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자의 끝은 반드시 피구원자에 대한 폭력이 되는가?"
하나의 문제상황 속에서 구원자를 자처하는 이가 구원자가 없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이를 고통스럽게 만들게 되는 현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그 문제상황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실은 문제상황을 해결해주겠다고 하는 구원자가 사람들을 죽인다. 문제상황이 야기할 것이라고 가정된 폭력에 대항할 자세를 갖추던 구원자는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폭력자가 된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은, 결과로 드러난 현상을 동일하게 그 시작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드러난 결과가 폭력이라면, 그 시작도 폭력이다.
이 폭력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누군가가 폭력을 경험했다. 그리고는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이 못나고 부족한 존재라서 이러한 일을 경험한 것만 같다. 만약 자신이 힘이 있는 존재였다면, 잘난 존재였다면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폭력에 대해 열등감을 경험하게 된 개인은 이제 자신의 유능성을 발달시키려고 한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소재를 동원해 우월한 능력을 개발하려고 한다. 아들러가 잘 묘사했듯이, 개인에게 형성된 열등감이 어떻게 우월감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지에 대한 그 모습이다.
우월감에 대한 추구란 곧 힘에 대한 추구다. 원초적인 성질이다. 원초적이기에 맹목적이다. 자신의 힘이 될 수 있는 것 중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정되는 것을 향해 개인은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그리고 그 소재는 이윽고 발견된다.
그것은 돈도, 지성도, 외모적 매력도, 신체적 힘도, 인기도, 명예도 아니다. 그러한 소재들은 금방 개인의 한계에 봉착하곤 하는 것들이다. 그보다는 더 지속적이고, 더 보편적이며, 더 영원할 수 있는, 거의 상실불가능한 힘이 필요하다.
도덕 및 윤리가 바로 그것이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개인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항시 우월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 문제에 대해, 도덕 및 윤리라는 성공적인 해법을 발견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 도덕 및 윤리라는 소재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대통령이든, 유명 연예인이든, 스포츠 스타든, 그 어떤 힘을 가진 이들이든 간에, 비도덕적이라는 꼬리표만 달리게 되면 모든 위세를 잃고 추방당하게 된다. 도덕 및 윤리가 분명 다른 여타의 힘보다도 강력한 힘으로 집행되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도덕 및 윤리라는 소재는, 몸을 키우고, 돈을 벌고, 성형수술을 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등의, 아주 지난하고 막연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소재로 보인다.
아주 단순하다. 도덕 및 윤리적인 척하는 말들만 하면 된다. 그 말들만 사람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게 하면 된다. 그리고 혹여나 비도덕 및 비윤리로 평가될 소지가 있을 수도 있는 자신의 실제적인 삶은 사람들에게 숨기면 된다.
우리가 TV에 나오는 특정한 연예인에 대해, "와, 저 사람 진짜 제대로 사네. 참 바르게 자랐다. 사람 참 진국이네."라고 후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가 그런 말들을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런 표정도 짓고, 그런 책도 쓰며, 그런 활동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말일 뿐이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그의 도덕 및 윤리적 언어가 그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한 초등학생이 동그라미 하나를 엉성하게 그려놓고 "이것은 천재가 그린 놀랍고 아름다운 걸작의 그림입니다."라고 자기가 말만 갖다 붙이면, 사람들이 그 아이에 대해 미술계의 천재가 나왔다며 대찬사를 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이다.
타분야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아주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질 성질의 것이지만, 유독 도덕 및 윤리라는 분야에서는 자기가 착하다고 말만 하면, 그 말이 그대로 평가의 근거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삶에 대한 절대적 기준으로 신봉하고 있는 도덕 및 윤리라고 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그 근거가 빈약한 것이며, 그 실제는 거의 언어적 환상에 가까울 뿐더러, 나아가 그 환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어쩌면 무지한 포퓰리즘적 원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거의 확증에 가까운 형태로 보여준다.
바로 그렇다고, 니체라면 이 지점에서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힘을 추구하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부르짖게 되는 것은 결국 정의다."
