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존재 사기극을 망쳐보자

"네 이웃을 시험하지 말고, 네 자신이 시작하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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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사농공상의 계급제에 근거한 조선선비사회가 남긴 심리적 유산을 지지하기에 참 적절한 나머지 한국사회에서 자주 쓰이다보니, 매우 자주 펜은 착각을 하곤 한다. 자기가 정말로 가장 센 줄 아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훈 작가는 이러한 말을 한다.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심지어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자기의 작품을 통해 널리 알린 장본인인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조차도 그 말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을 달아놓는다.


"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총체적으로 위대한 사람의 지배 아래서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


아주 단순하다.


총체적으로 위대한 사람, 즉 전인적으로 삶과 일치하여 사는 인간이 언제나 펜의 위에 있다.


무조건적으로 사람이 펜에 앞선다. 무조건적으로 인간이 문학에 앞선다.


때문에 펜이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커피자판기가 인류를 구원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사실은 애초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인간을 조력한다는 것과, 인간이 만든 도구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인간이 만든 도구를 인간 자신이 신격화하는 것, 그것이 우상화의 현상이며 동시에 자기소외의 현상이다.


그래서 도구의 우상화를 해체하고 인간의 자기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활동하는 실존철학의 공통적인 선언은 언제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이다. 이 명제를 다양하게 변주하면 다음과 같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존재가 언어에 앞선다.

사실이 허구에 앞선다.

삶이 이야기에 앞선다.

사람이 도덕에 앞선다.

몸이 정체성에 앞선다.

무아가 자아에 앞선다.

온전함이 꿈에 앞선다.

바다가 파도에 앞선다.


다 같은 말이다.


전자의 것이 후자의 것을 앞선다는 말은, 후자의 것이 전자의 것을 좌우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려 할 때 발생하는 것이 폭력이다. 그래서 후자의 것은 전자의 것에게 늘 폭력을 가한다. 전자의 것은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폭력인 줄 모르고, 마치 칼보다 훌륭한 펜인데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 라는 태도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폭력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 펜은 건방지게 된 것이다. 자기가 조형하는 언어로 모든 것이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과대망상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 펜이, 즉 언어가 존재를 자기 뜻대로 변용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게 될 때, 이것은 심대한 사기극이다.


사기라는 것은 말로 지어내 진짜인 것처럼 속인다는 것이다. 때문에 문학과 사기의 경계는 한 찰나다. 그러나 그 경계는 아주 명확하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어떠한 언어로도 존재 자체에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존재는 언어의 밖에 있다. 이것이 경계다.


이 경계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선(禪)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무리 언어화 작업을 아름답게 한다고 존재가 언어를 통해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착각을 하는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유교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언어로 자기를 구성하는 일이 존재를 구성하는 일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다. 그 결과는 전술한 것처럼 강압적인 폭력이다.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아무리 잘 사용한다고 존재를 포착할 수는 없다. 하물며 존재를 임의대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언어의 건강한 관계방식은 결국, 말한 대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기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있게 하려고 할 때, 자기가 지어낸 말처럼 존재도 그래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은 분명한 사기다.


존재에 대해 사기를 시도하는 것이니 '대존재 사기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흥미롭게도, 이 대존재 사기극을 시도하는 이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이 있다.


그것은 세상과 타인을 시험하려고 드는 모습이다.


펜의 위세를 가장 높이 뽐내는 이가 결국 시험출제자이자 채점위원이 되는 것과 같다. 그래야만 인간이 어떻게 똑바로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고 있는 자신의 언어적 권위가 설 수 있으며, 그 권위를 바탕으로 세상과 타인을 채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상을 신처럼 정립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시험은 거의 대부분 애착에 대한 시험으로 드러난다. 언어를 통해 자기의 전능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체는, 유아기적 전능성을 담보해줄 부모와의 애착의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내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 자체가 애초 유아의 소망이다. 여기에서 애착된 부모는 유아의 말을 실현해줌으로써 유아가 전능감을 느끼게 해줄 대상적 도구가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유아가 "엄마!"라는 말을 발화하면, 어디선가 엄마가 달려와 표현 그대로 유아의 눈앞에 '있게' 된다. 그래서 유아는 그 전에는 없었던 엄마가 자기의 말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으로 경험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이다. 이것이 유아가 말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뜻대로 무엇인가를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마법적인 힘으로 믿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다.


이처럼 언어를 마법으로 생각하게 되어 전능감을 확보하게 된 유아는 그 전능감이 붕괴될 사건을 경험했을 때, 자신의 전능감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개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더 우월해보이는 언어를 수집해서 다시 한 번 전능한 신과 같아질 수 있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


이 바벨탑을 축조하는 과정이 바로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가 세상과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그 과정이다. 자기가 유아 때 엄마를 언어로 좌우할 수 있는 것처럼 경험했던 그 순간을, 세상과 타인을 언어로 좌우할 수 있는 시험을 끊임없이 실시함으로써 다시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는 일종의 엄마와 같은 대상물로서 타인을 상정하고 타인의 존재를 시험하려고 한다. 자기가 언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진정한 존재란, 곧 자기가 말하는 대로 무조건 통제되어 줄 부모와 같은 모습이기에, 타인의 존재가 바로 그러한 존재로서 적합성을 띠고 있는지를 시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는 세상과 타인을 무시하며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는 의도적으로 퇴행한 모습으로, 세상과 타인에게 그러한 자기를 받아줄 것을 시험한다.


