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이 뭐예요?

"그리고 실존상담은 뭐예요?"

by 깨닫는마음씨




심리상담은 심리와 상담이 결합된 개념의 활동입니다.


심리는 '마음이 돌아가는 원리'를 뜻하고, 상담은 '서로 묘사하는 일'을 뜻합니다. 즉, 심리상담은 마음이 돌아가는 원리를 서로 묘사함으로써 밝히는 활동입니다.


일상적 대화와 상담적 대화가 다른 이유는 서로 묘사하는 이 방식에 있습니다.


묘사는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일입니다.


일상적 대화에서는 이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일이 잘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또는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은대로 그리려고 합니다.


일상적 대화에서 우선해서 작동하는 것은 관계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원리는 마음의 원리와 아주 많이 충돌합니다. 이러한 충돌이 발생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마음의 원리가 우선인데, 관계의 원리가 억지로 마음의 원리를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원리란 사실 마음의 원리의 열화된 복제물과 같습니다. 곧, 마음의 원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 그것을 따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관계의 원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복제물에 불과한 관계의 원리는 자기가 오리지널인 마음의 원리보다 더 대단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관계라면서 관계보다 우선하는 마음은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관계의 원리가 마음의 원리에 대해 강압적인 폭력을 행사하면, 슬그머니 마음은 뒤편으로 숨어듭니다. 자기 자신을 은폐합니다. 있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묘사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은폐된 마음을 다시 있는 그대로의 형상으로 되풀어내는 일입니다. 관계의 원리를 해체하고 마음이 생긴 모습 그대로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도록 개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상담적 대화 속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는 차마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사고들, 차마 느끼려 하지 않았던 감정들, 차마 상상하려 하지 않았던 의미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말은 다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금지되었고, 그렇게 느끼면 안 된다고 금지되었고, 그렇게 상상하면 안 된다고 금지되었던 것들이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상담적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원래 있었지만 없는 것처럼 부정되었던 것들이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심리상담의 본질은 사실 하나의 생각을 다른 좋은 생각으로 바꾼다거나,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의 무게를 덜어낸다거나, 관계적으로 가치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거나 하는 정도만의 활동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과 복권을 겨냥하는 엄연한 존재론적 활동입니다.


실존상담은 바로 이 심리상담의 본질적 부분에 더욱 초점을 맞춘 상담방법론입니다. 심리상담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인지적 도식이나 감정적 반응 또는 의지적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존재가 현재 드러내는 하나의 존재방식으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실존상담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특정한 존재방식이 어떻게 금지되었고 왜 금지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이를 통해 다시금 나의 존재가 향하고 있던 그 방향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실존상담의 주된 일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이는 마음이 돌아가는 현재의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온전한 지도를 얻게 되는 일과도 같습니다.


"내 마음이 왜 이러지?"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이 두 질문은 같은 질문입니다.


실존상담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제공합니다.


절대로 모호하지 않습니다.


실존상담에는 반드시 명쾌한 답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분명한 해명이야말로 실존상담의 독보적인 특징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에는 중력이라고 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실존상담은 나라고 하는 존재의 법칙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나는 분명하게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이야기는 관계의 원리의 부산물입니다. 그러나 나는 관계의 원리를 애초 앞서 있습니다. 나는 마음의 원리로 돌아가는 존재의 법칙 위에 서있습니다.


심장과, 폐와, 십이지장이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듯이, 나는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관계가 낳은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스스로 존재합니다.


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 이야기 밖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이야기 밖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야기 밖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바로 신비입니다.


신비의 다른 이름이 사실입니다.


사실이 언제나 가장 신비한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체가 떨어지도록 작용하는 중력은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그냥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사실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듯이 원래 우리의 존재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 또한 신비입니다.


지금껏 한평생 분명히 우리 자신이 무슨 문제가 있고 모자라서 더 발전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철저하게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 느낌은 분명 신비에 대한 감동입니다.


신비에 대한 감동을 경외감이라고 부릅니다.


경외감은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만났을 때 경험되는 느낌입니다.


신비가 이처럼 이야기 밖에 있는 더 큰 것이며, 신비를 만난다는 것은 이야기 밖의 더 큰 것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더 큰 그것이 바로 존재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보통 자아입니다.


자아는 내가 서사적으로 만든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아가 이야기 밖에서, 곧 자아 밖에서 만나게 된 더 큰 것,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존재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자아가 나의 존재를 신비로 알게 되는 일, 이것이 존재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는 일입니다.


많은 심리상담의 접근이 자아의 문제를 다룰 때, 실존상담은 이처럼 자아 밖의 문제를 다룹니다.


심리학적으로 조금 변주해서 묘사하자면, 실존의 뜻 자체가 원래 '자기라고 가정된 자아[이야기]의 바깥에 존재하다.'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미 '사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존재'입니다. '실존'하고 있습니다.


