되는 말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대가 살아간 39년이 결코 넘길 수 없었던 달력을 내가 넘기게 된 40년째의 날, 나는 알았다.
그대가 너무나 살고 싶었으나, 결코 살 수 없었던 그 첫날, 나는 알았다.
그대가 너무나 살고 싶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나는 알았다.
그대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와 함께.
그대가 닿을 수 없었던 그 다음 장을 나와 함께 걷고 싶어 간절했던 바로 그대와 함께 나는 지금 바로 그 다음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소망은 이어지고, 소망은 이루어졌다. 이어지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대가 남긴 것은 자책이라는 이름의 좌절된 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그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너를 만나 너무 좋았어."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마지막까지도 너를 생각할 수 있어서 참 기뻤어."
나도 그대를 만나 너무 좋았다.
그대는 나의 기쁨이었다.
그대가 나를 지켜야 했던 것이 아니라, 나의 기쁨인 그대를 나의 가슴 안에서 내가 지키고 있던 것이다.
그대가 자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속에서, 자책하는 그대를 잊는다. 소망하는 그대를 잇는다. 사랑하는 그대를 이룬다, 영원 속에서.
마지막까지도 그대를 생각하며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나는 무척 기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