도덕 및 윤리가 구현하려는 목적, 바로 정의에 위탁하여, 개인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기제를 확보한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자신이 정의만 외친다면, 그 모든 우주적 대의는 자기에게 있는 것만 같다. 우주가 자기 편인 것만 같다. 그렇게 정의는 그 어떤 힘 앞에서도 자기가 그것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효과적 기제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점점 더 개인은 정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며, 그 결과 정의의 구원자로서 재탄생한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이가 도덕 및 윤리에 눈을 떠 정의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통속적 삼류 내러티브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정의의 구원자의 신화로 활발하게 보급됨으로써, 이러한 개인의 여정에 힘을 실어준다.
그로 인해, 정의의 구원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시키게 된 개인의 삶은 바야흐로 역사가 된다. 인과가 뚜렷한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구조화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열등감에 시달리던 개인이 바라던 많은 것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소재로 이 정의라고 하는 것은 평가되는 까닭에, 장사꾼들에게도 좋은 공급의 소재가 된다. 정의의 영웅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많이 생산되는 이유는 인류가 이제야 한 목소리를 내며 올바른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하게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돈벌이를 위해 장르문법으로 만든 통속적 콘텐츠에, 열등감에 빠진 개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것은 내 이야기야!'라고 감동받는 현실은, 그 자체로 조금 희극적이면서도 슬프지만, "철수가 바둑이와 놀다가 아야 하고 넘어졌지만 금방 영차 하고 일어나서 환하게 웃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고 '이것은 내 이야기야!'라며 눈물짓는 또 다른 누군가도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감상은 오롯한 개인의 영역이기에 존중되어야 할 일이다.
문제는 이 통속극에 근거해 만들어진 정의의 구원자라는 정체성을 이제는 역사화해버려 현실에 반영하고자 하는 개인의 그 움직임이다.
즉, 도덕 및 윤리가 구현한 정의라는 추상으로부터 얻어낸 자아정체성을 구체적 현실에 역수입해서, 현실에서도 자신이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도가 문제를 출현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은 결국 자기의 삶에서 경험하는 무수한 대상들을 잠정적인 피구원자로 보게 된다. 왜냐하면, 정의의 구원자라는 정체성을 자신이 기득권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더 많은 피구원자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이 그들을 구할 정의의 구원자로서 거듭 행세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의의 구원자라는 정체성을 채택하고 있는 이는 그 출발점부터 애초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무시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의의 구원자와 피구원자라는 구도 자체가 그 무시를 발생시킨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약자로 보는 것만을 구하려고 한다.
우리가 어떠한 이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약자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물론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일 수도 있다. 약자가 도움을 청할 때 그를 돕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정의의 구원자는 애초에 관심이 실제의 약자를 향해 있지 않다. 그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자신이 어떻게 정의의 구원자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는 약자를 끊임없이 창조해낸다.
마치 마이더스의 손처럼, 그가 보고 접촉하는 것을 전부 다 약자로 변화시킨다.
세상에 약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의의 구원자라는 그의 입지는 더 귀중해지고 또 공고화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최악의 수를 두기 시작한다.
약자를 더 많이 창조해내는 이 일이 최악의 수인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이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한 약자가 너무 많아, 그가 정의의 구원자로서 효과적으로 활동하기에는 심신의 한계가 너무 크게 동반된다.
항상 모든 악수는 자충수다.
자신이 정의의 구원자로 더 유지되기 위하여 더 많은 약자를 창조해낸 이 방식은, 결국 구원자로서의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게 되는 자충수가 된다.
그렇게 충분히 구원해주지 못하는 정의의 구원자에 대한 피구원자의 원망과 증오의 목소리가 높아져 갈 때, 이 정의의 구원자는 이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자기들을 위해 살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피구원자에게서만큼이나, 정의의 구원자에게서도 실은 원망과 증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평화롭게 웃으며 아닌 척해보아도, 피구원자를 향한 꼴보기 싫은 감정은 숨길 수가 없다.
어느새 정의의 구원자는 피구원자를 평가하고 있다.
피구원자를 도덕 및 윤리의 기준들로 심판하고 있다.
그는 이 거래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경험한다.