그런 줄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무 문제없이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뿐입니다.


어떠한 것을 모르게 될 때는, 이미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착각이 작동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존을 모르게 된 이유는, 진정한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의 면모를 이미 상정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설계도에 따라 재료를 모으듯이 '진정한 나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더 많은 이야기의 소재를 수집해서 이미 알고 있는 '진정한 나'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을 진정하게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의 여정입니다. 답정너 게임입니다.


대표적으로 융과 같은 이는 자아가 심층적인 내면의 여정을 떠남으로써 결국 진정한 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자아의 신화를 묘사해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융이 평생동안 자기 옆에 있던 복수의 여성들이 자기에게 제공하는 모성의 관계적 혜택에 의존해서만 그 자신을 펼쳐낼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역시 관계의 원리를 우선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융은 이야기를 신봉한 것입니다. 관계가 만드는 것이 자아이며, 자아는 이야기로 구성되는 까닭입니다.


미국의 실존상담의 성립에 크게 기여한 실존신학자인 틸리히는 이러한 입장에서 융을 비판합니다. 그 비판의 내용인 즉, 융이 원형이라는 유용한 상징적 개념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융 자신은 원형적 이야기들에 문자주의적으로 도취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성장해서 진정한 내가 된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성장해서 신이 된다는 이야기와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경계의 장애가 있습니다.


성인을 신처럼 보는 아동이 보통 이 경계의 장애를 드러냅니다. 아동이 성장해서 성인이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의 장애가 있는 아동은 자기가 성장하면 전능한 신이 되는 것처럼 혼동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에 몰입하고 도취합니다.


경계의 장애는 곧 범주의 오류이기도 합니다.


아동이 성인이 되는 것과,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범주의 일입니다.


범주의 오류는 곧 사실에 대한 오류입니다. 어떠한 것이 사실이고, 또는 사실이 아닌가, 이 경계가 분명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무 문제없이 온전한 존재로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실존상담은 그래서 경계에 대한 문제를 정확하게 하고자 합니다.


자아와 나 사이에 엄밀한 차원의 벽을 설정합니다.


자아의 이야기, 즉 자아가 쓰는 신화가 아무리 위대해도,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나에게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 아무리 대단해도 책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며, 인간이 아무리 유능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는 환상적이지만, 신비는 아닙니다.


환상은 경계가 모호할 때 생겨나는 것이며, 반대로 신비는 경계가 명확할 때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렇게 수많은 역경을 이기고 공주의 앞에 도달해 공주와 키스하게 되는 이야기는 환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공주가 내 자취방의 초인종을 누르고 문앞에 반가운 미소로 서있는 것입니다. 관계에 무용한 형편없는 날백수인 나를 가슴 깊이 사랑한다고 하는 공주의 고백을 듣는 것입니다.


즉, 자아, 관계, 이야기는 조건적이며, 이쪽에서 만드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나, 존재, 신비는 무조건적이며, 저쪽에서 오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의 차이입니다. 이 우주에게 가장 엄밀한 그 차이의 경계입니다.


실존상담이 이 상대적 관계의 현실 속에서, 절대적인 어떤 것을 개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그 절대적인 현실이 인간이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현실임을 알리고자 하는 그 뜻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실존상담은 매우 자주 선(禪)과 비교됩니다. 표현이 역설적이지만, 그 둘은 마치 배다른 쌍둥이처럼 묘사됩니다. 둘 다 상대적 현실 속에서 가능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을 향한 희구의 방법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실존상담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점도 다시 한 번 분명해집니다. 실존상담은 소위 종교성 내지 영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존재를 절대적 차원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기획들에 동의하고 있는 철학적 심리상담의 방법론입니다.


상대적인 관계의 현실 속에서 다만 잘 적응하며, 또는 관계를 자기의 뜻대로 좌우하며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관계 이상의 더 온전한 것으로서 펼쳐 드러내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존재의 심리학이라고 하면 아주 정확합니다.


행위의 심리학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행위한 인간을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제시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모델링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내포하는 관계유지의 기능, 즉 윤리의 기능입니다. '나쁜 짓을 하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또는 '착한 일을 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준다.' 등으로 이야기가 보급되고자 하는 그 목적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심리학은, 망태할아버지와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우리 자신의 존재가 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러한 채찍과 당근이라는 관계의 두 요소로부터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바로 그 사실을 보급하고자 합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착한 아이여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성장해 착한 어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자발적인 노예가 될 수 있는가, 그럼으로써 성장해 자기의 금족쇄를 자랑하는 주체적인 대장노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아니,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답게 쓰여야,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고 자발적인 노예화의 길로 투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속상한 일입니다.


인간이 고작해야 자기가 만든 이야기에 속박되어 그 노예로 살게 되는 현실은 속상한 현실입니다.