물론 이것은 불공정한 시험이다. 두 가지의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로,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는 정작 자기 부모는 일정 이상으로 시험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의 부모에게는 순응적인 모습으로 웃음지으며 서로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미화해나가는 가운데, 오직 타인에게만 이 시험을 출제한다.


이들이 자기 부모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부모가 그 시험에 낙방한다면, 자기는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러기는 싫다. 부모에게 유착되어 있는 이 주체에게 있어서는, 부모와의 분리만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들은 부모 대신에 이웃을 시험한다.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함으로써 필연적인 파멸에 빠트린다. 그렇게 이웃을 망침으로써 이들은 그 반사이익으로 자기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친밀성을 회복한다. 이것이 반사이익이 되는 이유는, 이들이 자기의 부모에게 느끼던, 부모와 분리될 소지가 될 수도 있을 '위험한 감정'을 이웃에게 투사함으로써, 이웃을 희생양으로 대신 소외시키고 자기의 부모와의 관계를 지키는 일에 성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의 불공정한 이유를 시사하는데, 그것은 이 시험이 처음부터 합격이 불가능한 시험이라는 것이다.


출제된 시험에 대해 시험받는 상대가 일정 이상의 점수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합격선을 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시험은 애초에 누구도 합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험의 의도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도 자기가 언어로 만들어낸 기준점을 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언어가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자기의 논리가 증명되는 것처럼 그림을 연출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이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가 이처럼 존재에 대해 사기를 치며, 존재를 패배시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이들이 존재를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왜 싫어하냐면, 자기의 존재 자체가 자기의 고통의 이유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은 엄마와 같은 대상물이 없으면, 자기의 언어를 들어줄 청자가 없으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존재는 하찮고 무력하게만 경험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기의 존재가 전능성의 소재인 동시에 고통의 소재인 셈이다.


때문에 이들은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그러한 자기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목적으로 이들은 언어를 발전시켰다.


존재 위에 언어라는 크레파스로 덧칠하고 또 덧칠한다. 존재를 새까맣게 지우고 싶은 것이다. 새까맣게 망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 대신에 자기가 칠한 언어가 진정한 자기라고 사람들이 알아봐주기를 바란다.


태어날 때부터 공짜로 받은 명품백은 철저하게 짓밟은 뒤 갖다 버리고, 백화점 포장지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이것이 진정한 나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이들이 혼자서 그러고 있다면야 희극이지만, 이 희극은 십중팔구 비극이 된다.


이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는 이내 웃으면서 일어나 포장지를 들고 흔들며 이렇게 외치곤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여러분 자신을 말하세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채색하세요!"

"여러분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세요!"


존재라는 명품백을 갖다 버리고 언어라는 포장지를 신주단지처럼 진정한 나로 모시라는 이 양치기소년의 대존재 사기극은, 이처럼 더 많은 이들이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도록 하는 비극으로 펼쳐진다.


마약을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려고 하는 이들이 굳이 그 마약을 좋은 것으로 선전해 다른 이들도 그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도록 전력으로 촉구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기는 언제나 사기를 기획하는 이의 이득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언어를 신봉하게 되는 현실이 생겨날수록, 그 현실은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가 유능한 언어적 지배력과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존재는 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면 실제적인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잃은 그 힘은 이제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에게로 간다.


대존재 사기극을 펼치는 양치기소년이 존재를 늘 패배시키고자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힘을 얻고 싶어서다. 자신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힘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기들의 존재를 부정하게 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철수된 힘을 자신이 독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흡사 기생충의 생태와도 같다.


남의 힘을 빼앗아 자기의 힘으로 만들겠다는 약탈의 논리며 착취의 논리다.


어쩌면, 부당한 사회구조 속에서 계급적 우위만으로 이득을 얻는 이들의 힘을 자신도 좀 나눠가지면 안 되냐고, 그들에게서 그 부당이득을 좀 취하는 일이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고, 이들은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마치 정의로운 의적이라도 된 양, 서민을 수호하는 협객이라도 된 양, 언어적 미화를 다시 또 시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이들은 자기들의 말처럼 상류계급에서 힘을 약탈해온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약자로 보이는 쪽에서 힘을 약탈해왔다. 자기들이 비판하는 그 지배계급의 모습과 동일한 구조와 방향성으로 자기들 또한 행위하고 있던 것이다.


즉, 이들은 자기보다 큰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작은 것만을, 적어도 자기에게 만만해보이는 것만을 약탈하려고 하는, 마치 아이들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흡혈귀와도 같다.


차라리 자기보다 큰 것에 도전하는 모기가 대견하다.