그러나 공정하지 못한 것은 시작부터 그일 뿐이다. 사람들을 약자로 보며 그들에게 구원의 힘을 행사하려는 부당거래를 먼저 시도한 것은 바로 그다. 더 많은 약자를 만들어 자신의 거래처를 늘리고 정의구원사업을 확장하려고 획책한 것 또한 바로 그다. 각종 미디어에 나와 열렬하게 자기 자아의 정의로운 영웅성을 홍보한 것 역시도 그다.
자신이 사기를 치려다가, 도리어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뿐이다.
그런 비참한 기분에 시달리는 정의의 구원자는 이제 피구원자를 혐오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피구원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의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다.
이러한 기획이 실현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조금 덜 기만적인 방식과, 조금 더 기만적인 방식이 있다.
조금 덜 기만적인 방식은, 혼내는 것이다.
유교훈장처럼 되어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며 시종일관 피구원자들을 훈육하는 방식이다. 동물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어야 한다느니, 도덕 및 윤리의 힘을 가져야 한다느니, 사람다운 도리를 알고 살아야 한다느니, 하는 억압적 언어들로 피구원자로 상정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방식이다.
조금 더 기만적인 방식은, 사실 아주 치사한 방식은, 혼나는 것이다.
이것은 임의의 대상에게 정의의 구원자를 투사하여, 자신은 그 앞에서 피구원자인 척 입장을 뒤바꾸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은 순결한 피해자인 것처럼, 자신이 구원자를 투사한 대상은 나쁜 존재인 것처럼 구도를 형성한다. 그리고는 그 구원자적 존재에게 어떻게든 피구원자인 자신이 혼나는 상황을 일부러 유도함으로써, 결국 정의의 구원자가 피구원자에게 폭력을 집행하는 그림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한다. 자기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그 목적이 실현되는 셈이다.
그렇게 이 치사한 방식 속에서는, 어떤 입장에서건 자신은 나쁜 존재가 아니라 순수하고 착한 도덕적 영혼인 척하고 싶어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것은 씨앗이다. 폭력의 상황이 종결되면, 그 순수하고 착한 도덕적 영혼의 씨앗을 발아시켜, 다시금 자신이 정의의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계획을 위해 남겨둔 씨앗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폭력은 끝없이 반복된다.
정의의 구원자가 자행하는 폭력은 아주 은밀한 형태로 태세를 전환해가며 그 폭력성을 포기할 줄을 모른다.
그렇게 이 폭력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이 바로 최종적인 폭력의 형태다.
시작이 폭력이었기에, 그 최후까지도 폭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의의 구원자가 자신을 역사화한 그 정체성의 역사를 폭력의 역사라고 부르는 일은 지당한 일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역사는 결국 열등감의 역사다.
폭력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개인이, 자신의 열등감을 영웅적 우월감으로 뒤바꾸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전략으로 일관되게 전개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랍게도, 이것은 그 실재가 전무한 망상의 역사다. 허깨비와 같은 역사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개인은 망상에 빠져 사람들을 무시하고, 심판하며, 폭행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시작한 열등감 자체가 착각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대한 생명체의 가장 정확한 반응은 무엇인가?
고통이다.
고통을 고통으로 지각한 이에게는 열등감이 끼어들 판이 없다.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모든 것이 충분해지는 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통은 열등감과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프다고,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고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순수한 성질의 것이다. 열등감 같이 일그러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동물들에게는 열등감이 없다. 폭력이 가해진 반응으로서의 고통을 고통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신을 돌보는 일을 한다. 돌보는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회복되기에 자신의 못남을 자책할 일이 없다.
그렇다면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서 왜 인간은 고통이 아닌 열등감을 택하고 있는가?
유아적 전능감 때문이다.
유아적 전능감은 자기가 신이라고 믿는 유아의 상태다. 부모에 의해 자신이 가장 최고라고 떠받들어진 아동일수록 이 유아적 전능감을 포기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모든 심리상담의 이론에서, 이 유아적 전능감의 포기는 개인의 심리적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심지어는 양육적 기제를 핵심으로 여기는 정신분석계통의 접근들조차도, 개인이 고집하고자 하는 유아적 전능감을 얼마나 잘 포기시키느냐가 상담의 성패를 판가름할 정도다. 자기심리학의 하인츠 코헛은 대표적이다. 그에 의하면, 아동은 자신의 전능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가져야만, 자신과 타인의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유아적 전능감에 빠져 있는 개인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전능감이 깨어질 무수한 사건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은 그 사건들을 하나같이 다 폭력의 사건처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이 신이 아님을 드러내어주는 사건들을 강압적인 폭력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 개인이 얼마나 자신을 신으로 간주하고 있는가의 정도를 말해준다.