좋은 이야기의 노예라고 노예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언제나 인간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을 조성하고, 스스로를 못나고 부족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특히나 나쁜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바꾸는 일이 가장 이 인간소외의 현실을 부채질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좋은 이야기에 마치 자신의 존재를 바꿀 마법적인 힘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이야기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의 충실한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실존상담의 표어는 이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나쁜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실존상담의 표어는 이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그 모든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며, 그 모든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이, 당신은 절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입니다."


심리상담과 불교를 비교하는 연구들에서는 이러한 비유를 곧잘 하곤 합니다.


"심리상담이 나쁜 꿈을 좋은 꿈으로 바꾸어주는 작업이라면, 불교는 그것이 다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다."


실존상담은 불교와 같은 맥락에 서있으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사실이 꿈보다 더 재미있다."


이야기를 예찬하는 노예상인들은, 사실을 마치 건조하고 지루한 소재인 것처럼 오도하면서, 그에 반대되는 꿈의 속성을 즐겁고 아름다운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노예상인들 자신의 삶이 건조하고 지루한 것이지, 사실이 건조하고 지루한 소재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노예상인들의 삶이 건조하고 지루해진 것은 그들이 바로 사실을 무시하며 환상 속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상은 건조하고 지루합니다.


알코올 중독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술은 재미있는 소재가 결코 아닙니다. 알코올을 소비하는 그 과정이 너무나 건조하고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알코올이 현재의 자기를 잊게 해주기 때문에 마시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소비하고 이야기에 중독되는 이유 또한 동일합니다.


사실은, 이야기를 잊고 싶어서 이야기에 중독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아를 잊고 싶어서 자아에 도취되며, 관계를 잊고 싶어서 관계에 몰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과 동일시되어 같은 입장이 되면 더는 그것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범죄자를 오히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의 내용입니다.


결국 이들은 정말로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현재 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그러나 이야기를 사실 싫어하면서도, 이야기를 떠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역으로 이야기를 좋은 소재로 예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폭행하는 부모를 떠나 살 수 없다고 믿는 소년이, 자기 부모를 좋은 사람으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소년이 몸에 새겨진 폭력의 증거를 사랑의 증표로 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환상은 언제나 이처럼 건조하고 지루한 것입니다. 거칠고, 척박하며, 폭력적인 것입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진지한 눈망울로 그 소년의 눈을 마주하며 이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네가 사실은 아프다고 단 한 마디만 해주렴. 이제는 맞고 싶지 않다고 단 한 번만 말해주렴. 그러면 언제 어느 때라도 내가 그 즉시 달려가마. 네가 아파하는 그 자리에 반드시 내가 네 옆에 서있으마."


바로 나의 목소리입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소년 자아를 구하려는 또 다른 등장인물인 영웅적 자아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야기 밖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입니다.


이 존재의 목소리를 따르면 재미있는 일들이 펼쳐집니다.


더는 고통스럽지 않고, 또 고통을 참고 있느라 권태스럽지도 않으니까,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뻔하기 짝이 없던 동네의 골목길조차도 새롭게 보입니다. 새로운 그 현실 속에서 숨만 쉬어도 왠지 모르게 재미있습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숨만 쉬어도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일상을 지배하던 건조하고 지루한 이야기의 주박에서 풀려나, 이야기 밖의 비일상으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비일상을 향한 모험의 감각이 찾아듭니다.


비일상은 이야기가 없는 곳입니다.


오픈월드입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곳도 아닙니다. 자기가 주체고, 세상은 그 주체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객체인 그런 무대가 아닙니다.


자기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똑바로 세워야 한다는 그 모든 당위적 의무가 무의미해지고 불필요해지는 곳입니다.


수행해야 할 미션이 없는 곳, 그곳이 오픈월드입니다.


자유의 현실입니다.


다만 태어나서 좋은 곳입니다.


해야 할 숙제가 없이, 자신의 존재를 편하고 자유롭게 누려도 되는 곳, 우리는 그러한 곳을 비유적으로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상담은 우리에게 가능한 사실적 천국에 대한 안내의 활동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말합니다.


"천국은 네 안에 있다."


이야기의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백사장에 그려진 평면적 동그라미의 안에 포함된 또 다른 집합으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동그라미의 테두리로 가려져 있는 그 백사장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테두리의 안이지만, 실은 동그라미에 포함될 수 없으며 결코 동그라미가 아닌 그 밖을 지시합니다.


이처럼 마음은 자아라고 하는 이야기 속에 결코 편입될 수 없는 그 밖의 존재의 사실입니다.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마음의 작용은 천국을 향한 네비게이션으로 작동합니다.


마음을 이야기에서 해방시켜 천국을 향하게 하는 것, 그래서 이것이 실존상담의 방향성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안심하고 마음껏 존재해도 되는 천국에 대한, 마음대로 사는 신비한 재미를 느껴도 되는 현실에 대한, 실질적 프로젝트가 바로 실존상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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