보통 이 흡혈기생충의 이름을 구루라고 한다.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는 아주 빈번하게 이러한 구루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기의 존재방식은 그렇지 않으면서, 즉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마치 그렇게 사는 것처럼 언어로 위장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형태로 약탈을 꿈꾼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친절한 선의로만 가득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의 흡혈행위를 언급하면, 이들은 진실로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듯 무고한 얼굴로 어리둥절해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물론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가 지어내 채택하고 있는 자기의 창작물만을 이들은 자기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소년점프에서 연재되는 왕도만화들만큼이나 순수하며, 그렇기에 눈먼 폭력의 이유가 된다.


이들은 결국 삶 대신에 언어를 사는 이들이다. 언어적 효과를 오히려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존재가 망각된 자리를 언어로 대신하고 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삶은 존재의 기억이다. 존재를 상기시키고 복원시키는 사건들의 연쇄를 삶이라고 부른다. 곧 삶은 존재 스스로가 자신을 열어젖히며 들이닥치는 사태다. 삶은 존재사태다.


삶이라고 하는 이러한 역동적 사태를 언어로 철저하게 봉쇄하려 하니 삶이 실감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에게 삶이란 고작해야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계적인 두 감정요소일 뿐이다. 그리고 그 두 요소는 하나의 프레임 위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생존이다.


존재의 모든 차원이 전부 다 거칠고 투박하게 생존의 차원으로만 환원되어버리는 이 현실이, 바로 "언어가 존재에 앞선다."라는 말을 신봉하며 존재를 언어로 대신하고자 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흡사 언어라는 망치로 때려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술적 원시부족의 전사들과도 같다.


대존재 사기극의 주체인 구루들은 자신들이 언어의 신비로운 힘을 활용하는 마법사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실체는 이처럼 야만전사다.


그래서 언어를 신앙하는 이들은 사실 언어에 대한 최고의 모독자이기도 하다. 어떠한 것을 가장 모독하는 방법은 그것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학생 아이가 무협지를 보고 알게 된 한자어들을 활용하며 현란한 문장을 조형한다고 그것이 언어를 잘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은 아니다. 언어로 자기의 전능한 힘을 드러내 세계를 복속시키려 할 때 그 언어는 망치와 같은 폭력의 도구일 뿐이다.


언어의 놀라운 힘은 "아 너 파악했어! 이제 내가 설명할 수 있어!"라며 세계를 정복하는 수단으로 쓰일 때가 아니라, 세계의 온전성을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묘사하는 목적으로 쓰일 때 개방된다.


이것은 시의 의미다.


시는 언어가 가진 가장 본래적인 힘이 구현된 방식이다.


언어는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즉, 언어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더 잘 말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애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그렇게 언어는 바로 존재를 말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본질이며, 이 본질과 접촉되어 발휘될 때만 언어는 힘을 갖는다. 말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하고자 할 때만 언어는 힘을 갖는다.


그 힘이 바로 우리가 시를 경험할 때 느끼는 존재의 감동이다.


이와 같은 시의 감동은 언제나 파격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는 우리가 언어로 축조한 가상현실의 바벨탑을 붕괴시킨 뒤, 언어로 가리고 있던 존재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탈언어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언어이지만 언어를 무너뜨리고 그 언어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때문에 시는 또한 자기죽음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 자기죽음이야말로 자기초월의 정확한 면모다. 그렇게 시는 자기초월의 언어다.


이러한 방식으로, 언어는 자기가 말한 것을 전부 부정하고 초극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 언어가 자기죽음을 꾀하는 바로 그 자리가 존재와 접촉되는 그 자리인 까닭이다.


언어는 존재와 연결될 때만, 존재사태인 삶과 연결될 때만 힘을 갖는다. 그 힘은 언어의 몰락과 퇴행으로 인해 생겨난 대존재 사기극을 붕괴시킬 힘이다.


자신이 언어를 다루는 신인 양 타인에게 문제를 출제해 늘 시험에 들게 하는 양치기소년의 우행이 존재를 끊임없이 모독할 때, 이 탈언어적 언어의 힘은 그 반대편에서 존재를 신뢰하는 역사를 쌓아올린다.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 신뢰의 방식으로서 자신이 시험을 치는 것이다. 자기를 억지로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타인에게 시험을 출제하는 일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신뢰해보고자 자신이 직접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그 시험을 삶이라고 부른다.


삶에 정직한 일, 그것이 존재를 신뢰하고자 하는 시험을 기쁘게 치르는 일이다.


내 자신의 정체성이나 능력이나 진정한 본질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의 존재를 한번 신뢰해보고 싶은 이들, 그러한 이들의 답안지에는 시가 적혀내려간다.


제출할 필요도 없이 합격이라는 것을, 이미 환희하고 있는 그들의 온몸이 안다.


그렇게 시는 온몸으로 쓰는 노래다.


삶 앞에 선 맨몸뚱이가 빚어낸 우주 최고의 모범답안지다.


존재로 산 명쾌한 그 결과다.


언어로 사기치지 않고 존재로 살 때, 대존재 사기극을 과감히 망쳐볼 때, 그러면 우리의 삶은 시가 된다.


우리는 새롭게 시작(始作; 詩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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