그러나 유아적 전능감은 반드시 깨어진다. 삶은 오만한 자아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그 전능감이 크게 깨어지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지금껏 자신을 이 우주에서 제일 높은 존재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개인은 하늘의 옥좌에서 추락하는 듯한 심정을 맛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열등감이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자신을 상정하던 이가 실패와 패배를 경험한 그 느낌이 바로 열등감이다. 이처럼 열등감은 그 태생부터가 오만한 것이다. 자신을 남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던 이만, 남들에 대한 열등감을 경험한다.
그렇게 유아적 전능감이 깨어져 열등감이 생겨났을 때, 이제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은 다시금 자신이 잘날 수 있는 우월한 소재를 확보하고자 한다. 그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도덕 및 윤리며, 곧 정의다. 도덕주의에 근거한 정의의 영웅은 새롭게 개인이 동일시할 우월한 자아정체성의 모델로 마련된다.
유아적 전능감이 열등감으로, 그리고 영웅적 전능감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그러니 영웅적 전능감으로 가득한 정의의 구원자가 피구원자를 무시하고 하대하는 폭력을 저지르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 시작점인 유아적 전능감을 가진 아동 자체가 이미 자기만 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던 상태인 까닭이다.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아동이 자신의 동생을 대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기가 사탕을 별로 먹고 싶지 않을 때, 그는 사탕을 못먹어 불쌍해보이는 동생에게 사탕을 주는 구원을 제공한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을 신처럼 확증한다. 사탕을 못먹어 울고 있던 동생이 자기로 인해 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동생은 자기의 권속처럼 인식된다.
그런데 자기의 권속인 동생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장면이 발생한다. 자기는 귀찮아 움직이고 싶지 않은데, 동생이 애교있게 웃음지으며 자기에게 식탁 위에 놓인 사탕을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다. 그는 씩 웃으며, 사탕봉지를 들고는 그대로 쓰레기통에 봉지를 쑤셔넣는다. 동생이 울상이 되면 될수록 그의 입가에는 더 선명한 미소가 새겨진다. 웃고 있던 동생을 울릴 수도 있는 자신의 전능한 힘을 증명한 까닭이다.
유아적 전능감은 이처럼 영웅적 전능감과 똑같은 것이다.
사람들의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겠다고 하는 그 구원의 기제는, 사람들의 웃음을 눈물로 바꾸겠다고 하는 폭력의 기제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다. 그 둘 다 그저, 사람들을 자기 생각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전능성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유아적 전능감이라는 망상적 착각에 의해 열등감이라는 망상적 착각은 생겨나며, 그로 인해 정의의 구원자라는 망상적 착각이 생겨난다.
그 시작이 착각이었기에, 그 끝도 착각이다.
그 시작이 폭력에 대한 착각이고 착각에 의한 폭력이었기에, 그 끝도 폭력에 대한 착각이고 착각에 의한 폭력이다.
누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가?
자신의 서러운 열등감을 성실한 노력으로 극복해내 이제는 당당한 영웅이 된 저 구원자가, 정의를 위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유아적 전능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 이제는 영웅적 전능감으로 똘똘 뭉치게 된 저 심리적 미발달의 주체가, 자기 자아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열등감이 오직 오만함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가엾게 보고 있는 저 열등감의 역사가 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
구원자에게서 최대한 빨리 등을 돌리고 자신의 고통을 마주해야 한다. 전능감을 얻기 위해 고뇌하는 구원자의 비애를 헤아릴 시간에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돌봐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문활동에 지쳐 야윈 구원자를 위해 울 시간에 고통받고 있는 자신을 위해 울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열등감의 역사는 끝난다.
고통을 획책없이 다만 고통으로 보며 그 고통을 돌보는 응답의 행위 속에, 우리가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고통을 회피할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열등감이며, 고통에 응답한 결과로 시작된 것이 성숙함이다.
고통이 아물어지는 성숙함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 끝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